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개혁진보 선거연합'이 등장했습니다. 사회운동의 일부가 신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연합하는 광경을 마주하며 사회운동의 일원을 자처하는 우리는 참담한 분노를 느낍니다. 이윤 축적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사회적 힘과 정치적 전망을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만들어가야 합니다.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조직위원회'는 이러한 취지의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를 알리고, 더욱 많은 활동가들이 함께 하기를 기대하며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네 편의 글을 싣습니다.
선거가 시작되면 정치는 급속히 퇴행한다. 오래된 현상이다. 하지만 퇴행의 양상이 달라졌다. 돈으로 표를 사는 옛날의 '막걸리·고무신 선거'는 사라졌지만, 뭘 해주겠다고 선물을 뿌리는 정치는 더 정교하게 합리화, 합법화된 것 같다. 선거 마케팅, 컨설팅, 광고를 동원한 정치 시장의 규모는 훨씬 커졌고, 자본의 영향력도 막강해졌다. 오늘날 선거는 정치의 시장화, 상품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이다. 공공부문의 탈공공화와 사유화 과정이 정치 제도 안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정치 신자유주의화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이기도 하다.
선거는 사회운동도 중단시킨다. 선거의 시계가 돌아가면 권력을 무너뜨린 힘은 권력을 만드는 민중의 힘으로 세력화되지 못하고 빠르게 해체되곤 했다. 그동안 선거는 우리에게 실패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은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그를 통해 독재 세력을 부활시켰고, 2016년 촛불시위는 독재 후신 정권을 퇴진시켰지만 90년대처럼 자유주의 세력의 정권 창출을 도왔다. 역사는 늘 세상을 바꾸는 힘이 소수 정치인들의 손에 있지 않고, 단결한 민중의 힘에 있다고 가르치지만, 단결한 민중이 집으로 돌아간 다음날이 막막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눈빛, 얼굴, 몸짓과 하늘을 찌르던 함성 속에서 느껴지던 열망과 의지가 여전히 생생한데, 그 힘은 너무 쉽게 증발되고, 도둑맞는 것 같았다. 선거법이 작동하는 선거의 시간이 시작되면, 보이지 않는 죄수복을 입은 것처럼 답답하다. 이것도 금지, 저것도 금지, 어떤 활동을 조직해도 그 위로 거대한 가림막이 쳐진다. 중요한 사회적 사건들도 주목받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은 사회 운동의 대표와 이름 있는 활동가들이 줄줄이 정치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루트였다. 사회 운동의 주요 의제들이 정당과 후보의 정책 공약으로 수렴되면 제도정치에 걸맞게 적당히 세탁되어, '말랑말랑' 해졌다. 정책 개발, 인재 발탁이라고 부르는 과정은 시장의 상품 개발 과정과 유사해졌고, 영입된 후보들은 정당의 판촉 사원이 되었다. 이런 영입 전략은 총선 때마다 반복되어, 여성, 환경, 노동, 청년, 장애인 등 분야별 영입 인사들은 득표율을 높이고 각 당의 부족한 부분이나 오점을 커버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이런 식의 발탁과 유출은 사회운동의 힘을 약화시켰다. 정치권에서는 인지도 있는 개인을 쏙 빼내서 차출하고, 그 개인은 운동의 성과를 자신의 상징자본으로 사적으로 전유하며 정치권으로 들어가서 여전히 사회운동 내에서 영향력 있는 선배 노릇을 하며 지배 권력에 기대 시민사회 운동을 조력하고, 정부와 자본 시민사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운동은 정권 창출의 협력자들에게 크고 작은 공직을 나눠주며 전리품 배분처럼 지지를 지원으로 보상하는 엽관정치의 조력자가 되고, 이는 정치에 대한 불신과 함께 사회운동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을 초래했다. 이 과정이 지난 30년 동안 반복되어왔고, 지금 22대 총선을 앞두고 목도하는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최악이다. 이제는 정말 끝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도 잘못된 관계는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최근 녹색전환연구소와 로컬에너지 랩 등이 만든 '기후정치바람'은 기후선거 캠페인을 주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여론조사로 기후 유권자의 실체(?)를 숫자로 보여주면서 기후 후보에겐 기후 유권자를, 기후 유권자에겐 기후 후보를 연결시켜 주고, 기후 후보에 대한 지지와 투표를 결과로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누구든, 소속 정당이 어디든, 기후 의제를 들고 나온 후보들을 나란히 병렬해서 '기후 정치인'으로 소개하고 그들을 지지하고 투표하는 것이 '기후 유권자'이고 '기후 선거'이며, 그런 것을 '기후 정치'라 부른다는 것이다. 핵 발전을 지지하는 정당이든 공항 건설을 밀어붙이고 석탄 화력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는 정당이든, 위성정당에 참여하여 민주주의와 진보정치를 파괴하는 정당이든 상관없이, 기후를 말하고 있다면 '기후 후보'다. 지역별 '기후 정책'과 '기후 유권자'를 '발굴'해서 '기후 후보'와 연결될 수 있도록 매개하고, 각 당에 기후 유권자를 타겟으로 하는 기후 정책을 제안하는 방식은 사회운동보다는 정치 컨설팅 업체의 정책 중개업에 가깝다. 시민운동을 표방하는 단체나 연구소가 기업적 성격으로 변화해가면서 로비 단체나 싱크 탱크와 별반 차이가 없이 비슷해진 것도 정치의 시장화와 신자유주의화의 주요 특징이다. 90년대 이후 거버넌스를 통해 구축된 정부-기업-시민사회 협력관계는 신자유주의 정치연합의 기본 틀이다.
왜 '기후 유권자'라는 이름표가 모욕적으로 느껴졌는지 알 것 같다. 차별과 불평등, 계급과 권력 구조, 지배관계, 정치적 입장에 대해 말하지 않는 '기후 후보', '기후 유권자'라는 표식은 자유무역 체제, 반생태적 농식품 산업, 자연에 대한 착취와 수탈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HACCP, 저탄소, 유기농'같은 친환경 인증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녹색정치, 생태정치를 말하면서, 선거에 쓰는 전단지를 콩기름으로 인쇄하고, 플래카드를 재활용하며, 자전거를 타거나 전기자동차로 유세하는 선거운동을 '녹색 선거'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답답하다. 기후정의운동을 통해 확산되었던 개인주의적 소비 실천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소비주의적 환경 실천 양식이 그대로 소비주의적 선거 실천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 같아서다. 이런 식의 기후선거는 기후운동을 방향 없는 정치 소비자 운동으로, 기후 정치를 정체성 정치로 만들어버린다.
아마 이런 고민들은 기후운동의 장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운동의 영역에서도 같이 부딪치고 있는 고민일 것이다. 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답답해지는 고민들을 같이 나누고 함께 길을 찾기 위해 나는 3월 23일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에 가려고 한다. 그동안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기후정의운동의 방향에 역행하지 않고 운동의 성과를 무력화하지 않는, 더 이상 체제유지와 체제관리로 수렴되지 않는, 체제전환을 향해 나아가는 사회운동의 정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어떤 것일지, 함께 묻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찾고 싶다. 우리는 이 위기와 이 체제 속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음을 다들 느낀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흩어져 있는 상태로 공감하고 때때로 광장에 모여 목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서, 자기 지역, 자기 운동의 의제에 국한되지 않고 더 큰 체제 전환의 전망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세력화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게 지배 체제의 관리 기구인 의회 안에서 의석수를 확보하고 늘려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3월 23일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에서 그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기후정치세력화는 기후위기를 통해 드러나고 연결된 차별과 불평등의 당사자들, 체제에 의해 구조적으로 학살당하는 존재들이 자기 앞에 닥친 재난과, 홀로 겪고 있는 고난을 우리 공통의 것으로 만들고, '우리의 힘'으로 위기를 함께 극복해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연결되며,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고, 서로에게서 희망을 보면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고 체제를 넘어서는 정치적 주체로서 다음 사회의 대안이 되는 것이다.
내가 상상하는 녹색의 정치 혁명, 체제전환운동의 정치세력화는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나는 꽃'이 되는 것이다. 그 꽃들이 점점 피고 또 피어서 아스팔트를 뒤덮고, 마침내 갈아엎어 버리는 것이다. 그 피어나는 힘들을 자꾸만 짓밟아버리는 자유주의적 정상성의 신화와 죽은 상상력에 숨이 막힌다. 경제, 수출, 성장, 발전, 인구, 사회, 심지어 기후를, 위기 상태에서 '정상 상태'로 돌리려는 현 체제의 정상화 시도는 그 체제에서 압살 당했던 이들에겐 끝나지 않는 위기의 지속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거부하고 싶다. 우리에게 구경꾼이 되어 투표하고 지지하는 것 말고는 가만히 있으라는 지배 권력의 정치 규율을. 나는 맞서고 깨트리고 넘어서고 싶다. 정치와 운동을 분리하고, 전문 직업 정치와 삶의 정치를 분리하고, 정치인과 시민을 분리하고, 시민과 비시민을 분리하며, 인간의 정치에서 비인간의 정치를 배제하는 장벽을.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전환을 외쳤듯이, 우리가 요구하는 에너지 전환이 연료만 바꾸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가 원하는 정치의 전환도 이제 더 이상 제도적 개선이나 정권 교체에 머무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흩어져 있는 우리, 이제 모여 보자. 개구리처럼 밤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도요새처럼 멋진 떼춤을 추고 싶은 우리, 자유주의 정치에 갇힌 상상력의 감옥을 벗어나 완전히 다른 언어로 정말 상상도 못할 정치를 시작해보자. 그게 뭔지 아직은 모르지만, 아마 우리가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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