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도서관을 집처럼 들락거린 날들이 있다. 기획기사 '검사가 살려준 의사들'과 쌍둥이 기획 '복지부가 살려준 의사들'의 취재 과정 속 지난날들 얘기다.
법원도서관에선 법원이 갖고 있는 판결서를 직접 검색하고 열람할 수 있다. 당시 기자에게 법원도서관은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감사원 감사보고서만 갖고서 퍼즐을 맞추기엔 가려진 정보가 너무 많았다. 정보공개 청구도, 국회의 도움도 막힌 상황에서 유일한 취재 방법은 판결서라도 뒤져보는 일이었다.
법원도서관에 마련된 컴퓨터는 고작 6대. 한 타임 당 이용 가능 시간은 약 1시간 30분.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메모지만 사용할 수 있고, 휴대전화 등 모든 전자기기는 반입이 금지돼 있다. 방문 전 예약부터 판결서 열람까지, 모든 게 쉽지 않은 이곳을 약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방문했다.
무덤처럼 쌓인 수만 건의 판결서를 샅샅이 살폈다. 감사보고서에 적힌 힌트는 담당 법원, 재판 확정일자, 혐의, 선고형량뿐. 이 정보가 한데 일치하는 사건은 잘 특정되지 않았다. 기자가 찾으려는 사건만 유독 꼭꼭 숨겨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문턱이 닿도록 드나들었더니, 언젠가부터는 법원도서관 시설관리자들도 주차장 차단기를 알아서 올려줬다. 그때쯤이었다. 막혔던 취재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 찾고 있던 판결서가 마치 낚싯바늘을 문 물고기처럼 모니터 위로 튀어 올라왔다. 사건이 하나둘 특정되기 시작했고, 드디어 기막힌 사건들의 전말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과 손이 바빴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모니터를 보는 눈은 좌우로, 마우스 스크롤을 굴리는 손가락은 위아래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16곳의 불법 안마방을 운영하며 40억 원에 가까운 돈을 벌어들인 의사, 비의료인인 자칭 '영적 치료사'에게 의료행위를 지시해 뇌경색 환자를 죽게 만든 한의사, 간호조무사에게 프로포폴 투여를 지시해 산모를 죽게 만들고, 진료기록부까지 조작한 의사 ….
사건의 잔혹함보다 더 기막힌 지점이 있었으니. 이들 모두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의료면허가 취소 또는 정지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도 검찰이나 보건복지부의 잘못으로 말이다. 기자가 몇 달에 걸쳐 애타게 이 사건들을 찾았던 이유다.
이번 기획 역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정부기관이 범죄 의료인들의 면허를 사실상 ‘살려줬고’, 이 사례들은 그동안 개인정보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있었으니까.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해 12월부터 의료면허를 취소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검사 덕분에 '살아난' 의료인들 이야기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검찰에겐 유죄 확정 의료인의 재판 결과를 보건복지부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대상자는 의료 관련 법령 위반으로 금고 이상 형을 확정받은 사람.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가 의료면허 취소 처분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검찰은 통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보건복지부는 유죄 판결을 받은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하지 못했다. 감사원은 2021년과 2023년 정기 감사보고서에서 이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검찰의 재판결과 미통보로 인해 의료면허가 취소되지 않은 의료인 등(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 한약사, 간호사)은 총 47명.
불법 안마방을 운영하며 40억 원에 가까운 돈을 번 의사도(☞ 관련기사 : 안마방으로 40억 번 '안마방 투잡 의사', 검찰 덕에 면허취소 피했다), ‘영적인 힘’에 기대 뇌경색 환자를 죽게 만든 한의사도(☞ 관련기사 : '대장동 공판' 담당 검사, 과거에 환자 죽인 의사 '살려줬다'?) 여기에 포함된다.
이중 취소되지 않은 의료면허를 이용해 돈을 번 의료인이 총 25명이다. 이들의 월 평균 수입만 1402만 원. 이들의 수익에는 건강보험공단이 지급한 요양급여비와 환자들이 낸 병원비가 일부 포함된다. 결국 검찰의 잘못으로 나랏돈에 손실이 생기는 상황.
그럼에도 아무도 이 문제를 책임지고 있지 않다. 감사원은 책임 검사들에 대한 징계 권고조차 하지 않았다. 감사원은 2021년부터 이 문제를 반복해 지적하면서도, 검찰총장에게 주의만 당부할 뿐이었다.
의료면허 정지 사례도 마찬가지다. 의료법을 위반해 의료면허 정지 등 행정처분 대상이 된 의료인들 중 '운 좋게' 용서받는 사람들이 있다. 보건복지부가 이들에게 면허정지 처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는 품위를 심하게 손상하는 행위 등을 하였거나 의료법 관련 명령 등을 위반한 의료인 등에 대해 1년(의료기사의 경우 6개월)의 범위 내에서 자격정지 처분을 할 수 있다. 이때 자격정지 처분은 시효가 있다. 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5년(진료비 거짓 청구의 경우 7년)이다.
하지만 복지부는 면허정지 처분을 내리지 않았다. 사유는 단순 시효만료. 감사원은 감사보고서에 "복지부가 사건 진행 상황 등을 확인하는 업무를 게을리하다가 처분시효가 지나버렸다"고 밝혔다.
복지부가 2018년부터 2023년 3월까지 단순 시효 만료를 사유로 의료인 면허정지 등 행정처분을 내부 종결한 사건은 총 299건. 연간 평균 약 50명의 의료인들이 시효 만료 덕분에 처분을 피했다. 처분시효가 지나버린 사건은 현재로서는 어떠한 후속 조치도 불가능하다.
감사원은 2023년 9월 정기 감사보고서를 통해 복지부의 방치로 의료면허 정지 등 행정처분을 받지 않은 의료인 등을 지적했다. 전산상 특정되는 사례로 총 24명(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방사선사)의 사건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의료인들은 정지되지 않은 의료면허를 갖고 계속 돈을 벌었다. 진단서를 허위 작성·발급하고도, 의료면허 정지 처분을 피해 현재 월 1억 1290만 원을 버는 의사도 있다.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산모를 죽게 만든 의사 역시 의료면허 정지 처분을 피하고 현재 월 1200만 원을 벌고 있다. 여기엔 건강보험공단이 지급한 요양급여비와 환자들이 낸 병원비가 일부 포함된다. 복지부의 방치로 인해 의료면허가 정지되지 않아 나랏돈에 손실이 생기는 상황이다.
보건복지부도 이 문제를 책임지지 않고 있다. 감사원은 2023년 정기 감사 이후 복지부 소속 직원 2명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다. 면허 취소 및 정지 기간 중 의료행위를 한 의료인에 대한 관리·감독을 태만히 한 걸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복지부는 책임자들을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원에 재심의를 청구했다. 복지부는 "향후 감사원의 재심의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해 나갈 계획"이라고 기자에게 밝혔다.
범죄를 저지른 의료인 등에게 '불멸의 의료면허'를 만들어주는 문제를 해결할 제도적 방법은 없을까. 우선, 있는 규정을 먼저 잘 지켜야 한다. 검찰의 경우 대검찰청 예규로, 복지부의 경우 의료법으로 이미 원칙을 못 박아 놓았다.
대검은 '인·허가 관련 범죄통보지침'에서 검찰의 통보 의무를 세세하게 밝혀 놨다. 재판결과를 통보해 행정처분을 할 수 있는 범죄의 종류, 주무관청 통보 절차, 전자문서 관리 방법 등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의료법에선 의료면허 자격정지 대상 사유를 10호로 나눠 설명해 놨다. 위반 사항에 따른 행정처분 기준도 복지부령(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으로 자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기소유예 및 선고유예에 따른 감경 기준도 명시돼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검찰과 복지부는 이미 있는 규정도 잘 지키지 않았다. 행정 처리에는 구멍이 많았고, 미흡한 후속 조치에 대한 관리나 감시는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담당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과정이 앞서야 하는 이유다.
이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묻기 위해선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선임전문연구위원으로 16년 동안 근무한 김준래 변호사는 "현재 검찰의 재판결과 통보 의무는 명쾌하게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대검찰청 예규 근거로 처리하고 있다"면서 "대검의 통보 의무가 법률의 하위 규범에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관련 기관의 책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선 ‘의료인 등이 의료법 위반으로 금고형 이상이 확정될 경우 그때부터 즉시 의료면허가 취소된다’는 내용의 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국회에서 이뤄진 의료면허 행정처분에 대한 논의는 주로 '처분 대상이 되는 범죄의 범위'를 중심으로 이뤄져왔다. 최근 의료법 개정을 통해 의료면허 취소 대상자가 '의료사고를 제외한 모든 범죄'로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받은 사람으로 강화된 것도 그런 흐름에 있다.
하지만 아직 의료인에 대한 행정처분의 '과정' 문제를 다룬 법은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의료면허 취소 및 정지에 대한 행정처분 과정 및 절차, 책임자 징계 등이 포함된 법안은 21대 국회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검찰과 복지부 모두 현행 제도 아래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25일 <셜록>은 검사 44명과 복지부 담당자들을 국민권익위원회(이하 권익위)에 부패행위로 신고했다. <셜록>은 이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아서 의료면허 행정처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사건들을 모두 확인해 리스트를 공개한 바 있다. (☞ 관련기사 : '검사가 살려준 의사들' 47건 리스트, 모두 공개합니다) (☞ 관련기사 : 의료법 위반해도 의료면허 유지로 '월 1억' 수입? "복지부가 살려준 의료인들")
부패행위는 공공기관의 예산집행, 재산관리, 계약과정 등에서 공공기관에 재산상 손해를 가하는 행위(부패방지권익위법 제2조 제4호 나목) 등을 말한다.
<셜록>은 검사들이 재판결과를 통보하지 않은 행위와 복지부의 행정처분 미이행으로 인해 해당 의료인 등의 의료면허가 취소 혹은 정지되지 않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의료인 등에게 지급하는 요양급여비 등에서 손실이 발생했고, 이는 공공기관에 재산상 손해를 가하는 부패행위라고 봤다.
권익위는 부패행위 신고가 접수되면, 사실확인 절차를 거쳐 조사가 필요한 경우 조사·수사기관에 이첩한다.
한편, <셜록>은 검사들을 상대로 형사고발도 했다. 지난해 12월, 의료면허 취소 위기의 의료인들을 복지부에 통보하지 않은 검사 44명을 직무유기 혐의(형법 122조)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했다. (☞ 관련기사 : "무능인가 뒷거래인가" … 검사 44명 공수처에 고발)
※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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