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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통령과 CIA 국장이 세균학자 유가족 '입막음'에 나선 까닭은?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2]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뉴욕 맨해튼 고층호텔에서 떨어져 죽기 하루 전, 올슨은 아내 앨리스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 "내일 집에서 보자"고 했다. 하지만 앨리스는 남편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큰 아들 에릭(사건 당시 8살)에게 아버지의 석연찮은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어머니 앨리스는 '이제 그만 잊자'고 했으나 에릭은 달랐다.

에릭과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

에릭은 커가면서 어머니가 때때로 들려주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들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어머니 말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대목은 "아버지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세균무기를 쓴다며 매우 못 마땅해 했다"는 것이다. 에롤 모리스 감독의 5부작 다큐 '웜우드'(Wormwood, 2017년, 한국판 번역은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에서 에릭이 모리스에게 했던 말을 옮겨본다.

"어머니가 자주 말씀하시길, 당시 아버지의 심리상태는 한국의 상황 때문에 굉장히 심란해하셨어요. 아버지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생물학적 무기(세균무기)를 사용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무척 괴로워하시고 힘들어하시면서 화를 내셨다고 해요(He was very, very distraught, upset, and angry). 미국은 (한반도 세균전을 폈다는) 그 사실을 계속 부인하고 있었거든요."(미국의 한반도 세균전에 대해선 연재 66-68 참조).

에릭은 하버드대 심리학박사 학위를 지녔지만, 학문 연구자로서의 길마저 접고 부친의 의문사 진상규명에 말 그대로 평생을 바쳤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거나 '집착이 심하다'는 말도 들었다. '기자회견이 있으니 오시라'는 전갈을 받은 어떤 기자들은 "CIA가 위험인물을 제거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새삼스레 뭘"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배상금을 더 바라는 거냐"는 소리도 들렸다. 그럴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곤 했다.

현실을 돌아보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도 세월호 타령이냐?" 올해 4월 10주기 추모 행사를 준비하던 유가족들은 이런저런 험담을 들었다. 죽은 세균학자의 유가족이나 세월호 유가족들의 공통점을 꼽자면, 분명히 희생자가 생겨났지만 책임지는 이는 없고, 또한 의혹마저 제대로 풀리지 않은 채 아픔을 더해 왔다는 것이다(독자분들께 2024년 '진실의 힘'에서 펴낸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 미 세균학자 프랭크 올슨이 CIA 요원으로 근무했던 데트릭 기지 정문. ⓒ바이두

"내 말 들려줄 좋은 기자 없을까?"

지난 글에서 프랭크 올슨은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국이 세균전을 펴는 것에 격분했고 △미국 시민들을 상대로 한 세균 모의실험과 요인 암살용 세균무기 개발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꼈고 △유럽 CIA의 비밀 기지(안전가옥)에서 소련 스파이 용의자들이 약물과 최면, 고문이 결합된 심문으로 초죽음이 되는 장면들을 보면서 못 마땅하게 여겼고 △세균무기 개발과정에서 실험용으로 쓰인 원숭이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 몹시 우울해했다는 점을 살펴봤다.

영국 작가 존 론슨은 저널리스트이자 영화제작자다. 2004년에 쓴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 (The Men Who Stare at Goats)는 소련(러시아)을 이기려면 심령술을 익힌 초능력부대를 운용해야 한다는 따위의 황당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맨몸으로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거나, 노려보는 것만으로 염소를 죽일 수 있다고 믿는다. 론슨은 9.11테러 뒤 '테러와의 전쟁' 뒤에 숨은 비이성적 상황들을 블랙 코미디 방식으로 들춰냈다. 영국 BBC에서 이 책을 바탕으로 3부작 미니 시리즈를, 조지 클루니는 제작과 주연을 맡아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론슨은 책 뒷부분에서 약물로 인간 정신을 지배하려는 CIA의 MK울트라 프로젝트와 세균학자 프랭크 올슨의 불행한 죽음을 짧게 다루었다. 지난 주 글에서 봤듯이, 프랭크 올슨의 아들 에릭은 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노먼 케노이어(데트릭 기지 연구원)를 만났고, 그로부터 "아버지 올슨은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세균전을 펴는 것에 격분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래는 작가 존 론슨이 케노이어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다.

프랭크 올슨은 유럽에서 사람들이 (CIA의 고문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국에 돌아올 무렵 올슨은 (CIA 안가에서) 목격했던 것을 폭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데트릭 기지로 이어지는 길 아래쪽에는 퀘이커교에서 나온 평화시위단(peace protesters)이 24시간 진을 치고 있었다. 올슨은 그들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곤 해서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언젠가 올슨은 노먼 케노이어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 이야기를 들려줄 좋은 기자가 없을까?"(Do you know a good journalist I can talk to?)](John Ronson, The Men Who Stare at Goats, Simon & Schuster Paperbacks, 2004, 235쪽).

CIA는 프랭크 올슨이 '내부자'가 될 가능성을 염려했을 것이다. 이미 CIA는 영국 정보부(MI6)로부터 올슨이 국가기밀을 누출할 '위험인물'이라는 통보를 받고 있었다(연재 71 참조). 직업적 스트레스를 견디기 어렵고 과학자로서의 양심상 더 이상 손을 더럽힐 수 없다고 판단한 올슨은 사표를 내려 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자유로운 삶이 아닌 죽음이었다.

대통령과 CIA국장이 나선 '입막음'

올슨의 의문사 22년 뒤인 1975년 그의 죽음이 재조명됐다. 1975년은 미국에겐 변화와 격동의 해였다. 베트남전쟁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채였고, 워터게이트 사건도 긴 그림자를 끌고 있었다. 그 무렵 정부에 대한 미 시민들의 믿음은 크게 흔들렸다. 그런 가운데 CIA와 미 연방수사국(FBI)의 월권행위를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불을 당긴 것은 <뉴욕타임스> 기자 시모어 허시였다. 그는 퇴직한 CIA 요원들의 익명 증언을 바탕으로, 1974년 12월 CIA가 미국인들을 상대로 불법 도청과 개인 우편물 검열 등 대규모 사찰을 벌여 왔고, LSD 약물을 이용해 피의자를 고문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폭로기사를 <뉴욕 타임스>에 실었다(기사 제목: Massive CIA Spying on Americans).

1975년 초 넬슨 록펠러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한 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299쪽에 이르는 '록펠러 보고서'(1975년 6월10일)의 주요 항목 가운데 하나가 올슨의 의문사였다. "CIA가 올슨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LSD를 몰래 음료에 타 먹였고, 그 부작용으로 올슨이 호텔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 조사위의 결론이었다.

(CIA는 LSD의 환각작용으로 말미암아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테니, 올슨의 죽음에 국가가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타살' 쪽으로 조사 방향이 번지는 것을 막았다. '록펠러보고서'의 결론은 CIA 쪽에서 솜씨 있게 만들어낸 그럴듯한 거짓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데 지나지 않았다).

올슨의 유가족은 기자 회견을 열고 "가장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정부를 고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 정부가 바삐 움직였다. 대통령과 CIA 국장이 그들을 만나 달래면서 거액의 배상금을 건네기로 약속했다. "소송으로 가면 당신네들이 질 게 뻔하다. 그러면 배상금도 없을 테니 소송은 포기하는 게 나을 거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CIA로서는 소송으로 가는 길만큼은 막아야 했다. 법정 싸움이 붙으면, 관련 문서들에 대한 원고 쪽의 접근권이 보장되고 CIA의 비밀들이 드러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1975년 7월21일, 올슨의 아내 앨리스, 맏아들 에릭, 둘째 아들 닐스, 딸 리사, 그리고 리사의 남편 그렉이 백악관으로 초대되었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리처드 닉슨의 후임자)은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사과드린다"고 했다. 유가족은 17분 동안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소파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통령으로부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일까, 환한 웃음을 짓는 모습을 사진에 남겼다.

입막음용 행사는 또 있었다. CIA 국장 윌리엄 콜비(국장 재임 1973-1976)의 초청을 받았다. 백악관을 다녀온 1주일 뒤, 올슨의 두 아들과 딸은 변호사와 함께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CIA 본부로 갔다. 점심식사가 끝날 무렵 콜비는 가족들에게 올슨의 죽음과 관련된 두툼한 문서 뭉치를 건넸다. CIA가 올슨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체 조사한 내용을 담은 문서들이었다. 기밀 해제된 것들만 추려낸 탓일까, 앞뒤가 맞지 않고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대충이나마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은 이러했다. 올슨의 죽음 딱 열흘 전인 1953년 11월18일, 데트릭 기지에서 멀지 않은 딥 크리그 호숫가에서 CIA 요원들과 데트릭 기지 연구원들이 며칠 동안 함께 모임을 가졌고, CIA 간부(나중에 밝혀진 그의 이름은 시드니 고틀립)가 LSD 약물을 올슨의 칵테일에 몰래 넣어 마시게 했고, 그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올슨의 죽음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 세균학자 올슨의 의문사를 둘러싼 법정 소송을 막기 위해 대통령과 CIA 국장이 나섰다. 1975년 백악관에서 포드 대통령을 만난 올슨의 유가족. ⓒ위키미디어

허시, "그 바닥 생리를 몰랐다"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 1987년 1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치사 사건이 터진 뒤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내놓았던, 이제는 전설(?)로 남은 거짓말이다. 모진 물고문을 겪은 젊은이(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를 새가슴 지닌 약골로 몰아간 경찰간부의 거짓말은 많은 시민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물고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되자, 치안본부 박처원 처장은 고문 가담자가 2명이라 속였다. 그래서 2명만 구속됐지만, 나중에 5명으로 밝혀졌다. 이런 거듭된 거짓말은 1987년 6.10민주항쟁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됐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은폐 솜씨가 남달랐다. 데트릭 기지의 세균학자이자 CIA 요원이었던 프랭크 올슨(1910-1953)의 죽음은 '자살'로 발표됐다(연재 71). 1975년 재조사 때엔 형식적으로 '자살'인 것은 맞지만,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LSD 약물을 몰래 칵테일에 넣어 마시게 한 책임이 있다면서 유가족에게 배상금을 건넸다. 죽음의 원인도 '자살'에서 '사고사'로 바뀌었다. 하지만 또 거짓 설명이었다. '타살' 또는 '제거', '처형'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문제는 LSD 복용에 따른 '사고사'였다고 그럴 듯하게 둘러댄 거짓 설명에 가족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속아 넘어갔다는 점이다. '탐사보도의 전설'로 일컬어지는 시모어 허시조차도 그때 그 발표를 그대로 믿었다. 모리스 감독의 다큐 '웜우드'에서 허시는 이렇게 스스로를 나무란다.

"제가 그만큼 순진했어요. LSD를 투약하고 자살했다는 (CIA 쪽) 해명을 믿었죠. 기자 생활을 하며 (베트남전쟁에서의 미라이 학살 보도 등으로) 상이란 상은 휩쓸었지만, 그때까지도 그 바닥(정보기관의 생리)을 잘 몰랐던 거죠. CIA가 사람들에게 LSD를 시험했다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잖아요.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CIA가 사람을 죽였다는 겁니다."

콜비 CIA 국장이 숨긴 진실

1976년, 올슨의 유가족들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민·형사 소송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75만 달러(요즘 화폐가치로 약 300만 달러)를 받았다. 1975년 처음 백악관에서, 그리고 1주일 뒤 CIA 본부에서 들은 액수는 125만 달러였는데, 50만 달러나 깎았다(그 바로 뒤 유족들은 또 다른 불행을 맞이했다. 배상금의 일부를 나눠 가졌던 딸 리사와 그녀의 남편 그렉은 목재회사에 투자한다면서 전세 경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사고로 죽었다).

올슨이 죽었을 때 CIA 국장은 앨런 덜레스였다(국장 재임 1953-1961).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존 덜레스의 동생이다. 콜비의 입장에서 보면 (거칠게 말하자면) '덜레스가 싸놓은 똥을 대신 치운' 격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낸 회고록(Honorable Men: My Life in the CIA)에서 그날의 점심식사를 가리켜 "내가 받은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one of the most difficult assignments I have ever had)라고 썼다.

콜비는 같은 회고록에서 "올슨은 CIA 요원이었다"고 처음 밝혔다. 그때껏 가족들은 올슨이 데트릭 기지로부터 고연봉을 받는 계약직 민간인 연구자로 알고 있었다. 회고록에서 끝끝내 말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사실이 또 있다. 올슨이 비밀을 누설할 위험인물로 찍혀 '처형'됐다는 사실을 숨겼다. 다큐 '웜우드'에서 시모어 허시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CIA는 심혈을 기울여 그 사건을 깜쪽같이 묻어 버렸어요. (LSD 부작용 탓에 자살 충동을 느껴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서요. 아무도 이 사건의 진실을 모른다는 게 CIA에겐 큰 기쁨일 겁니다. 특히 (사건에 관계했던) 선임들은 정말 기뻐할 거에요. 자기들이 꾸민 (속임수) 기술이 먹혔으니까요. 그들은 이렇게 말할 거에요. '완전범죄 한 건 했다. 소수는 알겠지만 그게 뭐 대수야? 나머지는 아무도 모르는데...'라고 말이죠. 그들의 승리에요. 1 대 0으로 승리죠."

▲ 1975년 올슨의 유가족을 CIA 본부로 초대했던 윌리엄 콜비 국장과 CIA본부 입구. 1996년 미 검찰이 올슨의 죽음을 재조사한다는 통보를 받은 뒤 목숨을 끊었다. ⓒ위키미디어

41년 만에 무덤을 파헤치다

1953년 장례식에서 가족들은 올슨의 죽은 얼굴을 보지 못했다. 데트릭 기지 관계자들은 "고층 호텔에서 추락사한 만큼 온몸이 심하게 훼손됐으니 굳이 고인의 끔찍한 모습을 보지 않는 쪽이 낫겠다"고 했다. 아들 에릭의 마음은 늘 아버지의 관에 가 있었다. 비밀이 가득한 나무 상자를 열어 제쳐 부검을 함으로써 진실에 한 발짝이라도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컸다. 1994년 에릭은 무덤을 파헤쳐 아버지 올슨의 관을 들어올렸다. 어머니 앨리스가 고인이 된 뒤의 일이었다. 생전의 앨리스는 남편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제임스 스타스(조지워싱턴 대학교) 교수가 이끄는 법의학팀이 부검에 나섰다. 시신은 방부 처리가 돼 있었다. 약간 오그라들고 거무스레한 모습이었지만, 법의학 전문가들이 부검을 하기엔 거의 완벽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에릭이 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였다(CIA 시각에서 본다면, 방부처리를 막았어야 했다. CIA로선 길게 내다보지 못한 실수였다).

워싱턴DC의 조지워싱턴 대학에 있는 병리학연구실 수술대 위에 올슨의 시신이 놓였다. 다리는 부러진 상태였고 두개골에는 구멍이 나있었다. 법의학 팀이 보기에, 올슨의 얼굴엔 창문 유리에 부딪친 것과 일치하는 열상은 없었다. 스타스 교수는 기자들에게 "얼굴이 창문에 부딪히지 않고 떨어졌다"고 알렸다. 역사학자 마이클 이그나티에프(중부유럽대학CEU 총장, 전 캐나다 하원의원)이 '누가 프랭크 올슨은 죽였는가'란 제목을 단 <뉴욕타임스> 기고문 내용을 보자.

추가적인 검사에서,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제임스 스타스가 이끄는 법의학 팀은 올슨의 왼쪽 관자놀이에 강타 당한 것을 발견했다. 올슨이 창밖으로 나간 뒤, 빠른 하강 속도로 말미암아 더 큰 외상을 입었을 것이기 때문에, 병리학자들은 그가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고 동의했다. 결론은 올슨이 자는 동안이나 몸싸움 끝에 누군가가 (머리를 세게 때려) 올슨을 기절시킨 다음 창밖으로 내팽개쳤다는 것이다(Someone had knocked Olson out, either while he slept or after a struggle, and then thrown him out of the window)(Michael Ignatieff, Who killed Frank Olson? <뉴욕타임스> 2001년 4월1일).

CIA 암살 매뉴얼, "고층에서 떨어뜨려라"

다큐 '웜우드'(Wormwood)에서 재현한 장면을 보면, CIA가 고용한 전문 킬러 2명이 저항하려는 올슨을 후려쳐 기절시킨 다음 창문 밖으로 그를 떨어트렸다. 올슨이 킬러들과 대치하는 동안 같은 방에 있던 화학자 로버트 래쉬브룩은 화장실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다큐 재현 장면에서는 새벽 2시 넘은 한밤중에 호텔 방문의 잠금장치를 풀어 킬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던 사람도 래쉬브룩이었다.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CIA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위험인물을 '제거'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왔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총리나 콩고의 패트리스 루뭄바 총리 암살 시도들이 그러했다. CIA 요원 또는 CIA의 용역을 받은 전문 킬러들은 '암살 매뉴얼'(assassination manual)을 참고로 행동에 나섰다. 그 매뉴얼에 적힌 으스스한 내용을 보자.

단순 암살에서 가장 효율적인 사고는 75피트(약 230미터) 또는 그 이상 딱딱한 표면에 떨어지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통로, 계단, 스크린이 없는 창문과 다리(교량) 등이 이에 해당된다. 갑작스럽고 격렬하게 (암살) 대상자의 발목을 때려 가장자리 쪽으로 넘어뜨려야 한다. (떨어트리기에 앞서) 관자놀이에 일격을 가해 먼저 기절시키거나 약물을 투여해야 한다.(Michael Ignatieff, 같은 글)

1997년 CIA는 (프랭크 올슨이 추락사로 죽은 해인) 1953년 말에 운용하던 암살 매뉴얼을 기밀 해제했다. 올슨의 아들 에릭은 이 CIA 암살 매뉴얼을 읽으면서 아버지가 떨어졌거나(fallen), 뛰어내린(jumped)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떨어트려졌을(dropped)것이란 확신을 품게 됐다.

▲ 'MK울트라 프로젝트'란 이름 아래 LSD와 같은 환각 약물로 용의자를 심문하는 실험을 했던 데트릭기지 내부 실험실. ⓒ위키미디어

콜비 CIA 국장의 자살

아들 에릭은 부검 결과에 따라 아버지 올슨이 타살됐다는 생각을 굳혔다. 1996년 봄 미제 사건을 전담하는 맨해튼 지방검찰청으로 가서 스티븐 세라코 검사를 만났다. 맨해튼 지방검찰청은 미 CIA 법무위원회에 올슨의 의문사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CIA는 즉각 답변을 보내왔다. '소환에 응하기는 어렵겠지만 조사에는 협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은 관련자 가운데 윌리엄 콜비 전 CIA 국장을 먼저 조사하겠다고 알렸다.

그러자 곧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콜비가 여름 별장에서 카누를 타고 나갔다가 실종됐다는 것이었다. 시신은 1주일 뒤에 발견됐다. 콜비의 아들은 부친이 "내 시신은 깊은 골짜기에 있을 것이다"라며 자살을 암시하는 짧은 메모를 남겼다고 했다. 또한 지난날 그가 CIA 국장(1973-1976) 때에 관계 했던 여러 비밀작전을 놓고 "회한과 죄책감을 비쳤다"고도 했다.

베트남전쟁 때 미 CIA가 펼쳤던 악명 높은 작전이 '피닉스 프로그램'(Phoenix Program)이다. 명목은 '정보수집 활동'이라 했지만 베트콩 협력 용의자로 찍힌 사람들을 무차별로 체포·고문·암살했다. 그로 말미암아 많은 베트남 지식인들이 '의문사'로 죽었다. 콜비가 국장이 되기 전인 1968년부터 행해졌던 그 작전으로 8만 명 넘는 사람들이 죽은 (CIA 용어로는 '무력화된') 것으로 알려진다.

국가안보 내세워 CIA에 면죄부

콜비 전 국장의 갑작스런 자살 등 이런저런 이유로 검찰의 재수사는 벽에 부딪치고 흐지부지 됐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미 검찰이 CIA의 범죄 혐의를 추궁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항 하나. 1975년 올슨의 유가족이 포드 대통령을 만난 다음날 열린 하원 청문회에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로런스 휴스턴 변호사는 1953년 올슨이 죽었을 때 CIA의 법률자문이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올슨의 죽음 한 달 뒤 CIA-법무부 사이에 업무상 양해합의(agreement of understanding)가 이뤄졌다.

합의의 핵심 내용은 'CIA가 중범죄를 저지르더라도 그것이 국가 안보에 관련된 사항이라면 기소되지 않고 처벌받지 않는다'였다(The CIA would not be prosecuted for serious crimes, if the claim of national security could be invoked). 그야말로 초법적인, 헌법을 무시한 합의였다. CIA 요원이 미국 시민을 죽여도 (국가안보라는 명분 아래) 기소되지 않기로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능한 일인가? CIA-법무부 사이의 비밀 합의는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줬다.

"진실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버지니아주 랭글리 CIA 본부 건물 입구에 크게 새겨져 있는 문장이다. 1975년 아들 에릭이 콜비 국장의 초대를 받아 갔을 때도 그 문장이 인상적으로 다가 왔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진실은 기만과 조작으로 감춰졌다. 이를 두고 캐나다 역사학자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정의가 없으면, 책임도 없고, 책임이 없으면, 치유도, 해결도 없다'고 비판한다(Michael Ignatieff, 같은 글).

시모어 허시, '제보자 보호' 내세워 침묵

2013년 아들 에릭은 탐사보도의 전설 시모어 허시 기자를 찾아갔다. 허시와는 1975년부터 인연을 맺어왔던 사이다. 에릭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싸고 허시가 썼던 1975년의 기사는 그의 기자 경력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버지 올슨이 CIA 손에 타살·처형됐다고 믿는다"는 에릭의 말을 듣고 허시는 그 자리에서 어딘가로 확인 전화를 걸었다. 이틀 뒤 허시는 (CIA 관련 고급 정보원으로부터) '올슨이 처형됐다'는 말을 듣고 에릭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허시는 '제보자 보호'를 이유로 입을 닫았다. "다른 무엇보다 정보원을 지켜주는 것이 제1원칙이다. 내가 제보자로부터 들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다 밝히면, 그는 에드워드 스노든 같은 처지가 되고 만다"고 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 국가안보국(NSA) 요원이었던 스노든은 2013년 NSA가 대규모 감청 시스템을 운용하는 '빅 브라더'라는 사실을 폭로했던 '내부자'로, 지금은 러시아에 망명중이다.

"아무리 제보자 보호가 중요하다 해도, 이게 망설일 일이냐?"며 불같이 화를 내는 에릭을 이해한다면서도, 허시는 'CIA의 처형 이유'에 대해선 지금껏 침묵하고 있다. 허시(1937년생)는 나이 90이 다 되간다. 이 노(老)기자가 평생 추구해왔던 '탐사보도' 저널리스트의 본능으로 돌아간다면, 세균학자 프랭크 올슨이 '위험인물'로 꼽혀 제거된 까닭이 무엇인지 밝혀질 것이다.

독자분들이 세균학자 올슨의 죽음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결국은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과 관련해서다. △올슨의 아내 앨리스, 그리고 올슨의 동료 연구원이었던 노먼 케노이어, 이 두 사람의 증언(세균학자 올슨의 분노와 사직하려 했던 이유), △영국인 조지프 니덤(케임브리지대, 생화학)을 중심으로 한 '국제과학위원단'(ISC)의 보고서(연재 67), △스티븐 엔디콧과 에드워드 해거먼(둘 다 토론토 요크대학, 동아시아역사학)의 추적과 분석(연재 68) 등 한국전쟁 중 미국의 세균전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시모어 허시의 경우에서 보듯이, 결정적인 '스모킹 건'(관련 문서)이 어딘가에 있긴 하다. 다만 아직은 꽁꽁 숨겨져 있다는 게 문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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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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