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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의사'가 힘쓸 틈없이 무너진 관동군, '최후 마루타' 40명 독가스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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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의사'가 힘쓸 틈없이 무너진 관동군, '최후 마루타' 40명 독가스에 죽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56]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⑤

1945년 3월, 도쿄 육군군의학교에 있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는 이례적으로 육군 참모본부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참모회의에서는 독성이 강해 치사율이 높은 페스트 균을 주무기로 한 세균전이 논의했다. 그 바로 뒤 이시이는 중장 승진과 더불어 다시 731부대장으로 복귀했다. 1942년 8월1일 1군 군의부장으로 떠났다가 도쿄 군의학교를 거쳐 다시 731부대로 돌아갔으니, 거의 2년 반 만의 복귀였다.

'악마의 의사' 이시이 시로를 (군의관으로서는 최고 계급인) 중장으로 승진시키면서 다시 731부대를 맡긴 이유는 뻔했다. 국제사회에서 전쟁범죄로 비난받기 마련인 세균전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시이가 도쿄 참모회의에 불려간 시점은 10만의 희생자를 낳았던 미군의 도쿄대공습(1945년 3월10일) 직후였다. 적국을 향한 적개심이 넘쳐나는 가운데 일본 육군 강경파들은 세균무기 살포라는 벼랑끝 전술로 전세를 뒤집어보려는 헛된 기대감을 품었다.

이시이 시로가 숱한 '마루타'를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키며 개발해온 세균무기를 실전에 쓰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패전 뒤 소련군에 붙잡혀 있다가 하바롭스크 전범재판(1949년) 피고석에 섰던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1881-1965)가 남긴 진술에서도 드러난다(야마다는 8월15일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 방송을 들었지만 공식 항복명령서가 올 때까지 버텼다. 8월17일 일본 왕족 한 명이 항복명령서를 들고 관동군사령부로 가서 항복명령서를 건네자, 8월19일 공식 항복했다).

"1945년 봄 세균무기의 가장 효과적인 사용법 연구가 완료된 뒤, 육군성으로부터 세균무기를 증산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나는 그 통지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조치를 취했다" (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167쪽).

야마다 사령관이 말하는 '세균무기의 가장 효과적인 사용법'이란 벼룩이 든 도자기 폭탄을 비롯한 '이시이식' 세균폭탄의 사용, 비행기를 이용한 페스트균 살포, 지상에서 비밀리에 세균을 뿌리는 모략 작전 등을 가리킨다(야마다는 자신의 지휘권 아래 있는 731부대가 세균전을 준비한 책임을 물어 25년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은 뒤, 1956년 일·소 국교회복이 이뤄지면서 풀려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시이, "세균병기 포함한 최후의 수단 써야"

전세를 뒤집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세균전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일본 육군의 결정은 '악마의 의사' 이시이의 존재감을 키웠다. 한편으로 이시이는 주군인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심과 사명감도 새삼 다졌을 것이다. 그는 731부대장 재부임 한 달 뒤인 1945년 4월 731부대 본부에서 각 지부장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전세를 호전시키려면 세균병기를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부하 니시 토시히데(西俊英)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니시는 731부대 훈련교육부장 겸 슨우(孫吳) 지역의 673지대장(군의중령)을 지냈고, 세균무기를 제조하거나 마루타를 놓고 세균 생체실험을 했던 전쟁범죄자였다. 그는 하바롭스크 전범재판 법정에서 이렇게 이시이의 발언을 옮겼다.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천하를 가르는 대격전에 예상된다. 그 때는 일본 본토로 미국의 상륙작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731부대)는 가장 면밀(綿密)하게 미국과 소련의 동맹에 맞서 싸우는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전황은 악화되고 있다. 우리는 올해 봄이 끝날 때쯤이나 여름에 전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세균병기를 포함한 최후의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靑木富貴子, 141-142쪽).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의 또 다른 피고 구츠다(崛田)도 위의 이시이의 발언이 사실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덧붙여 구츠다는 그 무렵 쥐를 비롯한 설치류 번식이 급격히 늘어났고, 벼룩의 대량 증식을 꾀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구츠다가 옮긴 이시이의 범죄적 발언.

"소련의 전쟁에 대비해 731부대는 온 힘을 다해 세균과 벼룩, 그리고 쥐의 생산을 확대해야 한다. 태평양전쟁의 불리한 국면을 바로 세우기 위해 대량의 세균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8월 말까지는 대량의 쥐를 잡는 임무를 마치는 동시에 1~2톤의 벼룩을 준비해야 한다"(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265쪽).

만주에서는 대대적인 쥐잡기 소동이 벌어졌다. 목표는 1945년 9월말까지 300만 마리였다. 관동군은 중국 농민들은 물론 학생들까지 강제로 쥐를 잡으라고 몰아세웠다. 병사들도 군복을 벗고 평복 차림으로 군용 트럭에 쥐틀을 싣고 다니며 쥐잡이에 나섰다(대동아공영권의 맹주였다는 자부심을 지닌 오늘의 일본 극우들조차 '그때의 모습을 돌아보면 부끄럽다'고 말할 듯하다. '한때 만주를 호령하던 100만 관동군의 위용은 간 데 없는 말기적 모습이 아닌가'라며 혀를 찰 것 같다).

▲ 1945년 8월9일 소련군이 일본 관동군 진지 쪽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관동군은 60만의 포로를 남기며 궤멸됐다. ⓒ주한러시아대사관

'세균무기야말로 기사회생의 비밀병기'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잇단 생체실험 끝에 이시이는 페스트 균이 다른 균(콜레라, 장티푸스)보다 독성이 강해 치사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페스트에 감염된 쥐벼룩을 이용한 도자기 폭탄을 만들려 했다(연재 55 참조). 731부대 본부와 여러 지부는 식당이나 빈 건물에다 사육장을 만들어 놓고 쥐를 대량 번식시키는 방법도 썼다.

아울러 페스트균 폭탄에 쓰일 벼룩도 번식시켰다. 벼룩을 키우는 배양기가 모자라면 석유통에다 벼룩을 담아 키웠다. 이 모든 소동이 페스트 세균폭탄을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시이는 관동군이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해 만주에서 철수할 경우, 적군(중국군, 소련군, 조선독립군)의 근거지에 벼룩을 대량 살포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사쿠라 특공대'란 이름의 별동대를 만들었다.

전황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가운데 일본군 대본영, 특히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강경파들은 '세균무기야말로 기사회생의 비밀병기'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위에서 봤듯이, 이시이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731부대로 돌려보냈던 것도 그런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731부대는 그런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 소련군에 맞서 이렇다 할 세균전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철수해야 했다. 이시이로서도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소련군의 군사 개입이 벌어지더라도 9월쯤에나 이뤄지리라는 일본군의 예상이 깨졌고, 소련군의 진공 속도가 너무 빨랐다. 뒤집어 보면, 관동군이 너무 무기력하게 소련군에 무너졌기 때문에, 이시이의 731부대가 세균작전을 펼 틈이 없었다.

관동군 포로 60만, 붉은 군대의 압도적 승리

일본과 소련은 1941년 4월13일 일·소 중립조약을 맺었었다. 미국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여긴 일본이 북방쪽 안보 걱정을 덜려는 심산에서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 관동군의 위협을 신경쓰지 않고 독일과의 전쟁에 전념할 수 있어 좋았다. 일반적으로 어느 조약이든 서로에게 이득이 될 때는 지켜지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깨지기 마련이다. 소련이 1945년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중립조약은 깨졌다.

8월9일 새벽 소련군은 병력 150만, 탱크 5500대, 비행기 5000대를 동원해 그야말로 물밀 듯이 관동군을 밀어붙였다. 지휘관은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대장이었다.관동군의 주력은 중국 본토로 또는 태평양전선과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해 많이 빠져나갔기에, 러시아군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소련군 침공 열흘 뒤(8월19일)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은 소련군에게 공식 항복했다. 관동군 71만 병력 가운데 전사자는 8만에 이르렀고, 시베리아로 끌려간 포로 60만 가운데 6만4000명이 영양실조, 질병 등으로 죽었다(호사카 마샤야스, <쇼와 육군>, 글항아리, 2016, 1055쪽 참조).

물론 소련군도 손실이 없진 않았다(소련군 1만2301명, 소련군과 함께 관동군을 공격했던 몽골인민공화국 군인 72명). 이런 손실은 전체 작전 참가병력의 0.7%로, 독일군과 맞서 싸웠던 유럽전선에서 소련군이 입었던 손실(전사 및 실종 760만, 포로 520만, 수감 중 사망포로 260만)에 견주어보면 '거의 손실이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붉은 군대의 압도적 승리였다(폴 콜리어, <제2차 세계대전>, 플래닛미디어, 2008, 689쪽 참조).

▲ 731부대원들은 서둘러 도망치면서 ‘마루타’들을 죽이고 건물을 무너트려 전쟁범죄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폭약으로 파괴된 채 남은 보일러실의 굴뚝 2개. ⓒ위키미디어

"731 드러나면 히로히토에게 누 된다"

소련군의 기습공격으로 관동군이 급속하게 무너지면서 731부대의 전쟁범죄 증거들을 없애고 도망치기에 바쁘게 됐다. 소련군의 침공 당일(8월9일)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관동군사령부에게 731부대를 다른 부대들보다 앞당겨 철수시키라는 전보를 보냈다. 관동군사령부는 이시이에게 '직접 사령부에 와서 명령을 접수하라'고 알렸다.

그때 이시이는 본부(하얼빈 외곽의 핑팡 지역)에 없었다. 세균무기로 갖고 사쿠라 특공대와 함께 지린성 통화(通化)지역에 가 있었다. 이시이의 부관이 급히 괴뢰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으로 달려가 받아본 명령 문안은 '731부대는 정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잡히지 말고 서둘러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도쿄의 일본 육군 지도부가 731부대의 전쟁범죄가 문제될 것을 얼마나 걱정했을까를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아사에다 시게하루(朝枝繁春) 육군 참모와 관련된 이야기다. 아사에다 참모가 훗날 남긴 회고담에 따르면, 8월9일 관동군으로부터 소련군 침공 소식을 듣자말자, 731부대를 떠올렸다. '731부대의 세균전 실태가 드러나면 히로히토 국왕에게 누가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참모들과 상의 끝에 육군 참모총장의 명의로 이시이 시로에게 신징 군용비행장에서 대기하라는 전보를 쳤다.

참모총장 훈령, "증거 다 없애고 빠져나오라"

8월10일(일설에는 8월11일)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비행장 격납고에서 이시이-아사에다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시이를 보자말자 아사에다의 첫마디는 '마루타는 몇 명 남았는가요'였다. 1시간 가량의 만남에서 아사에다는 731부대 철수와 관련한 육군 참모총장의 훈령을 이시이에게 전했다.

[1. 귀부대는 전면적으로 해소(解消)하고, 부대원은 한시라도 빨리 일본 본토로 귀국시키고, 일체의 증거물건은 영구히 지구상에서 없앨 것. 2. 이를 위해 공병 1개 중대와 폭약 5톤을 귀부대에 배속하도록 이미 수배를 마친 상태이므로, 귀부대의 제반 설비를 폭파할 것. 3. 건물 안의 마루타는 전동기로 죽인 뒤 귀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하고, 그 재를 송화강에다 흘려보낼 것. 4. 세균학 박사학위를 지닌 귀부대 군의관 53명은 귀부대의 군용기로 일본으로 곧바로 송환할 것. 그 밖의 직원과 부녀자, 아이들은 만주철도로 다렌(大連)까지 먼저 수송한 다음 내지(內地, 일본)로 송환할 것](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173-174쪽).

위 훈령문을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731부대의 전쟁범죄 증거들을 모두 없애고 빨리 그곳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이다. 이시이로선 그동안 애써 모은 세균전 자료를 폐기하라는 명령을 따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얘기를 마치고 돌아서던 아사에다를 불러 세우고 이렇게 물었다. "(세균전) 연구 자료만이라도 갖고 돌아가면 안 될까요?" 아사에다의 회고담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해 "아니, 안 돼!"라는 반말 투의 단호한 대꾸를 했다고 한다.

(이시이는 당시 53세, 아사에다는 33살로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났고 계급 차이도 컸다. '일체의 증거를 없애라'는 참모총장의 훈령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느라 말이 저도 모르게 말이 거칠어졌을 것이다. 한편으로, 아사에다의 언행에서 당시 엘리트 의식으로 우쭐해 거만을 떨었던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기세등등했던 분위기가 묻어난다. 하지만 이시이는 훈령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독립투사를 비롯한 많은 '마루타'를 희생시키며 만들어낸 피 묻은 세균전 자료를 더러운 거래수단으로 썼다).

▲ 731부대가 도망치면서 버리고 간 도자기 세균폭탄 파편들. ⓒ한민족문화교류협의회

칼 빼든 이시이, "731 비밀, 무덤까지 가져가라"

하얼빈 외곽의 731부대 본부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일본군 병사는 선임들로부터 '무엇이나 함부로 엿보거나, 말하거나, 엿들으면 안 된다'는 세 가지 부대훈(訓)을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핑팡으로 돌아온 이시이는 곧 모든 부대원들을 불러 모아놓고 철수 방침을 알리며 이렇게 큰소리로 말했다.

"731의 비밀을 어디까지나 지켜주기 바란다. 만약 군사기밀을 누설한 자가 있다면, 이 이시이가 그 비밀을 지껄인 자를 어디까지든 추적할 것이다. 첫째,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731부대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숨길 것이고, 둘째, 어떠한 공직도 맡지 말며, 셋째, 대원들끼리의 연락도 엄금한다. 731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라"(靑木富貴子, 176-177쪽).

일본 군도를 빼들어 흔들며 이시이는 (전쟁범죄로 얼룩진) 731부대의 기밀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이 외쳤다. 그런 살벌한 이시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부대원들은 귀기(鬼氣)를 느꼈다고 한다.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일본으로 돌아가면 731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실제로 일부 대원은 이시이 부대장의 말대로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고 군인 연금조차 신청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다).

세 곳의 소각로에서 타오르는 연기

흔히 731부대를 '731 세균부대'라 일컫는다. 731부대의 죄악상에서 페스트를 비롯한 세균의 비중이 워낙 크기에 그렇게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가 세균무기 개발에 미친 듯이 관심을 쏟았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균 하나에 매달린 것은 아니다. 세균실험 말고도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여러 생체실험을 했다. 따라서 '731부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731부대는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처럼 독가스 무기를 쓸 요량으로 독가스 실험도 했다. 이를 위해 지은 건물은 바로 옆의 가스저장실과 함께 (둘 다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로) 지금도 남아있다. 독가스 실험장으로 내몰린 '마루타'들은 이미 세균실험을 비롯한 여러 가학적인 생체실험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기진맥진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독가스 실험장은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이었다. 그렇게 죽은 이들은 소각로로 보내졌다.

731부대는 모두 세 곳의 소각로를 운용했다. 나치 독일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독가스 실을 운용하면서 '최종 해법'(Endlösung)이란 용어를 썼다. 그 단어를 여기에 빌리자면, 731부대가 세 곳의 소각로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최종 처리'해야 할 '마루타'와 세균무기 개발과정에서 태워 없애야 할 각종 생체실험 장비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련군의 침공을 맞아 731부대가 서둘러 철수하는 마지막 날, 소각로 굴뚝의 시커먼 연기가 더욱 세차게 솟아올랐다. 평소라면 소각로는 생체실험 과정에서 생기는 피 묻은 옷가지 또는 세균에 오염된 장갑이나 실험 장비들, 그리고 죽은 마루타들을 태우는 용도로 썼다. 그렇지만 소련군을 피해 도망치는 무렵엔 다른 것들이 태워졌다. 생체실험과 관련된 각종 표본과 세균 배양 도구들, 그리고 엄청난 양의 각종 문서들이 소각로의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최후의 마루타', 독가스로 죽여 불태워

731부대의 7동과 8동 감옥에 갇혀 있던 '최후의 마루타' 숫자는 40명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그 '마루타'들은 어떻게 '최종 처리'됐을까. 일본 육군 참모총장이 731부대 철수와 관련해 전보로 보낸 훈령에는 '마루타는 전동기로 죽인 뒤 귀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하고, 그 재를 송화강에다 흘려보낼 것'으로 쓰여 있었다. '전동기'라면 전기충격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실제로는 독가스(청산액화 가스)로 죽였다.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는 <悪魔の飽食>(角川文庫, 1983)에서 그때의 참상을 지켜봤던 731부대원의 증언을 이렇게 옮겼다.

[마루타 가운데 몇몇은 독가스로는 아직 죽지 못해 강철로 된 문을 두들기며 끔찍한 소리를 내고 목을 쥐어뜯으면서 몸부림쳤다. 죽은 마루타들의 다리를 잡아끌어 7동 옆에 파두었던 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가솔린과 중유를 퍼붓고는 불을 붙였다. 8월11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루타의 시체는 좀처럼 타지 않았고 철수는 시각을 다투었다. 도망치기에 정신이 없었기에 시체 소각작업 중 그대로 흙으로 덮어버렸다](森村誠一, <악마의 731부대와 마루타>, 고려문학사, 1989, 128쪽).

'마루타'들을 모두 죽이고 불태우긴 했지만, 서둘러 도망치느라 그 재를 송화강에 뿌리라는 훈령을 따르진 않았다. 곧이어 부대 건물들이 폭파돼 무너졌다. 의심이 많고 꼼꼼한 성격을 지닌 이시이는 약제 담당 소좌가 모는 경비행기에 올라타 731부대의 파괴된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사진에 담았다. 그런 뒤 다렌의 731부대 출장소에 들러 필름 현상을 맡겼다.

오늘날 전해지는 731부대의 흑백 기록 사진들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노라면, 80여 년 전 그곳에서 가학적인 생체실험을 받다 숨져간 '마루타' 원혼들의 눈물이 사진에서 배어나오는 듯하다. 워낙 철근 콘크리트 두께가 두꺼워 폭파되지 않은 동력반 보일러실의 거대한 굴뚝 2개도 눈길을 끈다. 8월17일 소련군이 핑팡의 731부대를 접수했을 때 남은 것은 파괴된 건물 잔해였다. 무너진 건물 사이로 페스트 벼룩을 지닌 쥐들이 떼 지어 다닐 뿐이었다(일본군이 풀어놓고 간 페스트 쥐는 큰 피해를 남겼다. 다음 주 글에서 살펴본다).

▲ 생체실험용으로 쓸 '마루타'들을 가두어 두었던 731부대 감옥. 731부대가 막판에 폭약으로 파괴했다. ⓒ한민족문화교류협의회

피묻은 세균자료, 부산항에서 옮겨 은닉

바로 그 시각에 이시이는 괴뢰만주국 수도 신징의 기차역 귀빈실에서 특별열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세균전 자료들을 열차에 싣고 평양-경성을 거쳐 부산으로 갔다. 상부의 훈령을 어기면서 챙긴 '피묻은 세균자료'는 1945년 8월22일 부산항 부두에서 쿠코토부키마루(德壽丸)란 이름의 화물선에 실려 그 다음날 현해탄을 건넜고, 그 뒤 비밀장소에 감춰졌다.

731부대는 귀환 과정에서 매우 이례적인 특혜를 받았다. 731부대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핑팡역에서 다렌 직통의 특별 열차를 출발시켰다. 당시 만주에 있던 60만 명가량의 일본 민간인들이 귀국 교통편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고, 엄청난 고생길이었다. 가는 길목마다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사망자들도 생겨났다. 부산역으로 가는 4개의 열차에 나눠 탄 731부대원과 그 가족들도 차창 밖의 따가운 시선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언제 돌멩이가 차창을 깨고 날아들지 몰랐다. 열차를 움직이던 중국인 기관사가 사라지는 바람에 열차가 하루 종일 움직이지 못하기도 했다.

도쿄에서 우메즈 육참총장 만나다

이시이가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달아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8월22일부터 26일 사이에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쿄에 가까운 아쓰기(厚木) 또는 타치카와(立川)에 내린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8월26일 도쿄 육군성 의무국(醫務局)에 들렀다가 신주쿠 지역에 있는 육군성과 육군참모본부를 방문했다는 사실이다(그 무렵 육군성과 육군참모본부는 오늘날 방위성으로 쓰이는 건물 안에 함께 있었다).

이시이가 그곳을 갔을 때는 미군 점령군이 오기 전에 기밀서류들을 태우느라 바빴다. 건물 전체가 연기에 쌓여 숨쉬기가 불편할 정도였다(1500명 규모의 미군 선발대는 8월28일 도착했고, 맥아더 장군은 8월30일 아쓰기 공항을 통해 들어왔다). 그곳에서 이시이는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대장을 만나 귀국 보고를 했다.

우메즈는 관동군사령관 출신으로 만주에서부터 이시이와 가까운 사이였다. '미군이 오면 세균전으로 공격하겠다'는 이시이의 말에 우메즈가 말렸다는 얘기도 나돌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우메즈는 1945년 9월2일 도쿄만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군부를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1948년 12월 도쿄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받은 바로 뒤인 1949년1월 대장암으로 옥사했다).

이시이는 우메즈에게 '세균전 자료를 폐기하라'는 참모총장의 훈령을 어기고 어딘가에 감춰두었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그 자료는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 결국 그의 생명줄이 됐다. 하지만 소련 국경에 가까운 곳에 배치됐던 일부 731부대원들은 미처 도망치지 못했고, 관동군 고급장교들과 함께 전범재판에 붙여졌다. 이들에겐 10년에서 25년 사이의 징역형, 강제노동형이 주어졌다(전범재판에 대해선 다음 주에 좀 더 살펴봄).

731부대의 수괴 이시이 시로가 소련군에 붙잡혔다면 어땠을까. 미국의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을 거듭 빌리자면, 사람들은 그의 죄값이 워낙 커 사형언도로도 값이 싸다고 여겼을 것이다. 다음 주엔 소련과 중국에서 벌어졌던 세균전 전범재판을 살펴보고, 아울러 731부대가 떠나면서 풀어놓은 쥐벼룩이 일으킨 페스트 전염병 문제, 독가스를 비롯해 일본군이 버리고 간 화학무기 엄폐물 문제와 아울러 '마루타'로 죽은 이들이 3000명뿐인가를 따져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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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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