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학교와 노회찬재단은 2023년 1학기부터 200여 명의 학생이 듣는 교양강좌 '후마니타스 특강 : 6411의 목소리와 노동존중 사회'를 협력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업은 노회찬재단이 <한겨레신문>과 공동으로 진행 중인 연재 칼럼 '6411의 목소리' 필자를 매주 한 명씩 모셔 한 학기 동안 특강으로 운영합니다. '존재하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6411 당사자들이 청년들에게 전해주는 자신의 삶과 노동 이야기를 <프레시안> 지면으로 중계합니다.
첫 번째는 10년차 여성 대리운전기사인 이미영 카부기공제회 공동대표의 이야기입니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이 대표는 공제회 활동을 통해 동료들과 함께 자신보다 더 힘든 대리기사를 만나고 도울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며 자신도 행복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경남 김해에 사는 10년차 여성 대리운전기사입니다. 오전 11시면 익숙한 알람 소리에 눈을 뜹니다. 일어나면 씻고 복장부터 갖춰 입습니다. 흰색 블라우스의 검은 정장이 제가 일할 때 입는 복장입니다. 제가 일하는 '트리콜 대리운전'이라는 회사에서는 매일매일 정장을 입고 사진을 찍어 올려야 대리콜 프로그램에 로그인이 됩니다. 사진을 찍어 올리지 않거나 복장이 불량하면 배차 정지 상태가 됩니다. 프로그램을 로그인해두고 대충 밥을 먹고 집안일을 하고 시장에 다녀옵니다. 오후 1시에서 2시쯤에 차를 가지고 집을 나섭니다. 낮콜 대기를 위해서 골프장 가까운 곳으로 이동합니다. 이렇게 하루 일을 시작합니다.
1994년 제 나이 서른에 홀로서기를 했고요. 횟집, 학원, 공장, 세탁실 등 여러 일을 전전했습니다. 식료품 유통업도 했는데, 해보지 않은 장사라서 결국 큰 빚을 지고 그만두게 됐습니다. 일은 해야 하니까, 생활정보지를 뒤지다 대리운전 구인 광고를 보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다면 도둑질이 아니고, 몸을 파는 일이 아니고, 웃음 파는 일이 아니면 어떤 일이라도 해보겠다는 각오로 대리운전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일한 만큼, 또 나의 능력만큼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일을 선택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떳떳하게 이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없었기 때문이죠. 대리운전 회사 사무실을 찾아가 등록하고, 교육을 받고, 그렇게 대리운전에 발을 들여놓은 게 2011년 8월, 제 나이 47살 때였습니다.
성희롱과 야간노동에 지쳐 첫번째 대리운전 일을 그만두기까지
처음에는 아침 10시면 회사 사무실로 출근했고, 다음 날 새벽까지 일했습니다. 걷고 뛰고 한 달 만에 몸무게가 5kg이 줄었습니다. 밤에 나오는 것도 엄청 가혹했고요. 처음 타보는 남의 차, 외제 차도 문제였지만, 지리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한 번은 초행길이었는데 비도 오고 네비도 잘 안 터졌었어요. 길을 가르쳐주겠다던 손님은 출발한 지 5분 만에 잠이 들었어요. 할 수 없이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어요. '(손님 차를 끌고) 따라갈 테니 목적지까지 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만 원짜리 콜이었는데 택시비는 8000원이 나왔어요. 어쩌겠어요. 제가 부탁한 거니까, 길을 모르니까, 택시비를 지급하고 택시를 보냈는데 손님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고객님 안 일어나시면 경찰서 가겠습니다'하고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빼니까 그때서야 일어나셨어요. 대리비가 없다는 거예요. 한 20분 기다렸습니다. 집에 가서 돈을 갖다주셨는데, 그 20분이 저한테는 귀중한 시간이긴 하지만, 그분한테 더 청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속이 곪아도 참을 수밖에 없는 게 저희의 현실이었습니다. 왜 대리운전을 '막장 직업'이라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어요.
그때만 해도 여성 대리기사를 성매매하러 나온 여자 정도로 취급하는 분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했고요. 속이 상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죠. 어떤 분은 지갑에서 지폐를 다 꺼내서 셉니다. '이 돈 줄테니 자러 갑시다' 이런 분도 계셨고요. 뒷좌석에 앉아서 제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리시는 분도 계셨고, 또 슬그머니 두 손을 제 겨드랑이에 넣는 분도 계셨었어요. 당시만 해도 미투 이런 사건이 이슈화되기 전이서, 그런 손님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때마다 제가 대응할 수 있는 게, '손님 한 번만 더 그러시면 경찰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경찰서에는 한 번도 안 갔어요. 경찰서에 가면 뺏기는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저희는 시간이 돈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대응할 수가 없었어요.
한 번은 운행해서 가는 동안 손님이 계속 추근거렸어요. 제가 경고를 했는데도 안 멈추시더라고요. 그때는 무서웠어요. 차를 주차해놓고 내리는데, 제 코트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단추가 두두둑 다 떨어졌었어요. 무서워서 대응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도망 왔어요. 경찰을 부를 생각도 못했어요.
그때는 아무 생각이 안 났기 때문에 돌아와서 동료 기사들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경찰 불렀어야지', '그 자리에서 두둑이 뜯어내야지',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 말을 듣고 저는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하고 단절을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너무 무섭고, 치욕스러웠던 순간이 그들에게는 술 안주 삼는 가십거리밖에 안 됐던 거죠. 힘들어하던 그때 누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호루라기랑 후레시를 갖고 다니라고 얘기를 해줬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제 열쇠고리에는 항상 호루라기와 후레시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때가 좀 많이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또 대리기사들이 고통스러운 게 뭐냐면, 야간 개방 화장실이 없어서 다니면서 물이나 음료, 커피 이런 거는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물이 사람한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렇죠? 특히 여자 기사들은 거의 물을 마시지를 않습니다. 소변을 너무 참아서 방광염에 걸리거나 방광염이 심해서 신우신염에 걸리거나, 저도 몇 번 경험이 있지만 그런 것을 경험한 여자 기사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젊은 여자 기사들은 사실은 생리대 교환을 못해서 일을 못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분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저희들은 의논할 곳이 없었어요. 상의할 사람도 없고, 또 길흉사가 생겨도 마음을 털어놓고 상의할 곳도 없는 게 현실입니다.
나쁜 손님만 만났던 건 아니었어요. 수고한다고 격려하시고 택시비 더 주신 분도 계셨고요. 비 많이 오는 날은 또 고급 우산을 챙겨주신 분들도 계셨고, 험한 일 당한 거 이렇게 하소연하면 같이 욕을 해주시는 손님들도 계셨습니다.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밤낮이 바뀐 생활에 거의 날마다 겪는 손님들의 만행, 이런 걸 참느라고 위염, 족저근막염, 불면증 이런 것들이 생기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밤에 일을 하다 보니까 지인들 제 친구들과도 만남이 소원해지고, 저는 세상과 점점 단절이 되어갔었습니다. 오로지 일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6년을 지내다 보니 너무 지쳤어요. '신물이 난다'는 표현 아시죠? 그랬어요. 2017년 1월에 제 가까운 지인이 '사무실을 오픈하게 됐다. 경리로 좀 와달라'고 그래서 경리로 일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경리 월급이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제가 그때 학원 차 운행도 했고, 요양병원 식당에 프리랜서로 투잡, 쓰리잡 일을 하게 됐죠.
다시 대리운전 일을 시작했지만…여전한 업체의 갑질과 착취, 그리고 고립
2021년 10월에 대리운전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3년 공백기간 동안 대리운전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업체의 갑질은 여전했고요. 대리기사들은 여전히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세상은 여전히 우리한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트리콜'이라는 회사는요, 대리기사들의 자기착취를 강요하고 있는 대표적인 회사입니다. 온갖 명목으로 대리기사들을 갈취하고 있었습니다. 매주 20만 원의 주납비를 납부하고, 매일 또 출근비로 4000원을 빼가고, 카드 수수료와 법인 수수료 등도 기사들에게 부과하고 있습니다. 타 회사들의 갑질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거대 플랫폼 기업인 카카오와 티맵이 대리운전업에 진출하면서 대리기사들은 더 노예화되고, 줄 세우고, 통제하고, 그런 노예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대리 요금은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었고, 저가 콜 수행을 위해서 업체들은 기사를 등급화하고 있었습니다.
대리기사들은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죽으라고 자기착취를 스스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그에 대해 그저 업체의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 자기 사업에 실패하고, 또 회사에서 실직하고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곳이 대리운전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마저 일을 못하게 되면 갈 곳이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회사의 갑질이나 억압에도 순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모이고 뭉치고 조직하기가 힘든 게 대리기사들입니다.
대리기사들은 다들 한두 가지쯤은 사연을 가지고 있어서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대리운전을 하기 때문에, 대리운전을 일단 시작하면 지인과의 관계나 이런 게 다 끊어지는 게 현실입니다. 장기간 야간노동을 하다 보면 원하던 원치 않던 친구들과 친지들과 단절을 하게 되거든요. 저도 대리운전일을 하고 나서 아들과 소통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어요. 아들은 낮에 일하고, 저는 밤에 일을 하니까 소통하는 시간이 짧습니다. 가족과도 단절되는 것이 대리기사들입니다.
몇 년 전에 동료 기사의 부친상 조문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옆방에는 조문객이 인산인해였고요. 조화도 줄지어 있었는데, 저희 동료는 조화도 하나 없었고요. 방문객 조문객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더라고요. 조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이게 우리 자화상인가 싶어서 너무나 힘들었고, 너무 슬펐어요.
장기간 야간노동은 국제보건기구에서도 2급 발암물질로 규정을 했고요. 여러 연구에 따르면 심근경색, 심뇌혈관계,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같은 만성질환의 위험을 높일 수 있고, 기능성 위장장애 등 소화기 궤양의 위험도 높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리기사들이 그런 질병을 갖고 있는 분이 상당히 많으세요. 실례로 2022년 5월에 저희들 카부기 밴드 회원 세 분이 며칠 사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을 했습니다. 운행을 종료하고 나오다 쓰러져서 돌아가셨고요. 또 콜을 받아서 뛰어가다가 쓰러져서 사망하셨어요. 세 분은 다 10년 이상씩 대리운전을 하셨던 분들입니다. 두 분은 아는 분이고 한 분은 잘 모르는 분이었는데요. 두 분은 저보다 더 오랫동안 대리운전을 하셨던 분입니다. 그분들은 10년 동안 열심히 대리운전을 해서 가족을 부양을 했는데,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볼 수가 없으셨던 거죠.
대리기사들은 나라에서 하는 건강검진을 제대로 받으신 분들도 없으세요. 큰 병이라고 진단 나올까 봐. 그래서 아마 병원을 안 가시는 것 같아요. 진단이 나오면, 일단 대리기사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을 쉬면, 일단 먹고살기가 걱정되니까, 병원 안 가는 걸로 자신을 치부하는 것 같아요. 이것 뿐이 아니고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고요. 음주 차량에 치여 사망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저희들이 밤에 일을 하기 때문에 음주 차량이나 뺑소니 차량. 대부분 뺑소니 차량도 거의 다 음주 차량이 많습니다.
울산에서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킥보드를 세우고 있는데, 차량이 그분을 치고 도망을 갔어요. 도망을 갔는데 (도망간) 차주가 상황이 이제 궁금했겠죠.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상황을 보다가 잡혔어요. 여자분이셨고 음주자셨어요. 그러니까 대리기사들이 뺑소니나 음주차량에 치여 사망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습니다. 새벽이나 늦은 시간에 일어나기 때문예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이 기사화되기는 했지만,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밖에 없었죠. 대리기사들은 다치거나 병마가 찾아오면 그날부터 일을 쉬어야 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태가 됩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일하는 대리업체는 목적지가 비공개였어요. 재수가 없는 날이면 오지나 시골에 연거푸 들어가기도 했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저는 생전 처음 가본 시골마을에서 종료를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녘이라서 날씨도 추웠고요. 지나가는 차도 한 대 없었습니다. 두 시간을 걸어 나오는데 정말 외로웠어요. 슬펐고.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리 대리기사들에게도 우리만의 공동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었습니다. 그것도 그때 뿐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립된 대리운전기사들, '카부기 공제회'에 모여 서로를 돌보다
그러던 차에 2022년 3월, 부울경 대리기사들 커뮤니티인 '카부기 밴드'라는 곳에 우연히 가입했다 공제 회원 모집 글을 보게 됐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입했어요. 카부기는 '카'드라이버 '부'산 울산 경남 대리운전 '기'사 모임을 줄인 말입니다. '공제'라는 말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동주공제'라는 글에서 유래됐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넌다'는 말이, 저는 그 말이 너무 좋았습니다. 취약 노동자인 저희한테는 너무나 간절하고 절실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직업일지도 모르는 대리기사에게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넌다'는 말은 너무나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조금 덜 힘들고 조금 덜 외로운 사람이 조금 더 힘들고 조금 더 외로운 사람들한테 어깨를 내주고 손을 잡아주고. 그럴 수 있는 것이 '공제'가 아닌가 생각했고, 그런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는 설립 초창기에 카부기공제회에 가입했어요. 가입한 지 얼마 안 돼서 운영위원을 맡게 됐고, 작년 2월부터 올해까지 공동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희 공제회는요. 상근자도 없고 사무실도 없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일도 해야 하고요. 공제회 업무도 수행해야 합니다. 당연히 잠을 줄여야 하고, 저는 365일 쉬는 날이 없습니다. 너무나 해야 될 일이 많기 때문에 물론 몸도 힘들고, 몸이 파김치가 되는 날도 많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뿌듯합니다. 아침에 눈뜨는 것이 '행복하다'고 저는 얘기합니다. 공제회에 가입하고 저희들이 하고 있는 일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또 너무나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조금이라도 거기에 제가 동참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너무나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고, 다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을 보면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 노회찬 의원님이 '6411 연설'에서 '투명인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가 대표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가디언>에서도 저희를 밤의 유령이라고 표현했더라고요. 어둠과 벗하고, 술 취한 사람들을 상대로 일하고, 여명이 밝아오면 없어지는 사람들. 저희를 그렇게 표현하셨는데, 딱 맞는 표현 같아요. 존재하지만 세상과 사회와 철저히 단절되고 고립돼 있는 사람들.
대리기사 중 이런저런 사정으로 혼자 기거하시는 분이 50% 정도가 넘거든요. 고독사도 심심찮게 일어나고요. 저희 공제회 안에서도요. 2022년 5월에 한 분, 2023년 5월에 한 분 이렇게 두 분이 돌아가셨어요. 2022년에 돌아가신 분은 50대 중반이셨는데, 질병을 갖고 계셨어요. 당뇨, 고혈압 등이 있었는데 이분이 병원에서 뇌혈관 질환 진단을 받으시긴 했는데요. 병원에 입원을 해서 시술을 받으셔야 되는데, 그 시술비가 없어서 그냥 통원하면서 약물 치료만 좀 받고 계셨어요. 그때 (공제회) 사무국장님이 매일 전화를 드렸었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는 거예요. 한 5일 동안. 새벽에 거기를 찾아갔는데 돌아가셨어요. 그것도 3일 만에 발견이 되셨어요. 혼자 사시다 보니 그런 사연이 한 번 있었고요.
2023년 5월, 그분은 60대 중반이셨는데, 공제회 회원이 되고 얼마 안 되셨을 때였어요. 그분은 4~5개월 동안 일을 못하셨었는데, 자존심이 너무 강하니까 저희한테 말을 못하고 계셨던 거예요. 그런데 핸드폰이 연체로 끊기게 되니까 마지막 끊기는 시간에 저희한테 문자를 보내신 거예요. '사정이 이러이러해 제가 어렵습니다'하고. 다음 날 아침 거의 잠을 안 자고 그분을 찾아갔어요. 가서 핸드폰 요금 정리해드리고, 전기 요금이나 이런 게 너무 많이 밀려 있었고요. 사채를 쓰고 계셨어요. 그러니 밥인들 제대로 드셨겠습니까? 저희가 먹을거리 좀 사서 드리고 왔어요. 이리저리 전화해서 사회복지사랑 연결도 해드렸고요. 일주일 뒤에 사회복지사랑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연락이 오기를 그 분이 중환자실로 입원을 하셨어요.
결국 2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폐섬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셨었거든요. 그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조문객도 물론 없었지만 상주도 없었어요. 혼자 사셨고요. 가족들하고 연락이 안 되는 상태였어요. 조문을 갔는데 동생만 와있더라고요. 돌아가신 분이 마지막에 동생분한테 그러셨어요. '공제회 덕분에 너무 감사했다. 잠시나마 행복했다' 이런 말씀을 전해달라고 그러셨대요. 그날 찾아갔던 사람들 다 울었어요. 이런 게 저희 현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분. 저희 공제회비가 매달 1만 5000원입니다. 이 돈마저 부담스럽고, 또 '자신은 공제가 필요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탈퇴한 회원이 있었어요. 그 분이 (탈퇴) 3개월 후에 뇌경색으로 쓰러졌어요. 급히 병원으로 후송됐는데, 50대 초반으로 미혼이었어요. 가족도 전혀 없었습니다. 대리운전하면서 버는 돈은 빚을 갚는데 지출했기 때문에 모아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충 응급치료만 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퇴원하셨어요.
그 소식을 듣고 회원은 아니었지만 저희들이 찾아갔습니다. 크게 도움을 드릴 수는 없었어요. 약간의 도움을 드렸는데, 먹을거리 사서 방문은 했는데, 너무나 좀 안타깝긴 했죠. 그때 찾아가서 이런저런 위로의 말씀밖에 사실 드린 게 없는데, 공제회에 가입을 다시 하셨고요. 지금은 누구보다 공제회와 공동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열심히 공제회 활동을 하고 계세요.
사실 저희가 큰 도움을 드린 건 없어요. 그저 찾아가서 위로하고 '혼자이지 않고, 옆에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라는 것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이분은 지금 2층 계단을 하루에 30번씩 오르내리면서 열심히 집에서 재활을 하고 계시고요. 너무나 많이 회복이 되셨어요. 혼자 걸어서 마트도 가는 정도가 되셨거든요. 그래서 다시 재기할 날을 꿈꾸고 있어요.
무엇보다 공제회의 가장 긍정적인 효과는요. 홀로 생활하던 대리기사들이 한걸음 한걸음씩 세상으로 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공제회를 통해서 동료가 생기고 친구가 생기고 동지가 생기고 이렇게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저희 대리기사들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소액대출 사업도 하고 있어요. 부산, 창원 등 대리운전업체는 대리기사들 이동시켜 주는 셔틀버스를 운행해요. 셔틀버스 정류소에 보면, 사채업자들이 전단지를 대리기사들에게 나눠주는 걸 자주 볼 수 있어요. 많은 대리기사가 돈이 급히 필요해도 금융권에서 융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사채에 손을 대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 대리기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40% 가까운 분들이 사채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사채의 늪에 빠져서 힘들어하시다 스스로 목숨을 버린 분도 계십니다.
이런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결하고자 노동공제연합 풀빵하고 부산형 사회연대기금을 통해 70여 명이 150만 원, 100만 원 이렇게 소액 대출을 이용하고 있고, 이자는 연 1%로 나눠 갚고 있습니다. 아직은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여러 방면을 통해 소액 대출을 늘려갈 생각입니다.
매월 5월이면 봄 소풍도 가요. 처음 공제회가 만들어진 2022년에는 60명, 2023년에는 110명 정도가 참여를 했고요. 올해는 가족까지 250명 참여를 예상하고 있어요. 하루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진상 고객 대처법 공유에서 김장 나눔까지…'여자만세'의 활동
요즘 제가 미치도록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을 말씀드릴게요. 특히 여성 대리기사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대리운전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바깥에 얘기 못하고 몰래 하고 있는 분이 굉장히 많으세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사회에서 여성 대리기사들을 보는 눈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겠죠. 여성 대리기사들이 공제회를 통해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50여 명의 여성 대리기사들이 '여자만세'라는 모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자만세' 단톡방을 통해 새로 들어오는 회원들이 진상 고객 대처 방법을 공유하고, 같이 욕을 해주기도 해요.
회원들이 어려움이 생기면 '여자만세'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마음을 나누기도 해요. 여성 회원 한 분의 아드님이 암 투병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34살밖에 안됐는데 너무 젊은 나이에 암이 걸려서. 위암인데, 말기에 발견을 했다고 그래요. 한 3년 정도 투병을 했는데, 그 고생을 하고 있다는 걸 저만 알고 있었어요. 말은 못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공유하는 게 좋겠다 싶어 '여자만세' 회원방에 글을 올렸어요. 사실 여자 기사들이 가장이 많습니다. 회원 50명 중에 50% 이상이 가장이거든요. 그분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1시간 만에 100만 원을 만들었어요. 그분한테 전달을 했는데요. 그분은 너무 살기 힘드니까 저희 단톡방에 있어도 한 번도 참여를 안 하셨던 분이에요. 들어와만 계시고 했는데, 돈은 100만 원이지만 얼마나 큰 마음이겠습니까? 그 마음을 전달받은 분은 지금 굉장히 열심히 아들 간병도 하고 있지만, 저희하고 같이 활동하고 계세요. 그분도 혼자 계시다 밖으로 나오시게 된 분인 거죠.
여성 대리기사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한 캠페인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작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는 감사하게도 노회찬재단의 협조를 얻어 300송이 장미꽃을 부산 여성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여성 노동 존중' 캠페인을 했어요. 저희 여성 기사들도 세계 여성의 날을 작년에 처음 알았던 것 같아요. 대리운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하기 힘들어했는데 '여성의 노동을 존중해주세요'라고 세상에 외친 거죠.
매년 여름 5주 동안 여성 대리기사들이 얼음물 생수 나누기도 해요. 자체적으로 만든 소책자도 나눠드리고요. 저희가 돈이 없어서 공모사업에 신청해 외부 지원을 받아서 하는 행사인데요. 제가 2022년 공제회에 들어와서 맨 처음에 했던 행사가 이거였어요. 그때부터 공제회에 홀딱 반해서 열심히 공제회 일을 하게 됐어요. 겨울에는 핫팩이랑 장갑으로 나눔 행사를 해요. 처음에는 낯설어서 옆에 오지도 않던 기사들이 이제는 와서 달라고 해요. 1년 동안 저희들이 행사하는 걸 보고 대리기사들이 스스로 저희한테 가까이 오고 있는 거죠.
'만원의 사랑'이라는 아주 특별한 모금사업도 해요. 앞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대리기사들은 아파서 일을 못하거나 쉬면 당장 수입이 없어요. 먹고살 길이 없다는 뜻이죠. 어떤 분은 콜을 받고 가다 웅덩이에 빠져 골절돼 두세 달 동안 깁스를 하고 쉬어야 되는데, 원룸 월세 상환해야 될 금액 이런 거, 일을 못하니 돈이 없으니 굉장히 힘들어했고요. 또 어떤 분은 일을 못해 당장 약값이 없거나 끼니도 없는 분들도 계셨어요. 이런 분들에게 긴급히 구호자금을 모아드리자고 해서 2022년 12월 24일, 회원들에게 매달 1만 원을 모으는 '만 원의 사랑'을 제안했습니다. 50명 정도가 함께하고 있어요.
작년 12월에는 ('여자만세' 회원들이) 김장 100포기를 담궜어요. 대리기사들은 혼자 기거하시는 분이 많기 때문에 오랫동안 김장김치를 드시지 못한 분이 많아요. 그런 분들한테 김장김치는 단순히 김치가 아니고, 사랑이고 따뜻한 사람의 정이라고 봅니다. 김장 담글 때 자원봉사 오셨던 분들도 너무 즐거워했고 행복해했습니다. 베풀고 나누고 있다는 것에 모두들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저희의 마음이고 사랑이니까 받는 분들도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드리는 저희도 많이 행복했었습니다. 올해는 300포기 정도 담가서 공제회 뿐만이 아니고 일반 대리기사에게도 전달하려 해요.
작년 10월에는 여자 만세 회원 8명이 순천만으로 1박 2일 가을 여행을 다녀왔어요. 자식 키우느라, 또 저처럼 또 부모님 봉양하랴 대리운전하랴 다들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어요. 다들 너무 행복해했고 너무 즐거워했고요. 마치 소녀시절로 돌아간 듯 했어요. 여행을 가면 사람들이 마음을 더 터놓게 되잖아요. 여행을 통해 서로 좀 더 알아가고, 가족이 돼가는 것 같은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올해도 가을 여행을 계획하고 있고 좀 더 많은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구상 중에 있습니다.
야간 이동노동자 중에서도 여성 대리기사들이 많이 힘들어하는 화장실 문제에 대해 말씀을 잠깐 드릴게요. 작년에 야간 개방 화장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보자 해서 야간 화장실 책자를 개발했어요. 부산에 '좋은앱'이라는 업체에서 무료로 앱을 만들어주셨고요. '한밤의 해우소'라는 애플리케이션을 구글스토어에서 무료로 설치하실 수 있어요. 전국 누구나 쓰실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야간 개방 화장실) 위치도 등록할 수 있고요. 저희한테는 너무나 필요한 앱이죠.
"우리는 서로 돕고 함께하는 행복한 바보들입니다"
올해 카부기공제회는 소망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독거 대리기사 중에 연세가 많은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런 분들을 찾고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그리고 사회복지 서비스와 연계할 생각입니다. 회원 두 분이 (병을) 제때 치료받지 못해 돌아가셨는데요. 그런 허망한 일이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애쓸 생각입니다.
긴 시간 동안 투명인간으로 살아온 우리들이지만 이제 투명인간이 아니라 이 땅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많은 분의 관심과 격려도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도 필요해요. 대리운전 시장은 3조 원이 넘는 시장입니다. 종사자도 25만 명을 상회하는데요. 아직 대리운전법조차 없습니다. 법이 없기 때문에 업체의 말 한마디가 법이 되고 있고, 업체의 말 한마디가 기사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습니다. 대리운전법이 10여 차례 발의는 됐지만, (국회)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정치인들은 대리기사 등 취약 노동자의 삶이나 인권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뜻이겠죠. 저는 우리 사회가 카부기공제회의 바램처럼 서로 위로하고 서로 기뻐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좀 더 따뜻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덜 힘든 사람이 조금 더 힘든 사람에게 손을 잡아주는 그런 세상, 그런 세상을 위해 저와 우리 공제회에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라도 해볼 작정입니다. 앞으로 대리기사들 그리고 카부기공제회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서로 돕고 함께하는 행복한 바보들입니다. 긴 시간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아침에 눈뜨며 행복한 그런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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