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스토리 클럽(JTI Story Club)'은 전태일과 관련된 인터뷰, 르포, 기사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을 쓰는 재능 기부자들의 모임입니다. 과거 역사를 새로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전태일들'과 전태일 정신을 기록하고 동시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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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생 뱀띠, 10년 차 대리운전기사 이미영 씨는 2011년 8월 16일 '트리콜' 기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때 나이가 마흔일곱이었다. 그전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나이 서른에 남편과 이혼하고 네 살 난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며 엄마를 도와 횟집을 했고, 영어학원도 경영해 보았고, 경남 김해시 어방동 축협, 공장 세탁실, 대동의 주유소, 밀양의 카네이션 하우스 농가에서도 일을 했다. 지인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는 대신 억지로 맡은 감전시장 콩나물 납품업체는 파는 족족 손해나는 장사였다. 돈을 돌려받는 대신 빚만 지고 장사를 접었다.
나는 10년 차 대리운전기사
억척같이 일했는데도 돈이 모이기는커녕 밑 빠진 독처럼 모두 새어나가 버렸다. 은행 빚을 갚으려 일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나이 마흔일곱 살짜리 여자에게 괜찮은 일자리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생활정보 신문에 나온 '트리콜 대리운전'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적어도 여자라고 대리운전비를 차별하지는 않을 테니 열심히 일하는 만큼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오전 11시에 '알람'이 울린다. 그러면 트리콜이 요구하는 '공식' 작업복인 정장 차림으로 사진을 올리고 프로그램에 로그인한다. "정장 차림이 아니면 아예 배차를 해주지 않거든요. 밥 먹고, 청소하고, 장을 보고 오후 1시에서 2시쯤 집에서 20~30분 거리에 있는 골프장 '낮콜'을 대기하러 차를 몰고 갑니다." 오전에 골프장 18홀을 돌고 점심으로 반주를 한 사람들이 주 고객이다.
하루 일과가 그렇게 시작되어 늦은 밤까지 이어진다. 험한 일이다. 가끔 몸을 더듬는 진상도 있다. 매번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다. 취객의 성희롱에 대해 관대한 문화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설령 신고를 하고 처벌이 이루어진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데 내가 버린 시간은 누가 보상해주겠는가? 트리콜 상황실에 얘기해봤자 진상 고객 대처를 위한 어떤 매뉴얼도 없다. 대리운전기사는 독립자영업자고, 회사는 그저 '중개'만 할 뿐 자기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한 사람의 99%는 그저 '재수 없는 날'로 치부하고 삭힐 수밖에 없다.
나를 보증해 준 카부기공제회
알게 모르게 환멸이 마음을 잠식하고 고됨이 몸을 힘들게 해 3년을 쉬었다. 그 사이 엄마는 허리가 좋지 않아 수술만 네 번 했다. 엄마 병원비도 마련해야 했다. 다시 대리운전에 복귀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리운전 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영 씨에게 달라진 것이 생겼다. 대리기사들의 '카부기상호공제회'를 만난 것이다. 카부기는 '카 드라이버 부산·울산·경남 대리운전기사'의 약칭이다.
처음에는 입원 치료비를 지원해주는 등 공제회의 혜택에 끌렸다. 카부기공제회가 회원단체로 가입해 있는 노동공제연대 '풀빵'에서 연 3% 금리로 150만 원의 소액대출을 받기도 했다. 신기했다. 시중은행과 같은 제1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신용약자들에게 소액대출 150만 원은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었다.
"저는 카부기공제회 회원이 된 지 만 6개월이 되던 2022년 11월에 '풀빵' 소액 대출 자격을 얻게 되었어요. 엄마가 허리 치료 때문에 매주 6만 원짜리 주사를 맞아야 했는데 당시엔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수입이 거의 절반으로 떨어져 너무 힘 들었거든요. 정말 요긴했습니다. 신용불량 딱지도 있는 저에게 오직 공제회 회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신용대출을 해준다는 게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카부기공제회라는 공동체가 제 신용의 원천이었던 거였어요. 공제회가 '너는 무자격자가 아니다'라고 보증을 해준 것이지요."
늦게 안 전태일, 나도 '풀빵' 하나라도
법정 최고금리인 연 24%를 꽉 채워 빚을 내야 했던 이들에게 공제회라는 기댈 언덕이 생겼다는 건 감동이었다. 내가 받는 혜택도 혜택이지만 내가 내는 회비 1만원이 다른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도 뿌듯했다. 말로만 들었던 '전태일'이 생생하게 다가온 것도 이때였다. 노동공제란 가난한 사람이 스스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조직이다.
전태일이 부자라서 '시다'의 주린 배를 채워준 것이 아니다. 그가 시다에게 사준 풀빵은 그날 집에 갈 버스비였다. 이미영 씨에겐 노동공제연대 '풀빵'이 전태일이었다. 21세기의 이미영 씨는 20세기의 전태일에게 빚을 진 기분이었다. "고마웠습니다. 내가 너무 몰랐다는 게 미안했고요. 너무 늦게 알게 된 전태일에게 미안했고 지각생으로서 더 큰 존경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작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이를 위해 조막손이라고 보태야겠다는 생각들이 카부기공제회 소속 여성 대리기사들에게도 번져갔다. 이것은 여성 대리기사들이 고립을 피해 세상으로 나오면서 생긴 일이다.
지금 이미영 씨는 카부기공제회 공동대표다. 50대의 여성 가장들,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일하는 여성 대리기사들이 카부기공제회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이들 카부기공제회 소속 여성 대리기사 40여 명은 '여자만세'라는 단톡방을 개설해 소통했다. 처음엔 이미영 회장이 부탁해서 참여했다. 그런데 지금은 공지만 띄우면 알아서 찾아온다. '여자만세'의 고혜진 씨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그 감동을 전했다. 본인들도 그것이 얼마나 자신들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지 느낀다.
'여자만세' 단톡방과 '한밤의해우소'
이들은 자신들의 가장 절실한 문제이기도 한 심야 개방 화장실 찾기 어플리케이션인 '한밤의해우소'를 개발해 보급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한밤의해우소'는 2023년 초 <부산플랫폼노동뉴스>라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한 3인의 여성 대리기사들이 심야 대리운전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 중에 개방 화장실 찾기가 어려워 방광염을 직업병처럼 갖게 되었다고 호소하면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카부기공제회는 노동부 지원 사업에 공모해 개방화장실 지도 수첩을 제작하기도 했고, 이용객들이 직접 개방 화장실을 쉽게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스마트폰 앱 개발에 나서기로 했다. 부산이동노동자지원센터가 소개한 어플리케이션 개발자의 도움을 얻고 카부기공제회 회원들이 심야 개방 화장실 정보를 취합해 전국 화장실 지도를 만들어 2023년 10월에 공식 출시했다. 여성 대리운전 기사들은 카부기상호공제회를 통해 여름에는 얼음물 생수를 나누고, 겨울엔 핫팩을 나누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전태일의 '풀빵 정신'이 이렇게 민들레 홀씨처럼 여성 대리기사들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 '전태일재단'은 2020년 전태일 50주기 이후 양극화와 불평등의 늪에 빠진 대한민국에서 전태일 정신을 되살리고 오늘의 전태일들을 지켜내기 위해 불안정 노동단위를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노동공제연합 풀빵'은 공제사업을 통해 불안정 노동자들의 권리를 높이는 곳으로 전태일재단은 지원조직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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