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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밀려나는 잉글랜드 축구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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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밀려나는 잉글랜드 축구의 주역들

[이종성의 스포츠 읽기] 담장 높인 EPL '축구 정원'에 초대받지 못한 노동자 계급

박지성과 손흥민 덕분에 꽤 많은 한국인이 관심을 갖게 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는 21세기 영국이 자랑하는 소프트 파워 중 하나다. 특히 산업적인 면에서 그렇다. 지난 2021~22 시즌 동안 EPL 20개 구단이 벌어들인 수입은 9조 2000억 원이 넘는다.

이 같은 엄청난 수입에는 축구가 스포츠 종목 가운데 가장 세계화된 스포츠라는 점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EPL의 해외 중계권료 수입은 이미 영국 국내 중계권료 수입을 넘어 섰다.

EPL 경기장에서 소외된 노동자 계층

하지만 EPL의 상업적 성공은 잉글랜드의 전통적 축구 팬인 노동자 계층을 소외시켰다. 너무 가파르게 오른 티켓 가격 탓이다. 현재 EPL 경기의 평균 티켓 가격은 5만 원이 조금 넘는다. 하지만 5만 원짜리 티켓을 구매해 입장하더라도 경기를 제대로 관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좌석과 그라운드의 거리가 멀어 선수들은 마치 성냥개비처럼 보인다. 특히 빅 클럽의 홈 경기에는 이런 문제가 심해진다.

EPL 관중은 이제 중산층 이상이 대다수다. 이미 2011년에 EPL 경기 관람객 75%가 중산층 이상이라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19세기 말부터 1960~70년대까지 '노동당 집회'를 연상시켰던 잉글랜드 프로축구 경기장의 관중석 풍경은 이제 옛말이다. 1989~1999년 사이에 프로축구 경기 티켓 가격은 평균 312%나 올랐다. 이 기간에 54.8%가량 올랐던 영국의 소비자 물가지수와 비교하면 축구 티켓 가격은 정말 무섭게 올랐다.

축구도 산업이다. EPL 클럽들이 더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해 경기장을 새로 단장하고 고급 좌석을 늘려 티켓 가격을 올리는 것을 탓할 수만은 없다. 세계를 주름잡는 유명 감독들과 수 많은 전 세계 스타들이 뛰는 EPL을 매우 글로벌한 '축구 정원'으로 가꾸려는 이들의 노력도 폄훼할 수 없다. 하지만 잉글랜드 노동자 계층 사이에서 '이제 EPL은 우리가 아닌 중산층과 외국인을 위한 스포츠가 됐다'는 비아냥 섞인 농담이 회자된 지 오래다.

경기장 직관(직접관람)은커녕 부담스러운 EPL 중계 시청 구독료 때문에 이들은 동네 펍(선술집)으로 내몰렸다. 동네 펍에는 축구를 보고 싶은 돈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 자주 펼쳐진다. 경기장 주변의 펍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그곳에선 응원하는 클럽의 스카프를 두르고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면서 맥주 한두 잔을 홀짝거리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동자 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에게는 잉글랜드 프로축구에 대한 일종의 노스탤지어(향수)가 있다. 노동자를 상징했던 납작한 '플랫 캡(Flat cap)'을 눌러 쓴 팬들이 바다를 이루어 엄청난 함성을 쏟아내는 축구장의 풍경이다. 그래서 과거 축구 경기장에 운집했던 팬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영국 축구 잡지와 신문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런 사진은 이들이 지난 100여 년 간 잉글랜드 프로축구의 실질적인 최대 후원자였으며 가장 열광적인 팬이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 EPL 경기장에서 가파르게 오르는 티켓 가격에 항의하는 플래카드를 내건 축구팬 ⓒWordPress.com

잉글랜드의 축구 열기를 제조한 공장

EPL 선수들의 임금은 지금도 주급으로 표시된다. 왜 주급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잉글랜드 축구 열기가 공장에서 활활 불타올랐고 19세기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주로 주급으로 임금을 받았던 사실과 관련이 깊다. 당시 축구선수들은 어디까지나 공장 직원이라 주급을 받았다.

공장은 잉글랜드 축구를 이끌 선수들은 물론 수많은 축구 팬을 만들어냈다. 공장마다 축구 클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튼이나 해로우 스쿨 같은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를 졸업한 초기 축구의 설계자들은 축구를 그들만의 전유물로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1880년대로 접어들면서 잉글랜드 축구의 지배권은 공장 클럽으로 넘어갔다.

공장에서 창설된 클럽들은 패스 위주의 짜임새 있는 축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 드리블을 미덕으로 여겼던 영국 도련님들의 축구와는 확실하게 구분됐다. 이 같은 축구 스타일은 산업화된 영국 공장에서 이뤄졌던 분업 체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경기력에서는 공장 클럽들이 영국 지배계급이 주축이 된 클럽에 비해 우위를 보였지만 경기장에서의 팬 층은 달랐다.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평일 오후에 펼쳐지는 축구를 한가롭게 구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토요일과 일요일도 노동자들이 축구 관람을 할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토요일에도 그들은 일을 해야 했고, 안식일인 일요일은 축구 경기가 펼쳐지지 않았다. 야간 경기도 불가능했던 시대라서 초기 잉글랜드 축구 경기의 관중석에는 노동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주로 월요일에 축구 경기를 관람했다. 영국 수공업자들이 행했던 전통인 '성스러운 월요일(Holy Monday)' 때문이었다. '성스러운 월요일'은 토요일도 하루 종일 일해야 했던 노동자들에게 주중에 휴식할 수 있는 날을 주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만들어진 관습이었다. 노동자들은 성스러운 월요일에 꿀맛 같은 휴식을 즐겼다.

문제는 휴식일인 월요일에 노동자들이 주로 술을 마셨다는 점이다. 그래서 화요일 아침에는 작업장에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들의 건전한 여가선용이라는 의미가 퇴색됐다는 이유로, '성스러운 월요일'에 대한 영국 사회의 반대 여론이 생겨났다.

공장법과 토요일 반일 근무제가 바꾼 축구장의 풍경

노동자들에게 휴식은 중요한 문제였다.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토요일 반일 근무제'에 대한 의견이 제기됐다. 일종의 관습에 불과한 '성스러운 월요일'은 공식적인 휴일이 아니어서 공장주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1802년에 제정된 공장법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진일보했다. 원래 공장법은 여성과 아동 노동자의 노동착취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었다. 1850년 공장법에는 '어린아이와 여성 노동자는 섬유공장에서 토요일 2시 이후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부분이 추가됐다. 토요일 반일 근무제는 이후 서서히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확대됐고 섬유 공장이 아닌 다른 업종으로까지 확산했다.

다만 토요일 반일 근무제는 업종, 지역, 공장주의 의지에 따라 적용 시점이 달랐다. 가장 먼저 토요일 반일 근무제를 적극적으로 택한 업종은 많은 여성과 어린이가 동원됐던 면직 공장이었다. 영국 면직 공업의 중심지인 맨체스터는 1860년대에 거의 모든 공장에서 토요일 반일 근무제를 채택했다. 어찌 보면 맨체스터의 이 결정은 이 도시가 19세기부터 세계 축구의 수도가 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토요일 12시에 작업을 마친 맨체스터의 수많은 노동자들은 집으로 가 작업복을 갈아 입고 축구장으로 향했다. 꽤 많은 토요일 축구 경기의 시작 시간이 오후 3시로 정해진 까닭이다. 이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공장 소속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뛰는 모습을 보며 친숙함을 느끼고 열광했다. 공장 클럽을 응원하는 노동자들과 자연스러운 정서적 연대도 이뤄졌다.

물론 크리켓이나 럭비 경기장으로 향하는 노동자들도 있었지만 축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공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럭비 클럽이나 크리켓 클럽의 숫자가 축구 클럽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축구는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1920~30년대 영국 축구 경기장은 노동자 관중 일색이었다. 수많은 노동자 팬들을 수용하기 위해 경기장은 점점 커졌고, 경기장 주변에는 펍과 간단한 음식을 즐길만한 음식점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처럼 토요일 반일 근무제의 전국화는 잉글랜드 축구가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축구 선수 담배 광고의 유행과 '앞니' 빠진 노동자 축구 팬

축구장에 노동자 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여러가지 변화도 일어났다. 원정 경기에 출전한 '우리 팀' 소식을 빨리 알려주기 위해 펍에는 속보대가 설치됐고 주말 경기 프리뷰와 리뷰 기사가 담긴 축구 신문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축구 선수가 노동자의 영웅으로 부상하자 이들을 활용한 광고도 이어졌다. 담배 광고가 축구 선수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노동자만 흡연을 즐긴 건 아니지만, 흡연은 짧은 점심 시간에 담배 한 대로 애환을 달래던 노동자의 문화였다. 광고와 더불어 노동자의 담배 소비량은 엄청나게 늘어났고 담배 브랜드들의 판촉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들이 피우는 담배 광고에 축구 선수만큼 매력적인 모델은 없었다. 축구 선수 역시 담배 광고 모델이 되는 걸 영광스럽게 여겼다. '드디어 내가 축구 스타가 됐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1920~30년대 잉글랜드 축구를 대표했던 공격수 딕시 딘이 대표적인 담배 광고 모델이었다.

▲ 딕시 딘의 담배 광고 ⓒthefootballhistoryboys.com

그라운드와 관중석을 노동자가 점령한 축구장에 앞니가 없는 선수나 팬들이 꽤 많았던 것도 그 시대 영국의 노동 현실을 표상한다.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버텨야 하는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열량 보충이었다. 19~20세기 초반, 대영 제국은 '설탕의 제국'을 구축해 이 문제를 풀어갔다. 영국은 카리브해 연안 국가에서 흑인 노예 노동으로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만들어와 노동자에게 공급했다.

이를 통해 영국에 공급된 설탕 가격은 매우 쌌다. 노동자에게 홍차나 커피에 설탕을 듬뿍 쏟아 마시는 것은 가장 값싸게 열량을 보충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영국 노동자들은 설탕에 중독됐다. 너무 많은 설탕을, 그것도 너무 오랜 기간 섭취한 이들의 앞니가 사라졌다. 과거 잉글랜드 축구 이미지가 앞니 빠진 노동자들이 열광하는 경기로 굳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잉글랜드 축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노동자 계층이 점차 축구장 밖으로 밀려나는 현실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아직도 EPL 토요일 주요 경기 시작 시간은 오후 3시다. '노동자 시간'의 전통은 여전하지만, 고된 노동을 견디며 축구로 애환을 달랬던 노동자들이 번창하는 EPL 산업의 뒤안길로 저물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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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프레시안> 스포츠 전문기자 시절, 스포츠와 사회·문화·역사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에 주목했던 언론인 출신 학자다. 이후 축구의 본고장 영국으로 건너가 드몽포트대학교에서 '남북한 축구사'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야구의 나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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