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전쟁 중에 인체실험으로 터득한 혈액의 동결 건조 기술을 사용하여, 가마가사키, 고토부키초와 같은 싸구려 여인숙 거리에서 (부랑자나 실업자들로부터) 혈액을 싸게 사들여 만든 건조 혈액을 미군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한국전쟁 특수는 전쟁범죄 의학자들이 돈벌이하는 기회이기도 했다](노다 마사야키, <전쟁과 죄책>, 또다른우주, 2023, 65쪽).
윗글은 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평론가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가 일본혈액은행을 비판한 내용이다.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일본혈액은행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31부대장(군의중장)과 나이토 료이치 전 육군 군의학교 방역연구실 교관(군의중좌) 등이 만들었다. 이들은 731부대에서 '마루타' 생체실험으로 인간의 생명을 마구 앗아갔던 엽기적인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돈벌이에 나섰다.
사죄·반성 없는 전범자들
인간의 피를 뽑아 팔고 사는 것은 지난날 빈곤 시대를 떠올리는 음울한 기억이다. 패전 뒤의 일본사회에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은 피를 팔아 허기진 배를 채웠다(6.25 한국전쟁을 거친 한국사회도 그랬다).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은 그들의 피를 미군 부상병들에게 팔아 떼돈을 벌었다.
일본 패전 1년 전(1944)에 태어난 노다가 <戦争と罪責>(岩波書店, 1998)이란 책을 쓰게 된 까닭이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에 군의관이었던 노다의 아버지는 숨을 거둘 때까지도 전쟁 중의 일들을 아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전쟁은 어리석다”는 말할 뿐 입을 닫았다. 뭔가 숨기고 있을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늘 아들의 마음에 걸렸다.
노다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반성적으로 돌아보지 않고 전란의 시대에 있었던 악행을 부인해선 안 된다고 여겼다. (그의 아버지처럼) '이제 지난 일은 그만 잊자'며 망각으로 넘겨버려서도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런 문제의식 아래 노다는 이미 노인이 된 옛 군인들을 두루 만났고, 한때는 군국주의자이자 전쟁의 가해자로서 내면 깊숙이 지니고 있을 죄의식을 드러내는 글을 썼다(책이 일본에서 나온 지 25년 만에 한국에 번역됐다. 일독을 권한다).
10년 끌다 패소로 막 내린 731 재판
일본은 이른바 '15년 전쟁'(1931년 만주 침략부터 1945년 패전까지 15년 동안의 전쟁)을 벌이며 숱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문제는 그 악행들에 대해 사과를 받기도 힘들지만, 재판을 통해서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기란 더더욱 힘들다. 한국의 강제동원과 '위안부' 성노예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뻔뻔스런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건너뛰고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태도는 우리 모두 익히 잘 아는 바다(연재 29 참조).
731부대가 저질렀던 전쟁범죄를 사과 받거나 배상받기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731부대 연구원들이 세균무기를 개발한답시고 '마루타'로 잡아가 산 채로 생체실험이란 이름의 끔찍한 고문을 하고 죽인 사람들의 유족, 또는 731부대원들이 은밀하게 퍼트린 페스트 세균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유족들이 늦게라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걸었지만, 지금껏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했다.
731부대와 관련된 재판은 두 가지가 있었다. 중국인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에서 제기된 재판들이다. 하나는 '731부대·난징 학살·무차별폭격 소송'(1995-2007)이고, 다른 하나는 '731부대 세균전 국가배상 청구소송'(1997-2007)이다.
'731부대·난징 학살·무차별폭격 소송'은 이름 그대로 △731부대의 세균전에 따른 피해자 유족, △무려 30만 명이 떼죽음을 겪었던 난징대학살(1937)의 피해자 유족, △중국 푸젠성 융안시(永安市)를 겨냥했던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1943)의 피해자 유족 10명이 손을 잡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외쳤던 소송이다. 무려 12년을 끌었던 그 소송은 도쿄지방법원(1999), 도쿄고등법원(2005), 최고재판소(대법원, 2007)을 거치며 안타깝게도 원고 패소로 끝났다.
"시신이 온통 새까맣게 됐다"
'731부대 세균전 국가배상 청구소송'은 앞의 소송보다 2년 뒤인 1997년 8월에 시작됐다. 중국인 피해자 유족 180명이 일본 정부의 사죄와 더불어 유족 1인당 1000만 엔(9000만 원 가량)의 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이 소송도 10년을 끌며 매우 느리게 진행돼, 희생자 유족들은 엄청난 인내심으로 재판을 지켜봐야 했다. 법정에서의 피해자 증언도 있었다.
[당시 세균에 감염됐던 능산츄(能善初, 당시 13세)는 조기에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8명의 식구 중 4명이 급사했다. 맨 처음 감염된 큰 형은 밤에 발병해 고열, 두통과 더불어 양 팔과 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다가 동트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시신이 온통 새까맣게 됐다](아카하타신문편집국,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정한책방, 2017, 82쪽)
소송을 건 지 딱 5년 만인 2002년 8월, 도쿄지방법원(민사18부)의 재판장은 '피해사실은 인정되지만 법적 틀에 따른다면 위법성이 없다'는 애매한 논리를 펴면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해버렸다. 도쿄고등법원에서의 항소 기각(2003),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의 상고기각(2007)도 앞의 재판과 판박이였다.
재판부, "소송 지역에서만 1만 넘는 희생자"
결과적으로, 이 소송에서 중국인 원고들이 패소했지만,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도쿄지방법원과 도쿄고등법원 재판부는 731부대의 전쟁범죄 행위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중국인 원고들의 소송을 거들었던 일본의 평화활동가 나스 시게오(奈須重雄, NPO 법인 731부대·세균전 자료센터 이사)가 쓴 글에서 재판부가 내렸던 판단을 옮겨본다(아래 글이 실린「역사와 책임」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포럼 진실과 정의'가 함께 펴내는 무크지다).
[△731부대와 1644부대(난징에 기지를 둔 일본 중지나파견군 방역급수부)는 각종 인체실험을 하여 세균병기를 개발 제조했고, 저장성(浙江省) 취저우(衢州)·닝보(寧波)·장산(江山), 후난성(湖南省) 창더(常德)에서 세균전을 실시했다. △세균전은 일본군의 전투행위의 일환으로 일본 육군 중앙의 지령에 따라 실행되었다. △취저우와 창더에서는 페스트가 크게 유행했다. △소송을 제기한 원고의 피해지역에서만 1만 명을 넘는 희생자가 나왔다](나스 시게오, '731부대 세균전 국가배상 청구재판과 그 후 해결을 위한 활동',「역사와 책임」8호, 2015년5월).
이 재판이 진행 중일 때 일본 극우들은 '731부대는 '방역급수부'라는 이름 그대로 전염병을 막고 깨끗한 식수를 공급하던 부대'라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731부대를 비롯한 일본군이 '질식성·독성 또는 기타 가스 및 세균학적 전쟁수단의 전시 사용금지에 관한 제네바의정서(1925)'를 어겼음을 분명히 지적하면서, “그 피해가 실로 비참하고 막대하며, 일본군에 의한 해당 전투 행위는 비인간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일본 사법부는 중국인 원고들의 배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인들의 소송을 거들었던 일본인 평화활동가 나스 시게오는 '애초부터 판사는 일본정부 편이었다'고 못박았다. 그렇다면 일본 판사는 왜 731부대의 범죄행위를 부인하지 않았을까. 나스의 풀이에 따르면, “손해배상도 인정하지 않고,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면 '공정'이라는 재판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추지 못했다'는 비난을 비껴가기 위한 꼼수”였다.
2007년에 내려진 일본 대법원의 판결은 참으로 비정했다. 1972년 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나왔던 중일공동성명에 따라 '재판상의 청구권은 포기되었다'는 점을 내세웠다. 1965년 한일 수교로 청구권이 포기됐다는 주장과 같은 논리다. 그러면서 일본 대법원은 두 개의 소송('731부대 세균전 소송'과 '731부대·난징 학살·무차별폭격 소송')의 상고기각, 상고 불수리를 결정했다(많은 법률 전문가들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본다).
노인이 된 731대원들, "우린 전쟁범죄자였다"
'731부대 세균전 국가배상 청구소송' 과정에서 몇몇 731부대 출신자들이 양심적인 증언을 남겼다. 이들의 증언은 보수우경화의 길을 가는 일본사회가 잠시나마 지난날의 침략전쟁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먼저 731부대 소년대원이었던 시노즈카 요시오(篠塚良雄)가 2000년 11월15일 법정에 내놓은 진술서를 보자.
[1939년 731부대에 소년대원으로 입대했다. 1940년 5월부터 벼룩 증식작업에 동원되었다. 대량생산한 벼룩을 731부대 난징행 비행기로 옮겼다. 인체실험과 생체해부의 목적은 살아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세균 살상력과 백신의 관계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마루타' 4명에게 백신을 접종했고, 페스트균을 주사했다. 비교 대조군인 1명에게는 백신을 접종하지 않았다. 나는 해부대에 올린 '마루타' 몸을 긴 솔로 닦는 일을 했으며, 군의가 남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댔다 떼면 해부가 시작되었다. 1942년 11월부터 2개월간 중국 남성 5명의 살해에 관여했다](나스 시게오, 같은 글).
731부대 항공반 군속이었던 마쓰모토 마사카즈(松本正一)도 중국인 원고들을 도와주려 증언에 나섰다. 그는 1939년부터 6년 동안 731부대에 있었다. 하얼빈에서 북서쪽으로 150km 떨어진 안다(安達) 야외 실험장으로 '마루타'를 운반했고, 비행기에서 지상의 마루타에게 장티푸스균과 페스트균을 감염시킨 벼룩을 떨어뜨렸다. 2000년 11월15일 법정에 내놓은 그의 진술서를 보자.
[1940년 가을 취저우 작전에서는 페스트 감염 벼룩을 넣은 상자 2개를 97식 경폭기 날개 아래에 부착하여 벼룩을 살포했다. 닝보 작전에서는 벼룩을 넣은 상자를 작은 유선형으로 만들어 썼다. 전자석(電磁石) 조작으로 상자가 열리면 벼룩이 바람을 타고 나와 내려가게 만든 장치였다. 1941년 가을부터 6개월쯤 난징에 출동해 1644부대와 합류했다. 하얼빈에서 가져온 페스트 감염 벼룩을 넣은 상자를 97식 단발 경폭격기에 부착하여 출격했다. 공격지는 창더(후난성 북부도시)였다. 나중에 이 공격이 꽤 효과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나스 시게오, 같은 글).
나이 여든을 넘긴 노년의 증언자들은 오랫동안 그 자신이 731 전쟁범죄의 공범자였다는 자책감과 끔찍했던 기억을 털어내지 못해 내내 힘들어 했을 것이다. 중국인 유족들은 10년 넘게 이어져온 법정 싸움을 거치는 동안 일본의 보수 우경화 흐름이 재판에 끼칠 악영향을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양심적 증언자들이 적극 나서는 것에 큰 위안을 받았다. 하지만 막상 패소가 확정되자, 유족들에게는 허탈감과 더불어 앙금처럼 쌓인 분노와 슬픔이 다시금 밀려왔다.
조금씩 드러나는 731부대의 죄상
앞으로 731부대 관련 소송이 일본에서 더 이상 없을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본 대법원 판결 5년 뒤인 2012년 731부대의 세균전 사실을 담은 문서가 나왔다. 발견자는 앞서 중국인 원고들의 소송을 거들었던 일본인 평화활동가 나스 시게오였다. 그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간사이관에서 731부대 군의관 가네코 준이치(金子順一)가 패전 뒤 의학박사 학위를 따려고 도쿄대학에 냈던 논문 8편을 찾아냈다(이시이 시로의 부관이었던 가네코 준이치에 대해선 연재 63 참조).
8편의 논문 가운데 「PX의 효과 약산법(略算法)」(<육군군의학교방역 연구보고> 제30호 게재, 1943년 12월14일 접수)이 특히 큰 화제를 불렀다. 이 논문에는 731부대가 실제로 PX(페스트에 감염된 벼룩)를 이용해 1940년 6월4일부터 1942년 6월19일까지 중국 저장성 닝보와 진화, 후난성 창더 등에서 6건의 세균전을 펼쳤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세균전을 저질렀던 날짜, 목표지, 살포한 PX의 중량, 피해 규모 등 아주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1947년 이시이 시로 패거리가 '더러운 거래'를 하면서 건네줬던 세균전 자료를 비롯해 지금 어딘가 잠자고 있을 범죄증거물들이 모두 드러나면 일본의 태도가 바뀔까. 그에 따라 일본 사법부의 판단도 달라질까. 극우파들이 설치는 지금 일본의 분위기를 보면, 어려운 일로 보인다. 731부대의 죄상 규명과 그에 따른 진심어린 사죄와 피해 배상은 21세기 일본이 짊어진 해묵은 숙제다.
인색했던 히로히토, 731부대 예산은 예외
끝으로, 731부대의 전쟁범죄에 일왕 히로히토는 책임이 없을까를 따져보자. 패전을 앞두고 일본의 전쟁범죄를 담은 문서나 자료들은 조직적으로 폐기 처리됐다. 그렇기에 히로히토와 731부대를 잇는 결정적인 '스모킹 건'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역사가들은 히로히토가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범죄의 공모자이자 지령자로서 처벌을 받았어야 마땅했다고 여긴다.
먼저 법률적 책임. 히로히토는 구일본제국의 헌법상 일본군 최고사령관으로서 군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책임이 따른다. 전쟁범죄에 대해선 '나 몰라라'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돌아설 수는 없다. 먼저 731부대의 출발부터 히로히토가 개입돼 있다. 1936년 '전염병 예방과 수질 정화부대'라는 이름으로 히로히토가 부대 설립을 명령하는 칙령을 내린 특별한 부대다. 그렇기에 731부대원들 사이엔 '천황의 칙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유일한 부대'라는 자부심이 컸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베르는 731부대의 설립을 명령하는 문서에 히로히토가 '천황의 옥쇄'를 눌렀다는 사실에 바탕해, “의심할 여지없이 히로히토가 (731부대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고 못 박았다. 베르는 일본 왕실 가족의 한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천황은 옥새를 찍기 전에 모든 문서들을 반드시 다 읽습니다. 옥새를 절대로 우편 스탬프처럼 찍지는 않지요"(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2002, 245쪽).
731부대의 예산은 매우 풍족했다. 군부 예산을 따지는 일본 의회도 731부대에 배정된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군의관들을 비롯한 연구원들의 월급도 아주 많았다. 이와 관련한 베르의 글을 보자.
[일왕은 황실 경비가 되었건 군사비가 되었건 모든 경비에 대해 인색한 편이었다. 그러나 731부대에 관해선 예외였다. 이 부대에서 관리관을 지낸 한 사람은 '예산이 밑빠진 독이었다'면서 1941년 초 연구경비로 책정됐던 300만 엔이 곧바로 10배 늘어났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 다른 증인도 731부대가 일왕 히로히토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증거를 '제한이 없던 경비'에서 찾고 있었다](에드워드 베르, 246쪽).
히로히토는 만주 하얼빈 외곽의 핑팡 지역에 있던 731부대에 발을 디딘 적은 없다. 하지만 왕실 직계에 속하는 왕자들이 731부대를 들락거린 사실이 확인된다. 히로히토의 막내동생 미카사(三笠宮) 왕자는 만주 군부대들을 검열하는 여행 중에 731부대에 들렀고, 그곳 간부들과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731부대의 전쟁범죄 행위를 가장 잘 알만한 다른 왕자는 히로히토의 사촌 다케다(竹田宮)다. 그는 '마야다 쓰네요시'라는 가명으로, 만주 신징(新京)의 관동군사령부에서 경리 책임을 맡았다(계급은 중좌).
이들 왕자들이 히로히토에게 731부대가 하는 일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입을 닫고 있으려 해도 히로히토가 물어봤을 것이다. 다케다 왕자는 1980년대에 영국 <옵서버>(The Observer)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731부대의 세균무기 개발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일본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정도의 생물학 병기의 개발에 대해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다”고 뻔뻔스레 말했다(에드워드 베르, 247쪽).
히로히토가 평화주의자이나 휴머니스트?
히로히토를 보호하려는 일본 극우들은 '히로히토가 731부대의 존재는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뭘하는 지는 몰랐다'며 전쟁범죄와 거리를 두려 한다. 이시이 시로에 이어 731부대장을 맡았던 키타노 마사지(北野政次)도 1947년 미 데트릭 기지에서 2차 조사관으로 파견한 아보 톰슨 중령에게 '731부대가 세균무기를 개발한다는 사실을 만약 폐하(히로히토 일왕)가 알았다면 분명히 연구를 중단시켰을 것'이라 주장했었다(연재 61 참조).
히로히토가 731부대가 세균무기 개발을 위해 생체실험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우기는 쪽에선 '일본군 강경파들이 일부러 그런 사실을 일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편다. 만에 하나 히로히토가 그런 사실을 알고 중지를 명령했다 하더라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 육군 강경파 지도부가 그 명령을 전달하는 시늉을 하면서 사실상 묵살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이런 얘기들은 모두 히로히토가 평화주의자 또는 휴머니스트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미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전 빙햄튼대 교수)는 히로히토가 731부대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여긴다. 2001년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역작 <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2000)에서 관련 글을 옮겨본다.
[세균전을 맡은 관동군 731부대에 참모총장이 내린 대본영(大本營)의 상세한 지령들은 원칙적으로 일왕에게 보여야 했고, 일왕은 그러한 대륙지(大陸指)의 근거가 대륙명(命)들도 늘 읽어보았다. 히로히토는 과학자다운 성향이 있었고, 체계적인 것을 좋아했다. 미심쩍은 부분은 묻고, 먼저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서는 날인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재가한 명령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 근대일본의 형성> 삼인, 2010, 410쪽).
"히로히토가 생화학무기 사용에 직접 책임 있다"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대 명예교수, 일본 전쟁책임자료센터 대표), 마쓰노 세이야(松野誠也, 메이지가쿠인대 연구원) 같은 이들은 지난날 일본의 침략전쟁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겸허하게 반성을 해야 한다는 이른바 자성사관(自省史觀)을 지닌 역사학자다. 이들은 극우 성향을 지닌 역사가들과는 다른 눈길로 히로히토를 바라본다. 독가스를 비롯한 생화학무기 사용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이 펴낸 독가스 관련 자료집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독가스를 마구 사용한 데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히로히토에게 있다고 못 박았다. 이들이 힘들게 찾아낸 문서 자료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중일전쟁(1937)이 전면전으로 번지기 이전에 이미 화학무기 요원과 장비를 중국에 보내는 것을 재가했다. 그에 따라 일본군은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를 비롯한 중국 여러 지역의 전투에서 국제법상 사용이 금지된 독가스를 마구 뿌려대 많은 중국인들을 죽였다(吉見義明, 松野誠也, <15年戰爭極祕資料集 補卷2 毒ガス関係資料>, 不二出版, 1997, 27쪽 참조).
요시미와 마쓰노에 따르면, 독가스는 일선 부대 사령관이라도 마음대로 재량껏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부의 지휘계통에 따라, 먼저 일왕의 재가를 얻어 참모총장의 지시가 대륙지(대륙지)란 이름으로 내려지면, 대본영(일왕이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는 일왕 직속의 통수기관) 육군부를 통해 일선부대로 독가스 사용 지시가 내려갔다.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이 완강하게 맞설 때마다 일본군은 화학무기를 썼다. 이를테면 1938년 8월부터 10월에 걸친 호북성 우한(武漢) 공방전에선 대본영의 독가스 사용 허가가 375차례나 내려졌다(吉見義明, 松野誠也, 28쪽).
이시이 시로와 히로히토의 공통점
1939년 5월15일 히로히토의 재가에 따라, 만주-소련 국경지대에서 생화학무기를 야외 실험장에서 써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졌다. 본 연재에서 여러 차례 나온 바 있는 안다(安達) 야외시험장에서 '마루타'들을 나무 기둥에 묶어 놓고 탄저균이나 페스트균 폭탄을 터트리는 생체실험도 히로히토의 허가를 받아 이뤄진 셈이었다.
1940년 7월 히로히토는 남지나방면군 사령관의 독가스 사용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확히 1년 뒤인 1941년 7월 일본 육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군해 들어갔을 때는 화학무기 사용을 막았다. 중국인들을 상대로는 화학무기를 마구 썼지만, 백인들에게는 삼갔다. 왜 그랬을까. 여기엔 인종차별적인 판단과 더불어, 당시 일본군 대본영은 '미국이 화학무기로 일본군에게 보복할 능력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이 이기지 못할 경우 뒤따를 전쟁범죄 추궁도 나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이 글을 매듭지으면서 내릴 수 있는 분명한 결론은 히로히토가 731부대의 엽기적인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히로히토가 평화주의자 또는 휴머니스트였기에 이시이 시로 패거리들을 증오했다는 투의 얘기는 허튼소리를 지어내길 좋아하는 자들의 헛소리다. 히로히토와 이시이 시로의 공통점은? 전승국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히로히토 사면에 대해선 연재 6, 7 참조). 이들이 전범 처벌을 비껴감으로써 전후 80년 동안 줄곧 “일본은 과거사 정리가 잘못 됐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다음 주엔 △1945년 패전 무렵 B-29 미군 조종사 8명이 후쿠오카 규슈제국대 의대로 끌려가 생체해부 당했던 사건이 지닌 의미 △나치 독일과 일제 의사들의 비윤리적 '의료행위'와 관련한 '뉘른베르크 강령'(Nuremberg Code)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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