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월, 그러니까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다. 바리바리 이불 보따리와 책짐을 꾸려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다. 남녘에서 살다온 내게 관악 계곡의 바람은 어찌 그리도 살을 에던지. 시절이 그만큼 엄혹했기 때문이었을까. 공부에 지치면 서점에 가 비법률 서적을 훑어보는게 유일한 휴식이었다.
<동양학, 어떻게 할것인가>를 손에 들었다. 가난한 고시생의 재정을 망각한 채 구입했다. 고시원 책상에 눌러앉아 고시 공부하듯 형형 색색의 연필을 동원해가며 탐독했다. 민음사에서 그 해 1월 5일 출간한 초판본이다. 훗날 속표지에 메모를 남겼다. "내 젊은 날 사고에 결정적 영향을 준 책" 예나 지금이나 나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광팬’이다. 선생 덕분에 번역의 중요성을 알았고, 선생 덕분에 동서양 고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었고, 선생 덕분에 경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학문의 숙명에 대한 겸손함을 배웠다.
그때 줄쳐가며 읽었던 185면의 두 줄을 인용한다.
"서양철학사가 플라톤의 각주인 것처럼 중국철학사는 <주역周易>의 해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책을 펼쳐보다 놀란다. 그때만 해도 주역 부분 활자를 '주역'이라고 쓰지 않고 '周易'이라고 쓰여있다. 정확히 39년 전이다. 세상은 이렇게 변했다. 그런데 스무 살 고시생은 이 문장을 왜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왜 이 부분만을 특별히 연필이 아니라 빨간색 색연필로 강렬하게 줄을 그어두었을까.
2022년 여름 선생께서 <도올 주역 강해>를, 올해 4월에는 <도올 주역 계사전>을 펴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을 예측할 수는 없다. 한 개인의 삶이란 대단히 연약하고 불가예측적이며 그렇다고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불안과 고통이 겹쳐지는 시간의 연속들이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든 예측하고 훔쳐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하도 시대가 어수선하고, 생각의 좌표가 없어지고, 가치기준이 흐려지고, 유튜브의 환경 속에서 거짓정보가 난무하게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갈팡질팡 점占에까지 의지하게 되는 현상이 횡행하게 되는 것이다." (<도올 주역 강해>)
"(<계사>)텍스트가 우리에게 발하는 삶의 메시지를 하나하나 터득해나갈 때 진정으로 독자들의 삶 한가운데서 이론이 생겨날 것이다. 읽자! 그리고 말하자! 이것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나는 고전으로, 경서로 이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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