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지난해 12월,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네덜란드 정부의 대중국 수출통제 발효를 몇 주 앞두고 합법적으로 수출할 예정이었던 장비 3대의 선적이 중단되었다. 블룸버그, CNBC, 영국 가디언 등의 언론에 따르면 선적 중단의 배경에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압력이 있었다. ASML이 수출하려던 장비는 최신 장비가 아닌 심자외선(DUV) 장비였지만, 화웨이의 7나노 칩 생산에 ASML의 DUV 장비가 이용되었다고 알려지면서 미국이 수출을 갑자기 막았다는 후문이다.
장면 2. 지난해 10월, 미국은 중국에 기존보다 사양이 낮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칩도 수출하지 못하게 했다. 기존에는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의 대중 수출과 일정한 성능 이상의 인공지능 및 슈퍼컴퓨터용 반도체 수출만 금지하고 있었다. 미 행정부가 저사양 반도체의 중국 수출도 금지하자 타격을 입은 기업은 미국의 엔비디아였다. 결국 엔비디아는 다시 미 행정부의 규제에 맞춰 중국 시장을 겨냥해 저사양 AI칩인 H20을 내놓았지만, 중국 현지에서 반응이 썩 좋지는 않다.
장면 3.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이익단체인 미국반도체협회(SIA)가 지난달 17일 미 상무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동맹국들도 수출 통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SIA는 "일국의 통제보다 다국적 통제가 효과적이며 다국적 통제를 해야 미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미국 기업들은 첨단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지만 일본, 한국, 대만, 이스라엘, 네덜란드의 외국 경쟁업체들은 품목별 수출금지 목록에 올라 있지 않은 장비라면 중국 수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다급하다. 중국을 대상으로 ‘반도체 전쟁’을 벌이면서 네덜란드를 최전선에 내세웠다. 그 과정에서 ASML이라는 기업의 이익은 물론이고 네덜란드의 국익도 훼손당했지만 그런 것은 미국의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심지어 엔비디아 같은 자국 기업들이 중국 매출 감소로 피해를 입더라도 미국은 반도체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조만간 한국도 반도체 전쟁의 한복판에 끌려 들어갈 조짐이 보인다. 최근 미국 상무부 고위 관리가 "새로운 다자 수출 통제 체제"를 언급하면서 한국도 참여 대상이라고 언급했다. 수출 통제로 한국 기업들이 입게 될 피해는? 20개월 만에 겨우 플러스로 돌아선 한국의 대중 수출은? 당연히 미국의 고려 사항이 아니다.
한국은 네덜란드와도 처지가 다르다. 장비 기업들은 중국 수출이 줄어들어 손해가 나더라도 중장기적으로 다른 나라에 새로 건설되는 공장에 장비를 판매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삼성과 SK하이닉스의 경우 이미 중국에 수십조 원 규모의 투자를 해놓은 상태로, 중국 시장에 반도체를 못 팔게 되거나 공장 설비 업그레이드를 못 하게 되면 직격탄을 맞는다. 게다가 한국은 수출 의존도와 반도체 의존도가 큰 나라다. 혹시라도 미국의 반도체 기술 전쟁에 끌려다니며 중국 시장을 잃게 된다면 한국의 경제지표는 급속도로 나빠질 것이다.
'탈중국' 외쳤던 윤석열 정부
탈중국 하면 되고 수출 다변화하면 된다고?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망에 편입되어 장사를 잘하면 된다고? 그게 윤석열 정부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2022년 6월, 최상목 당시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은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 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면서 중국의 대안 시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외 언론들은 이 발언을 '탈중국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발언의 당사자인 최상목은 지금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되어 있다.
탈중국은 말이 쉽지, 현실에서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중국은 여전히 세계의 제조업 중심이고 한국 반도체 업계에 최대의 시장이다. 2020년 이후 한국의 대미 수출이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대중 수출의 감소를 상쇄하지는 못한다. 지난해 7월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의 "중국이란 큰 시장을 포기하면 우리에겐 회복력이 없다"는 발언은 그런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이 '디커플링'이라는 표현을 '디리스킹'으로 바꾼 것도 탈중국이 실현 불가능한 구호였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에 중국 시장이 어떤 의미인지는 <조선일보>에 물어봐도 답이 나온다. 지난달 29일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지난해 중국이 수입한 물품 가운데 한국산이 6.3%"로 한중 수교 이듬해인 1993년 이후 가장 낮다고 지적했다. 그 근본 원인은 중국의 산업 경쟁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자동차,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등에서 한중이 경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설은 "미·중 갈등이 격화되고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이 바뀌고 있다지만 여전히 중국은 세계 제조업의 중심이고 우리나라 수출의 22%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교역국"이라면서 "5% 안팎으로 성장하는 거대한 중국 시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한국과 경쟁할 것은 경쟁하더라도 협력할 것은 협력하자는 입장인 듯하다. 지난해 4월 13일, 시진핑 주석이 중국 광저우에 있는 LG디스플레이 공장을 방문했다. 시 주석이 중국 내 외국 기업의 공장을 방문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중국은 한국을 향해, 미국의 대중 디커플링에 동참하지 말고 경제적 협력을 계속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인 19일, 윤 대통령은 방미를 앞두고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대만 문제를 언급하며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절대 반대한다"고 말했다. 중국이 가장 민감해하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건드렸으니 그 후로 한중 관계는 냉각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대중국 수출은 2023년 말까지 계속 저조했다. 얼마 전 현대차의 충칭 공장 매각과 철수는 중국에서 한국 제조업 기업들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에 공장 지으면 될까?
미국이 벌이는 대중 무역전쟁의 한 축이 대중 수출 통제라면 다른 한 축은 리쇼어링(프렌드쇼어링 포함)이다. 과거 보호무역 시대에 보조금이 수입을 줄이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사용된 데 반해, 최근 주요국 정부들이 지급하는 보조금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생산시설을 자국에 유치하기 위한 수단이다. 미국 정부의 보조금 정책과 리쇼어링은 자국의 제조업 공동화 문제를 해결하고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인위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에 기업인 122명을 데려가서 약 1000억 달러(133조 5000억 원)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고 왔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숄츠 독일 총리가 각자 중국을 방문하면서 기업인들을 수백 명 씩 데려가서 계약을 따온 것과 대조된다. 지난해 8월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이 시행된 이후 한국이 미국에서 진행하겠다고 발표한 투자 프로젝트만 20개가 넘는다. 유럽 기업들이 다 합쳐서 19개, 일본 기업들이 9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에 비해 특별히 많다. 이렇게 한국의 핵심 산업을 미국으로 이전할 경우 국내의 산업기반은 쇠퇴하고 일자리는 줄어들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건설해서 가동하는 것과 관련해서 최소한 세 가지 질문을 추가로 던져볼 수 있다. 첫째, 대중 수출을 통제하고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미국식 방법으로 중국의 첨단기술 개발을 막을 수 있을까? 그런 식의 ‘전쟁’에 동참하는 것이 한국에 과연 유리할까? 지난해 6월 싱하이밍 중국 대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싱 대사의 발언에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 경제와 산업의 미래에 대한 냉정한 판단도 필요하다. 둘째, 미국과 유럽과 일본이 모두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몇 년 후 반도체 과잉생산 가능성을 우려한다. 그 공장들이 생산하는 반도체를 모두 어디에 판매할 것인가? 중국 시장을 배제하고서 충분한 수요가 확보될 수 있는가? 윤석열 정부가 한국에 만들겠다고 하는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셋째, 한국 반도체 기업이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수령할 때 붙는 조건들이 과도하지 않은가? 미국에서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는 이익을 올리면 초과이윤을 환수당하고, 반도체 생산시설과 영업비밀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접근을 허용해야 하며, 향후 10년간 중국 등 몇몇 국가에 투자를 할 수 없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중 중국 투자 제한 항목에 대해 미국 정부로부터 유예를 받아냈다. 그런데 외신에 따르면 그 유예 조치마저도 앞날이 불투명하다. 미국이 중국에 반도체 생산공장을 운영하는 업체의 장비 반입 규제 수위를 계속 높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블룸버그>는 '미-중 경쟁에 발목 잡힌 90억 달러짜리 반도체 공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띄웠다. 90억 달러짜리 반도체 공장이란 SK하이닉스가 인텔로부터 인수한 중국 다롄의 낸드플래시 공장을 가리킨다. <블룸버그>는 미국의 대선 결과와 그 이후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한국 기업들이 곤란해질 가능성도 있다고 보도했다. 또 한국 경제의 반도체산업 의존도가 크기 때문에 "공급망을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베이징이 핵심 반도체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워싱턴의 움직임에 한국이 특히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비슷한 예상을 내놓았다. 지난해 10월 IMF가 발표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경제전망 보고서'는 '프렌드쇼어링'(중국과 OECD 회원국들이 두 블록으로 분리)과 '리쇼어링'(주요국 해외 진출 기업들의 국내 복귀)이라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설정해서 각국의 경제를 전망했다. 프렌드쇼어링 시나리오에서 세계 국내총생산(GDP)은 1.8% 감소하고 일본과 유럽연합(EU)의 GDP는 1%대 감소하는 반면, 한국은 GDP가 4% 가까이 줄어들 것으로 추산됐다. 리쇼어링 시나리오는 더 암담하다. IMF는 리쇼어링이 이뤄질 경우 한국의 GDP는 10.2%나 줄어든다고 전망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대중 무역전쟁이 한국 경제에 얼마나 큰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치밀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외국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거나 피해 갈 수도 있어야 한다. <블룸버그> 기사에서 미국 소재 한국경제연구소(KEI)의 트로이 스탠거론 선임국장은 "한국은 미국, 중국과의 관계 균형을 맞추는 까다로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도체 전쟁, 쉽게 끝나지 않는다
사실 미국의 반도체 전쟁은 경제적으로는 미국에도 손해가 되는 일이다. 2020년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보고서는 대중 수출통제의 역효과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대중 수출통제를 계속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국 기업들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중국의 기술 발전을 억제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지난해 6월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미국 외교협회(CFR)와의 대담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을 두고 "결승선은 없다"고 언급했다. 중국과의 무역 전쟁, 기술 전쟁을 쉽게 끝내지 않고 장기적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이 아닌 트럼프가 당선된다 해도 대중 정책의 기본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뿐 아니라 미국의 무역장벽이 지금보다 더 높아질 수도 있다. 트럼프는 중국 외에 모든 나라와의 무역에 관세 10%를 보편적으로 적용하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현실이 되는 날에는 지금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도 앞날이 불투명해진다. 얼마 전 트럼프는 "모든 종류의 자동차가 미국에서 생산되기를 바란다"면서 자신이 당선되면 관세 등의 수단으로 "이곳에 공장을 세우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자동차업계에서 미국의 테슬라가 중국의 BYD에 추월당한 것에 대한 미국인들의 초조한 심정에 호소한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초조해질수록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 많은 요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중 봉쇄를 미국만 하면 효과가 없으니 한국도 같이 동참해야 한다, 미국이 중국에 이런저런 제품을 수출하지 않기로 했으니 한국도 수출하지 마라, 생각이 비슷한 나라들끼리 프렌드 쇼어링을 해야 하니 한국의 제조업을 미국으로 이전하라… 이런 요구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동맹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요구들을 계속 들어주는 것은 한국의 경제주권을 스스로 놓아버리는 길이다.
지정학적 대전환의 시기에는 변화를 잘 읽어내야 한다. 앞으로는 첨단기술의 뒷받침 없이 단순히 노동자 임금을 낮게 유지해서 경쟁력을 키우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또한 원자재와 식량, 에너지의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어서 각국 정부의 외교적 행보가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세계의 교역과 물류 흐름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이처럼 거대한 변화 속에서 국익을 극대화하려면 무엇보다 정책의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처럼 미국, 일본을 이념적으로 짝사랑하면서 온갖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는 대신 국내 기업들의 어려움은 노조 때려잡기와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 도입으로 해결해 주겠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최악의 노선이다.
<참고>
ASML halts hi-tech chip-making exports to China reportedly after US request (24.01.02 The Guardian)
The $9 Billion Chip Plant Stuck in Limbo of US-China Rivalry (24.01.24 Bloomberg)
Washington shores up friends in the global chip war (24.02.06 Politico)
H20으로 돌파구 마련한 엔비디아, 화웨이와의 경쟁 '불가피' (24.02.02 HelloT)
[사설]30년 전으로 쪼그라든 중국 시장 속 '메이드 인 코리아' (24.01.29 조선일보)
IMF "美-中 디리스킹, 최대 피해자는 한국… 최악땐 GDP 10% 감소" (23.10.23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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