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명 가량의 사상자를 낸 지난 22일(이하 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공연장 테러 보안 실패는 우크라이나 침공 뒤 보안 기관 초점이 국내 반대 여론 진압으로 이동해 대테러 보안이 약화되면서 촉발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붙잡힌 테러 주요 용의자들은 심한 상처를 입은 채 24일 법정에 출두했다.
<AP>, <로이터> 통신을 종합하면 24일 모스크바 바스마니 지방법원에 22일 모스크바 공연장 테러 주요 용의자 달레르존 미르조예프(32), 사이다크라미 라차발리조다(30), 샴시딘 파리두니(25), 무하마드소비르 파이조프(19)가 출두했다. 이들에겐 종신형 선고가 가능한 테러 공격으로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혐의가 적용됐고 이 중 2명은 혐의를 인정했다. 법원은 이들에게 5월22일까지 공판 전 구금 명령을 내렸다. 이들 4명 모두 타지키스탄 출신으로 러시아에 거주 중이었다.
지난 22일 무장 괴한들에 의해 모스크바 북서부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에서 벌어진 무차별 테러 공격으로 이날까지 최소 137명이 죽고 182명이 다쳤다.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공격 배후를 자처했다.
법정에 출석한 용의자들은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라차발리조다는 눈이 부은 채 오른쪽 귀 자리에 커다란 붕대를 감은 채였고 미르조예프는 눈에 심한 멍이 들어 있었다. 파이조프는 휠체어를 탄 채 법정에 들어와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로이터>는 지난 23일 붙잡힌 용의자들을 귀를 자르는 방식 등으로 잔혹하게 심문하는 확인되지 않은 영상이 소셜미디어(SNS)에 유포됐다고 덧붙였다.
러시아의 이번 테러 보안 실패는 우크라이나 침공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 뒤 보안 기관이 테러 방지보다 반전 목소리 탄압 등 내부 감시에 치중하게 됐다는 것이다.
러시아 보안 서비스 전문가인 마크 갈레오티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러 연방보안국(FSB)의 우선순위는 명백히 잘못됐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와 국내 반대자들에 주요 자원을 집중했다. 이러한 우선 순위는 상부에서 부여된 것"이라고 말했다.
매체는 우크라이나 침공 뒤 반대파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며 보안 기관이 소셜미디어상 전쟁 반대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들, 성소수자, 지난달 수감 중 돌연사한 러 야권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를 추모하는 꽃을 놓는 사람들을 쫓기 바빴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 독립 언론 <노바야가제타 유럽>을 인용, 우크라이나 침공 뒤 FSB의 초점이 이슬람 테러 위협에서 우크라이나 관련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FSB에 의해 "테러리즘" 혐의로 체포된 이들은 많은 경우 전쟁이나 정부에 반대하는 러시아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가디언>은 전쟁 뒤 수천 명의 러시아 보안 당국자들이 점령지 관리를 위해 우크라이나 점령지로 이동했다고 덧붙였다.
미 하버드대 데이비스 러시아·유럽연구센터 연구원인 베라 미로노바는 <파이낸셜타임스>에 IS의 아프가니스탄 지부 이슬람국가 호라산(ISIS-K)이 모스크바를 공격한 이유는 "표적의 편의성", 즉 상대적으로 쉬운 타깃이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매체는 ISIS-K가 최근 몇 달간 수차례 유럽 공격을 계획했지만 좌절됐다고 덧붙였다.
테러 주요 용의자들이 타지키스탄 출신으로 밝혀진 가운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뒤 자국 노동 인구를 병력으로 동원하고 방위 산업 규모를 키우며 부족한 노동력을 중앙아시아에서 동원한 다음 사회적으로 배제했다는 점도 지적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최근 몇 년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출신의 중앙아시아 노동자 수백만 명이 비자 없이 러시아 주요 도시에 정착했고 러시아 사회와 격리된 채 범죄 조직과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의 포섭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매체는 중앙아시아 이주자들이 러시아어를 전혀, 혹은 거의 못하는 경우가 많고 학대에 취약하며 러시아 경찰이 정기적으로 이들의 기숙사와 작업장을 급습해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는 러시아군에 합류하라고 압박한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 주재 키르기스스탄 대사를 지낸 카디르 톡토굴로프는 "이주민에 대한 러시아 법집행 기관과 국가 기관의 태도가 이주민이 급진화되고 극단주의자가 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짚었다.
지난 15~17일 치러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5선에 성공한 뒤 며칠 만에 터진 테러로 '스트롱 맨' 이미지에 타격이 올 것이 불가피한 가운데 IS가 테러 배후를 자처했음에도 러시아 쪽에선 침공 중인 우크라이나를 테러와 연루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러 매체 <스푸트니크>는 러시아 대테러 부대 퇴역 조직원, <스푸트니크>의 모회사인 러시아 국영 미디어 그룹 로시야 시보드냐의 편집장 마르가리타 시모냔 등을 인용해 테러의 진짜 배후는 우크라이나라고 여러 기사를 통해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사건 다음날인 23일 IS는 언급하지 않은 채 별다른 근거 없이 테러 공격자들이 우크라이나 쪽으로 도주했고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창구"가 마련돼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는 연관을 부인했고 캐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도 24일 미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모스크바 테러에 우크라이나가 연관됐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며 "이번 사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ISIS-K에 실제로 책임이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디언>은 "향후 며칠 안에 러시아 정부의 우크라이나 개입 주장이 단순히 정보 실패에 관한 주의를 돌리기 위함인지 전쟁 수사를 강화하는 데 사용될지 여부가 드러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연장 테러 이틀 만인 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력 시설 등에 공격을 가했다. <로이터>는 우크라이나 당국에 따르면 러시아가 24일 오전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 지역 주요 기반시설을 미사일로 공격했고 수도 키이우를 향해 57발의 미사일과 무인기(드론)을 발사했다고 보도했다. 이 공격으로 르비우의 주요 에너지 시설에 불이 붙으며 정전이 발생했다. 르비우를 향한 러시아 미사일이 폴란드 영공에 39초 가량 머물며 폴란드가 러시아에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날 공격은 22일 모스크바 공연장 테러가 발생하기 몇 시간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최대 규모 댐인 동부 자포리자의 드니프로 수력발전소 댐에 대규모 공격을 가해 키이우, 하르키우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정전을 일으킨 데 이어 일어났다. 러시아 국방부는 해당 공격이 러시아 대선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의 공격에 대한 보복이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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