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꼽혔던 야권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47)의 돌연사로 러시아 반정부 운동의 미래에 암운이 드리워지는 가운데, 거세진 푸틴 대통령에 대한 국제적 반감이 우크라이나 지원을 보류 중인 미국 하원을 움직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워싱턴포스트>(WP)를 보면 나발니 사망이 발표된지 이틀이 지난 18일(이하 현지시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선 구금 위협에도 불구하고 추모 행렬이 계속됐다. 신문은 이날 자사 기자가 지켜 본 1시간 동안에만 소련 시절 정치적 탄압 희생자들을 기리는 모스크바 솔로베츠키 기념비에 나발니 추모의 의미로 꽃을 두고 가려는 사람이 100명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신문에 따르면 후과가 두려워 성을 밝히기를 거부한 추모객 예브게니(26)와 율리아(24)는 2019년 이후 나발니가 주도한 모든 집회에 참여했다며 "그는 우리의 자유의 기회였다. 그와 함께라면 모든 게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며 울먹였다. 러 인권감시단체 OVD-Info에 따르면 18일 오후 10시 30분까지 나발니 추모 시도와 관련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 39곳 지역에서 387명이 구금됐다.
암살 당한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처럼 저명한 활동가가 사후에도 저항 운동의 상징이 된 사례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경우엔 어렵다고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뒤 푸틴 정권의 내부 통제가 더욱 강화된 데다 나발니 자체가 반푸틴 운동의 얼굴로 그를 대체할 이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러 연방 교도소 당국은 지난 16일 시베리아 야말로네네츠 자치구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나발니가 산책 뒤 갑자기 사망했다고 밝혔다.
나발니의 친구이자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마이클 맥폴은 <뉴욕타임스>에 "그(나발니)의 인생의 사명은 살아 있는 것,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었다"고 개탄하며 "그는 독특하며 카리스마 있고 인기 있는 야권 지도자였고 그의 아내를 제외하면 배턴을 넘겨 받을 명확한 인물이 없다"고 말했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싱크탱크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 센터 선임 연구원인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는 <워싱턴포스트>에 나발니의 죽음에 몸서리치는 이들은 "특정 집단"이고 "이들은 극소수이며 어떤 항의도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나발니 죽음이 반체제 운동의 전환점이 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 전쟁 뒤 러시아 정부가 반전 목소리를 탄압하며 사실상 집회나 시위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2015년 저명한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가 피살됐을 때 모스크바에서 수만 명이 추모 행진을 벌인 것을 감안하면 몇 년 새 통제 정도가 극심해진 것이다.
나발니 추모를 위해 개인적으로 꽃을 바치는 행위조차 당국의 엄격한 통제 아래 진행됐다고 <워싱턴포스트>가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18일 솔로베츠키 기념비 인근에 경찰 10여 명이 배치돼 추모객들에게 기념비 앞에 몇 분 이상 머물지 말라고 직접 지시했다. 소련 시대 정치 탄압 희생자를 기리는 또 다른 장소인 모스크바 '슬픔의 벽' 주변에도 경찰이 배치돼 추모객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나발니의 죽음이 러 야권의 결집을 촉발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18일 <뉴욕타임스>(NYT) 나발니 쪽 운동이 다른 야권 운동에 종종 냉담한 태도를 취해 왔고 많은 야권 지도자들이 국외에 망명해 있는 상황에서 연대가 쉽진 않지만 일부 야권 지도자들이 그러한 희망을 표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석유 재벌 출신으로 푸틴 정권의 대표적 반대자 중 하나인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가 "나는 항상 연합을 촉구해 왔다. 무엇보다 개인 야권 지도자들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한 사람이 사라져도 다른 사람들은 남고 또 다른 새로운 인물도 나타나기 때문에 연합은 시스템으로서 훨씬 더 안정적이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현재 호도르코프스키는 영국에 망명 중이다.
신문은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망명 중인 야권 정치인 막심 레즈니크도 나발니 조직에 대해 "나는 항상 그들의 고립주의적 입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며 "알렉세이를 대체할 순 없지만 협력 매커니즘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들 외에도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막심 카츠, 주말 뮌헨 안보회의에서 연단에 올라 추모 연설을 한 나발니의 아내 율리야 나발나야 등이 나발니 이후 러 야권 운동을 이끌 구심점으로 거론되지만 경제학자인 콘스탄틴 소닌은 18일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에 나발니의 죽음 뒤 반푸틴 운동 지도자들의 목숨이 더욱 위험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방송에 "이제 푸틴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살인을 할 수 있는 정치인이라는 악평을 얻었다. 잃을 게 적어진 셈"이라며 "그(푸틴)는 평판에 새로이 손상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더 많은 이들을 죽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영국 인권 변호사이자 작가인 필립 샌즈는 <뉴욕타임스>에 나발니의 죽음은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려주는 지표"라며 많은 정부들이 "이러한 인물들을 종종 오랜 기간 가뒀지만 죽이진 않았다"고 지적했다.
나발니의 죽음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미루고 있는 미 하원에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러시아 내 인권 탄압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미국 태생 영국 금융가 윌리엄 브로더는 <뉴욕타임스>에 나발니의 죽음으로 미 의원들이 푸틴 대통령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불가능해져 단기적으로 미 의회 공화당원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군사적 지원을 미루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관측했다.
척 슈머 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18일 나발니 사망이 "긴급한 경보"를 울리고 있다는 성명에서 "푸틴 대통령이 미국이 행동할 것인지 지켜보고 있다"며 하원이 지난 13일 상원에서 통과한 우크라이나 지원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은 해당 법안 상원 통과 뒤 "하원은 계속 독자적 의지에 따라 일하겠다"며 통과시킬 의지가 없음을 시사한 바 있다.
존슨 의장은 16일 나발니 죽음이 발표된 뒤 "미국과 우리의 파트너들은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일으킨 전쟁과 발트해 국가들에 대한 침략 자금을 조달하는 능력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성명을 냈지만 우크라이나 지원 법안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더구나 하원은 2주간 휴회에 들어간 상태로 의원들은 나발니 사망 후폭풍이 사그라들었을 수 있는 2월 말에야 복귀할 예정이다.
18일 러 국영 <타스> 통신에 따르면 러 국방부가 전날 우크라이나 동부 격전지 아우디이우카를 장악하고 8.6km 전진했다고 밝히는 등 우크라이나 전황은 악화 중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7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미 의회가 행동하지 않은 결과" 우크라이나군이 탄약 부족으로 아우디이우카에서 철수해야 했고 "러시아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며 하원이 우크라이나 지원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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