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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사령부는 731부대 전쟁범죄자를 비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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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사령부는 731부대 전쟁범죄자를 비호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2]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⑪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승자 미국은 패자인 일본 지도자들을 △평화를 깨트린 죄(crimes against peace)와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혐의로 처벌했다. 하지만 이시이 시로(石井四郎)를 비롯한 731부대 관련자들은 (일왕 히로히토와 마찬가지로) 도쿄전범재판을 비껴갔다. 도조 히데키처럼 체포해서 감옥에 가둔 뒤 전범재판 피고석에 세워야 했는데도, 그렇게 되질 않았다.

일본 군정 통치의 절대권자 맥아더 장군이 일왕 히로히토를 처벌하지 않은 것은 일본 보수우파의 저항을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미군정 통치를 이어가려는 계산에서였다. 731부대 전범자들을 재판에 넘기지 않은 것은 그들로부터 세균전 정보를 얻어내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더러운 거래'라는 욕을 먹을지라도 이시이 일당을 처벌하는 것보다 그들의 '피 묻은' 세균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소련과의 대결 구도 아래서) 미국의 국가안보에 이롭다고 여겼다.

그 과정에서 맥아더사령부 정보참모(G-2) 찰스 윌로비(Charles Willoughby, 1892-1972) 준장과 도쿄전범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의 미국인 수석검찰관 조지프 키넌(Joseph Keenan, 1888-1954), 이 두 사람이 바삐 움직였다. 윌로비는 이시이 패거리를 감싸고 돌며 '더러운 거래'를 뒤에서 지휘했고, 키넌은 도쿄전범재판으로 그들이 기소되는 것을 막았다. 오늘은 이 둘을 둘러싼 지저분하고 한심스런 이야기를 살펴본다.

맥아더 장군의 '애완 파시스트' 윌로비

먼저 찰스 윌로비 준장(맥아더 사령부의 참모2부장). 맥아더 장군의 정보참모(G-2)였던 윌로비는 오랫동안 맥아더의 최측근 부하로서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7일)으로 수세에 몰린 맥아더가 1942년 3월 필리핀 코레히도르 요새에서 한밤중에 일본군의 눈길을 피해 (잠수함도 아닌) 어뢰정으로 민다나오까지 가서 B-17 폭격기를 타고 호주로 몸을 피할 때도 함께 다녔다(당시 계급은 대령).

윌로비의 이념적 성향은 극우였다. 맥아더 장군을 다룬 여러 책에서 윌로비는 한결같이 파시즘 신봉자로 그려졌다. 맥아더는 그를 가리켜 '나의 애완 파시스트'(my pet fascist)라고 부르곤 했다. 충성심 강한 부하를 아끼는 마음으로 부르는 애칭이었겠지만, 그래도 섬뜩한 느낌을 준다. 맥아더도 윌로비의 성향이 거슬리지 않았기에 가까이 두었다고 풀이된다.

훗날 윌로비는 그가 쓴 작은 책자에서 '진보주의자나 리버럴리스트는 용공분자이기에 나의 적이고 미국의 적'이라 썼다. 강골의 반공주의자답게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손을 잡았던 소련을 극도로 미워하고 경계했다. 731부대의 세균정보가 소련에 넘어가지 않도록 전범들의 죄를 눈감아주고 '더러운 거래'를 이끈 공로로 별 둘을 달고 소장이 됐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이 독불장군처럼 구는 맥아더를 해임하자, 심복인 윌로비도 군복을 벗게 됐다. 그는 곧바로 그의 이념적 성향에 딱 맞는 새로운 직업을 얻었다. 스페인으로 날아가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 장군의 보좌관 겸 그를 위한 대미 로비스트가 됐다.

그 무렵 윌로비가 자서전을 내려하자, 미국 출판사(McGraw-Hill)는 '맥아더 장군의 전기를 쓰는 것이 더 많이 팔릴 것'이라 권했다. 1954년 윌로비는 전문 필자와 공동집필 형식으로 <MacArthur, 1941–1951: Victory in the Pacific>란 제목의 책을 냈다. 비평가들은 맥아더 장군의 측근들이나 알만한 사항들을 다루긴 했지만, 맥아더에 대한 근거 없는 찬양 또는 맥아더의 여러 군사적 패착에 대한 변명들이 거슬린다고 지적했다.

▲ 맥아더 장군의 정보 참모(G-2) 찰스 윌로비 준장(왼쪽)과 도쿄전범재판의 미국인 수석검찰관 조지프 키넌(오른쪽). 이 두 사람은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간부들이 전쟁범죄자로 기소되는 것을 막았다.

강성 일본육군 참모들 챙기고, 731부대 감싸

윌로비의 극우 이념 성향은 반공을 내걸었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과도 맞닿았다. 일본 육군 강경파 장교들은 제2참모부 안에 보좌역, 고문 등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윌로비는 생체실험과 세균전쟁으로 '악마의 부대'라는 악명을 얻은 731부대를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바라봤다. 그는 반공과 정보라는 두 개의 잣대로 731부대와 그 수괴인 이시이 시로를 평가했다.

먼저 반공 잣대로 보면, 윌로비는 731부대의 세균전 정보가 소련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여겼다. 정보의 잣대로 보면, 세균전 정보는 미국에 이롭다. 윌로비의 시각에선, 이시이를 전쟁범죄자로 처벌하려고 든다면 귀한 정보를 얻지도 못할뿐더러 자칫 그 정보가 소련 쪽에 넘어갈 수 있다. 맥아더에겐 '731부대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그들의 전쟁범죄를 추궁만 하지 않는다면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맥아더도 고개를 끄덕였다.

패전 뒤 일본 안에서도 이시이 패거리를 붙잡아 전쟁범죄자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윌로비는 맥아더 장군의 재가를 받아내 집안 단속을 했다. 함부로 731부대 관련 조사에 나서지 말라는 경고였다.

[1947년 4월18일 연합국총사령부 제2참모부장 윌로비 장군은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연합국총사령부 법무국에 각서를 보냈다. △세균전 관련 조사는 연합참모부의 직접 지휘를 받아야 하고, 제2참모부에서 조사를 진행하며, 조사과정에서의 각종 심문과 접촉은 모두 참모부와 공동으로 진행해야 한다. 아울러 미국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조사과정에서 최대한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획득한 정보는 반드시 제2참모부에 넘긴다.] (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914쪽).

맥아더사령부 법무국 조사관들에게는 전쟁범죄와 관련한 많은 투서와 제보들이 있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는 물론 100부대장 와카마쓰 유지로에 관한 것들도 적지 않았다. '부대 안에서 생체실험이 이뤄졌고 수감자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끝내 숨졌다'는 것이 고발의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위 각서가 나온 뒤 이시이 일당 조사 권한은 사실상 윌로비 장군이 독점하게 됐다.

미군 포로 생체실험 조사도 막아

도쿄 미 육군정보부 소속 로버트 맥콰일 중령이 윌로비 장군에게 올린 한 보고서엔 '731부대가 미군 포로에게 페스트균을 넣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제보 내용이 들어있다(1947년 1월10일에 제출된 이 보고서는 미 메릴랜드주 포트 미드에 있는 미 육군 정보 및 안보사령부 공문서 보관소에 있다). 그 제보가 사실이라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조사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윌로비는 조사를 막았다. 도쿄전범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이시이 일당이 지하로 숨어 세균전 정보가 사라질까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만주에 있던 731부대원이 어떻게 미군 포로를 만날 수 있었을까. 랴오닝성 최대 도시인 선양(瀋陽)은 20세기 전반기에 펑톈(奉天) 또는 만주어 발음으로 묵던(Mukden)으로 불렸다. 일본은 펑텐의 중국군 옛 병영을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만들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그곳에 미군, 영국군, 네델란드군 등 일본이 필리핀과 동남아시아를 침공하면서 붙잡은 포로 2000명쯤을 가둬두었다(미군포로는 절반쯤인 1000명). 이들은 배로 부산항으로 실려와 다시 열차로 펑텐까지 끌려갔다.

이들 백인포로를 상대로 세균 생체실험이 실제로 벌어졌느냐는 것은 지금껏 논란으로 남았다. 생체실험이 있었다면 '세균무기에 대한 백인 특유의 면역이 있느냐'가 관심 사항이었을 것이다. 1949년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731부대 세균제조과장 가라사와 도미오(柄沢十三夫, 군의소좌, 강제노동형 20년)의 법정 증언을 들어보자.

[1943년 초 펑톈육군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731부대에서 미나토(溱)가 찾아왔다. 미나토는 미군 포로의 면역성에 관한 문제 연구차 펑톈에 와 있다고 했다. 각종 전염병에 대한 앵글로 색슨 인종의 면역성을 연구하기 위해 731부대에서 펑텐 연합군포로수용소로 출장을 온 것이었다.] (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 210쪽).

세균에 오염된 음료를 마시게 한 뒤 증상을 확인했다는 증언도 있다. 하지만 만주 핑팡 731기지 본부에서 '마루타'를 생체실험하고 시신을 해부하곤 했던 끔찍스런 잔혹행위가 펑텐의 백인 포로를 상대로 벌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731부대가 세균무기 개발에 미쳐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럴 리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BC급 전범 조사과정에서 맥아더사령부 법무국 소속 닐 스미스 중위가 '연합군 포로를 대상으로 인체실험이 행해졌다'는 투서를 받고 조사에 나선 적이 있다. 그러자 윌로비 장군의 참모 2부가 개입해 조사를 막았다. 참모2부는 세균전 파일을 독점관리하면서 스미스 중위의 조사는 흐지부지 됐다(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203쪽).

미 역사학자 셸던 해리스는 연합군 포로를 생체실험 했다는 제보가 맞느냐 틀리느냐의 진상을 가려내기 앞서, 세균전 정보를 얻는 데만 초점을 맞춘 맥아더사령부와 그곳 미 조사관들의 태도를 이렇게 비판한다.

[(제보에 대한) 보고서는 한 믿을 만한 제보자의 말을 옮기면서, 이시이와 그의 보좌관들이 림프절 페스트 균을 묵던(奉天)과 만주에서 실험 목적으로 미군 병사들의 몸에 주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윌로비 장군의 부하인) 맥콰일 중령은 이런 사실에 놀라는 대신에, '사실 이런 실험의 결과는 아주 귀중한 가치가 있는 자료다'라고 썼다. 전쟁범죄가 아니라 (세균전 정보의) 귀중한 가치라는 생각이 일본의 생물무기(BW) 전문가들을 바라보던 미국의 시각이었다.] (셸던 해리스, <일본의 야망과 죽음의 공장>, 눈과마음, 2005, 422쪽).

▲ 구 일본군 장성들을 만나는 찰스 윌로비 준장. 맥아더사령부의 정보책임자로 극우 성향을 지녔던 윌로비는 지난날 침략전쟁을 벌였던 이들과 손을 잡고 일본을 반공 친미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위키미디어

일본 미군정에 스며든 '아리스에 기관'

일본을 군정 통치하던 맥아더 사령부에는 점령 초기에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일본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고 군국주의의 잔재를 없애면서도 새로운 틀을 짜야 했다. 구 일본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도 주어진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 나가있는 구일본군의 귀환, BC급 전범자들의 처리 등이 그것이었다.

맥아더사령부는 1945년 9월 13일자 포고령으로 지난날 일제의 침략전쟁을 이끌었던 일본군 대본영을 없앴다. 대본영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참모본부와 군령부도 1945년 11월 30일 공식 해산됐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일본군국주의 시절의 고급장교들을 보조 인력으로 채용했다. 정보 책임자 윌로비 주변에는 구 일본군 육군참모들이 자리 잡았다(한반도 38선 이남을 통치한 24군단장 존 하지 중장이 지난날 일제에 빌붙어 살던 친일파들을 미 군정청 요원으로 가까이에 둔 것과 똑 같다).

그 가운데 우두머리는 구 일본군 육군의 정보를 총괄하던 참모본부 제2부장 아리스에 세이조(有末精三, 1895-1992) 중장이었다. 아리스에는 일본 육사(29기)와 육군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엘리트로, 1942년부터 육군 참모본부의 정보책임자로 있었다. 패전 무렵 일본군의 기밀 서류를 불태우는 작업을 지휘했다. 1945년 3월 이시이 시로를 중장으로 진급시키면서 731부대로 돌려보내 세균전을 적극 펼치기로 했을 때도 아리스에의 역할이 컸다.

침략전쟁을 이끈 일본 육군의 강경파들이 모인 참모본부의 고급 지휘관들은 전쟁범죄자로 처벌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윌로비는 그 범죄집단의 정보 책임자 아리스에 중장과 손을 잡았다. 아리스에는 15명의 구 일본육군 참모로 이뤄진 '대(對)연합군 육군연락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간판은 '대외연락'이라 했지만 국내 좌익세력의 동향, 대소련 정보수집 등이 이들의 임무였다. 아리스에를 정점으로 한 구일본군 두뇌집단은 '아리스에 기관(機關)'이라 일컬어졌다.

결과적으로 아리스에는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간부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윌로비 장군의 판단에 영향을 끼쳤다. 그뿐 아니다. 아리스에는 이시이를 비롯한 731부대 패거리들에게 미군정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세균정보와 면책을 맞바꾸는 '더러운 거래'에 은밀하게 끼어들었다.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났다"

1945년 8월 28일 1500명 규모의 미군 선발대가 도쿄 근처의 아쓰기(厚木) 공항에 내릴 때 이들을 맞이한 일본 쪽 책임자가 아리스에였다. 그는 패전 뒤 전쟁범죄자로 체포될지 몰라 겁을 내고 있었다. 훗날 남긴 회상록 <終戦秘史-有末機関長の手記>(芙蓉書房, 1976)을 보면, 그는 운이 좋았다(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질 때도 그곳에 있었지만, 살아남았다).

[회상록에 따르면, 아리스에는 아쓰기 비행장에서 미군 선발대를 맞이한 뒤 총사령부 참모2부 대일연락과장 맨슨 대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맨슨 대령과는 오래 전에 아는 사이였다. 그가 연락과장으로 전화를 해온 것은 미군 점령을 앞두고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나다니 바로 이런 일이리라'하며,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했다.] (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279쪽).

맨슨 대령은 1925년 젊은 미군 장교 시절에 일본에 어학연수로 3년 동안 머무르며 아리스에와 가깝게 지냈다. 1945년 패전 뒤 맨슨 대령으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전화를 받았으니,그 기분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간다. 둘 사이의 인연은 그렇다 치고, 문제는 미 점령자들이 일본 통치의 편의를 위해 (히로히토를 살려둔 것과 마찬가지로) 침략전쟁의 범죄집단인 일본 군부와도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 윌로비를 도와 맥아더 사령부에서 일했던 아리스에 세이조 전 육군중장. 1945년 3월 이시이 시로의 중장 승진과 731부대 복귀, 그리고 패전 뒤 전범 처벌을 피하는 데 나름의 막후 역할을 했다.

미 수석검찰관, 이시이 보호막 펼치다

도쿄 극동국제전범재판소는 1946년 5월 법정 문을 열었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자들이 차례로 피고석에 섰다. 731부대 간부들로부터 세균전 정보를 얻어내려고 애썼던 맥아더사령부와 워싱턴이 그 무렵 신경 쓴 것은 무엇일까. (이시이 시로의 상관들을 전쟁범죄자로 기소한) 도쿄 전범재판의 검찰관들이 이시이 패거리마저 잡아넣으려 나선다면, 곤란한 문제가 생겨난다. 전범자들이 아예 숨어버려 세균전 정보를 못 챙기게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 일부 검찰관들이 731부대의 전쟁범죄에 관심을 돌리는 것을 아예 막아 나섰다. 그 역할은 조지프 키넌 수석검사가 맡았다. 키넌은 맥아더 장군의 정보참모(G-2) 윌로비와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맥아더와 워싱턴의 생각을 충실히 받들었다. 이시이 패거리를 구속하기는커녕 보호막을 펼치기에 바빴다.

도쿄전범재판을 다룬 검찰국에는 중국을 비롯한 연합국 11개국에서 검사를 파견했고, 조지 키넌이 수석검사를 맡았다. 키넌을 우두머리로 한 미국 검사팀에는 16명의 미국인 검찰관이 있었다. 그 검찰관 가운데 토머스 모로우(Thomas Morrow) 대령은 731부대의 세균전 범죄가 반드시 도쿄재판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여겼다.

1946년 3월 2일 모로우 대령은 키넌 검사에게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조사해보겠다는 내용의 12쪽 분량의 긴 보고서를 제출했다(메릴랜드주 포트 미드 '미 육군 정보 및 안보사령부 공문서 보관소'에 남아있는 보고서는 1면과 12면뿐이다. 누군가의 손을 탔는지 속지가 없어졌다. 다행히 복사본이 남아 있다). 그 핵심내용은 이러했다.

[(731부대가 세균실험을 하고 세균전을 펼쳤다면) 이 문제는 독가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왜냐 하면 이런 종류의 전쟁무기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물론 전장에 나가 있는 일개 육군 장교의 자원을 활용하여 개발할 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금지된 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부대 사령관이 아니라 일본 군부가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셸던 해리스, 406쪽).

'모로우 대령은 이시이 수사에서 손 떼라'

모로우 대령은 자신이 이시이의 전쟁범죄 증거들을 조사하고 그를 직접 심문해 도쿄 전범재판에 기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곧 장벽에 부딪쳤다. 731부대에 관한 조사는 윌로비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윌로비 장군의 직속 부하인 참모2부 첩보기술부 D.S 테이트 대령은 모로우가 이시이 기소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났다. 그 무렵 마침 미 데트릭 기지에서 2차 조사관으로 파견된 아보 톰슨 중령과 함께였다.

731부대의 전쟁범죄와 그들이 생체실험으로 얻어낸 세균전 자료를 맞바꾸려는 맥아더사령부와 워싱턴의 입장을 모로우 대령이 알 리가 없었다. 테이트와 톰슨 두 사람은 모로우를 '상황을 잘 모르는 답답한 검찰관'으로 여기면서 혀를 찼을 것이다. 두 사람이 모로우에게 했던 말을 앞뒤 잘라 줄이자면, 이렇다. "우리는 상부의 극비 명령으로 731부대 조사를 하고 있으니, 당신은 그만 손을 떼시오."

정의감이 강했던 모로우 대령은 이시이 패거리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테이트와 톰슨을 만난 바로 뒤인 1946년 3월 12일 모로우는 미국인 동료검사인 데이비브 서튼과 함께 전부터 예정돼 있던 중국 출장을 떠났다. 도쿄재판의 중국쪽 검사인 샹저쥔(向哲濬)과 함께였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상하이, 난징, 충칭 등 중국의 주요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일본의 전쟁범죄 증거를 모아 도쿄로 돌아왔다.

이시이 기소하려다 미국으로 쫓겨나

모로우를 기다리는 것은 키넌 수석검사의 차가운 눈초리였다. 이 무렵의 상황을 잘 그려낸 책이 진 기일민(Jeanne Guillemin, MIT 안보연구팀 수석고문)의 <숨겨진 만행>(Hidden Atrocities, 컬럼비아대 출판부, 2017)이다. 기일민은 탄저균을 비롯한 세균무기에 관련된 여러 권을 책을 낸 바 있다. '일본의 세균전과 도쿄재판에서의 미국의 사법방해'라는 부제목이 말하듯, 이 책은 미국이 도쿄전범재판에서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다루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움직였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책에는 모로우 대령이 키넌 검사와 갈등을 빚는 대목들이 나온다. 기일민에 따르면, 모로우에게 중국 출장은 일본군의 전쟁범죄 증거를 수집하려는 '매우 야심찬 진상조사'(the most ambitious fact-finding expedition)가 목적이었다(Jeanne Guillemin, 105쪽). 아마도 이런 비슷한 임무를 띠고 어딘가로 출장을 가보지 않은 독자분이라도 모로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일본군이 독가스를 마구 살포하고 무차별 공습을 저질렀던 상하이, 난징, 충칭에서 피해자와 유족들을 만나 그들의 피눈물 어린 증언을 기록했다.

중국 출장을 다녀온 뒤 키넌에게 낸 보고서에서 모로우는 '일본군이 난징과 충칭에서 생화학전 공격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731부대 전쟁범죄 조사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그 보고서는 키넌의 손을 거쳐 맥아더사령부의 정보책임자인 윌로비 장군에게 전해졌고, 워싱턴에도 보고서 사본이 올라갔다.

도쿄로 돌아온 한 달 뒤인 1946년 5월 모로우는 '일본의 중국 군사침략, 1937-1945'란 제목을 단 또 다른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군이 중국 민간인들과 중국군 포로들을 학살하고 독가스를 마구 써 1925년 헤이그협약을 어기는 화학전을 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서는 중국 출장길에 모로우가 만난 목격자들의 명단, 중국 육군의무대 부소장인 창 소장의 증언 등을 덧붙이며 일본군이 독가스를 마구 사용함으로써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731부대의 전쟁범죄 조사를 다시금 건의했다.

키넌 검사는 모로우의 보고서를 철저히 무시했다. 이시이 일당이 지닌 세균전 정보를 캐내는 데 몰두해 있던 윌로비 장군은 키넌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모로우의 열정은 끝내 화를 불렀다. 1946년 8월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군복마저 벗었다. 731부대의 전쟁범죄라는 역린(逆鱗)을 건드려 맥아더 사령부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1946년 4월 29일 키넌의 국제검찰국은 도쿄 전범재판소(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 기소장을 제출했다. 키넌은 기소장에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28명의 A급 피고들이 저질렀던 침략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꾸짖으면서도, 히로히토 일왕의 '히'자도 넣지 않았다. 마침 그날은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이었다. 히로히토로선 그만한 생일선물도 없었을 것이다. 기소장에 이름이 빠진 자들이 또 있었다.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의 주요 간부들이었다.

▲ 1949년 하바롭스크 전범재판. 일본군 피고인 12명 가운데는 8명이 731부대의 세균전 전쟁범죄로 최저 2년, 최대 25년의 강제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도쿄 전범재판에서는 731부대 관련자들이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았다. ⓒ위키미디어

"미국은 중대한 권력범죄 저질렀다"

일본 사학자 아와야 켄타로우(粟屋憲太郎) 릿쿄대 교수는 지난날 일본의 침략과 전쟁범죄를 겸허히 돌아보자는 자성사관(自省史觀)을 지닌 양심적인 지식인이다. 일찍이 <도쿄재판론>(東京裁判論, 大月書店, 1989)에서 아와야는 히로히토 일왕과 731부대 전범자들을 재판에 넘기지 않은 것을 두고 '전쟁 뒤 일본의 전쟁책임 추궁이 아주 애매하게 끝나버렸다'고 비판했다. 731부대 전범자들과 미국 사이의 더러운 거래는 '전승국의 편의주의적 담합'의 결과라는 것이다.

아와야 교수는 '생체실험이란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자들이 도쿄 전범재판을 비껴간 것은 크게 잘못됐다'고 비판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미국이 이끌어갔던 도쿄재판은 공평한 재판과는 거리가 멀었고, 따라서 '미국은 중대한 권력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미국은 731부대의 인체실험 연구성과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자 (도쿄)재판을 통해 이 사실이 공개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미국 당국자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 과학자나 의학자가 인체 실험 혐의로 소추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731부대 관계자의 인체실험도 독일의 것과 같다고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면책했다. 미국은 명백한 전쟁범죄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은폐함으로써 중대한 권력 범죄를 저질렀다.] (粟屋憲太郎, '도쿄재판으로 본 전후 처리', <기억과 망각>, 삼인, 2000, 107쪽).

일본의 '전후(戰後) 책임'

일본의 극우들은 자성사관을 지닌 지식인들에게 "당신들은 자학사관(自虐史觀)을 지녔어!"라는 비아냥을 퍼붓는다. 하지만 양심적인 역사인식을 지닌 이들은 말한다. "도쿄전범재판에서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몇몇 전시지도자들이 처벌 받았다고 일본의 전쟁책임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다." 일본 민족이 타민족에 대해 가해자로 있었던 만큼, 이에 대한 사죄와 배상 등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이를 일본의 '전후(戰後) 책임'이라 일컫는다.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독일제국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던 범죄'에 대해 독일인들 모두가 '도덕적이고 집단적인 책임'이 있다고 했다(본 연재 33 참조). 나치 정권에 열광했던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의 전쟁범죄에 집단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아와야 교수도 일본의 '전후 책임'을 말한다. 헛된 '대공아공영권'에 열광하면서 침략전쟁으로 이웃나라들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일본 국민은 '전후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보수우경화 흐름 속에 많은 일본인들이 아와야 교수 같은 이들의 양심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일본의 현실이 그렇다. 바뀌긴 쉽지 않다. 다음 주 글에선 △731부대의 세균전에 피해를 입은 중국인 희생자와 유족들이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한 재판이 제대로 마무리 됐는지, △'더러운 거래'로 전범 처벌을 비껴간 731부대원들은 그 뒤 어떻게 뻔뻔하게 지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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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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