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서 임신중지가 주요 쟁점으로 부상한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관련한 첫 공식 연설에서 결정을 각 주에 맡기겠다는 모호한 입장을 밝혔다. 해당 입장이 사실상 현재의 혼란과 임신중지권 퇴보를 방치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되는 가운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곧바로 임신중지에 대한 국가적 보호를 되살리겠다고 받아쳤다.
8일(이하 현지시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SNS)에 게시된 영상 연설을 통해 임신중지 정책은 "각 주의 투표나 입법, 혹은 양쪽 모두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결정된 것은 해당 주의 법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신중지에 대한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임신중지 관련 법이 "많은 주에서 다를 것이고 많은 주가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주수를 달리할 것이며 일부는 다른 주에 비해 보수적일 것"이라며 "결국 모든 것은 (각 주) 국민의 뜻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성명에서 국가 차원의 임신중지 정책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임신중지에 관해 별다른 개선책 없이 현상을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2022년 임신중지에 대한 헌법적 보호를 규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뒤 미국에선 주별로 다른 규제가 난립했고 이에 대한 소송이 잇따르며 혼란이 거듭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임신중지에 관한 권리가 크게 후퇴해 거의 20개 주에서 임신중지를 대부분 혹은 전면 금지했다. 15~44살 미국 여성 중 약 3분의 1이 이들 주에 거주 중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연설에서 강간, 근친상간, 임산부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 임신중지 금지에 대한 예외를 지지한다고 밝힌 것 외에는 각 주가 입법 때 고려해야 할 기준 등도 제시하지 않았다. 현재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많은 주들에서 강간과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에 대해서도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달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선 임신 15주 이후 임신중지 금지를 선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뉴욕타임스>(NYT)는 이후 민주당이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전국적 임신중지 금지를 선호한다고 공격함에 따라 전국적 제한에 대한 발표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트럼프 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연설이 "모호"했고 "임신중지 제한에 대한 별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며 "정치적 편의"를 위해 이 같은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임신중지 반대 단체들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지만 유권자 다수가 임신중지 금지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애매한 입장을 취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미 보건정책연구단체 카이저가족재단(KFF)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 8명 중 1명은 올해 선거에서 임신중지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답하는 등 임신중지가 대선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한 가운데 입장을 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해당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55%가 전국적으로 임신중지권이 보호돼야 한다고 답했고 19%는 이에 반대했다. 임신중지가 여성과 의료제공자의 협의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고 보는 응답자가 80%에 달했으며 임신중지 가능한 시기 및 조건을 의회에서 정해야 한다는 응답은 19%에 그쳤다.
임신중지 반대 단체 프로라이프 아메리카는 성명을 내 국가적 임신중지 금지를 옹호하며 "이 문제를 각 주로 되돌린"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 "깊이 실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패트릭 머레이 미 몬머스대 여론조사연구소장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임신중지에 관한 입장은 "계산된 것으로 보인다"며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지지자 중 일부는 약간 실망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지지자를 잃을 위험은 전혀 없다"고 봤다고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즉각 공세에 나섰다. 그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된 이유"라고 지적하고 "내가 재선되면 이를 복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로 대 웨이드 전복 뒤 임신중지 시술을 거부당해 죽을 뻔한 여성의 영상을 공개하며 "트럼프가 이런 일을 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로 대 웨이드 전복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2024년에 유권자들이 그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걱정하고 있다"며 "트럼프는 로 대 웨이드를 폐기할 법관을 임명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비판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미 연방대법원은 6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과 3명의 진보 성향 대법관으로 구성돼 보수 우위로 편성돼 있는데 이 중 3명의 보수 대법관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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