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의료 분야 의사인력부족이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많은 대학병원들이 소아과 전공의 부족으로 소아응급실 운영을 중단하고 있고 젊은 의사들은 소아과, 외과, 흉부외과 등 필수 의료분야 전공을 기피한다. 힘들더라도 필수의료분야에서 국민건강을 지킨다는 의료인으로서 사명감과 보람을 추구하기보단, 편하고 소득이 높은 분야로 쏠림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우리사회는 역세권 상가마다 병원 간판과 광고판으로 넘쳐난다. 의료기관들은 비만, 보톡스, 도수치료, 비수술치료 등 저마다의 진료분야를 내걸고 경쟁적으로 환자를 호객한다.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은 더 심각하다. 특정 질병이나 치료방법을 검색하면 수십개의 병원명이 순서대로 등장한다. 광고비를 많이 낸 병원일수록 검색 상위 순위에 랭킹된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희한한 풍경이다.
우리 주변엔 넘쳐나는게 동네의원들이고 넘쳐나는게 척추 전문병원들이고, 넘쳐나는게 요양병원들이다. 반면, 나의 건강을 지속적이고 포괄적으로 다루고 관리해주는 주치의 같은 동네의사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동네의원이든 종합병원이든 환자의 궁금한 점을 들어주고 답변해주는 의사는 거의 없다. 주변에 많은 병원들이 있지만, 정작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노인을 방문하여 진료하는 의사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 의사수는 OECD 대비 턱없이 부족하고, 인구고령화에 따른 의료수요의 증가를 감당하기엔 크게 부족하므로 의사수 확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미 사회적 합의 수준에 이르렀다. 의사수 확대는 의사들을 제외하면 모두 찬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의사집단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의사수 확대를 쉽게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정부도 연간 400명, 10년간 4000명의 의사수 확대를 추진했지만,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가로막혔다가 지금 정부도 여론 전환용으로 갑자기 의사수 확대를 내걸고 추진중이지만, 국민보단 의사 눈치를 더 보고 있는 실정이다.
환자가 아닌 의료공급자 중심의 의료체계
왜 이런 의료현실이 나타나는 걸까. 이것은 우리 사회의 의료체계가 잘못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국민건강과 환자의 필요를 해결할 목적으로 조직되고 공급되는 의료체계가 아니다.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환자와 국민의 이익(필요)이 아니라, 의료공급자의 이익(필요)을 우선하는 의료체계로 조직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우리 의료 사회에서 드러나고 있는 현상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근본적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우리나라 의료공급체계는 과잉공급과 과소공급이 혼재되어 있다. 공급자의 이익에 필요한 영역은 과잉공급된 반면, 공급자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의료공급 영역은 과소공급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용, 성형 등 분야는 넘치는데, 국민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필수 중증의료 분야는 부족하다.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는 부족하지만, 동네의원의 의사수는 넘쳐난다. 병상수는 OECD 최고수준이지만, 의사수는 최하수준이다. 중소병원, 요양병원은 넘쳐나지만, 정작 규모있는 종합병원은 충분하지 않다. MRI, CT 등 고가 검사는 과잉이지만, 의사-환자 대면시간은 3분진료로 대변되는 과소진료다. 특정 분야만 진료하는 분과전문의는 넘치지만, 포괄적인 일차진료를 담당하는 일차의료전문의는 부족하다. 이러한 불균형이 초래된 이유는 의료공급의 모든 영역이 국민 건강 또는 의료적 필요라는 시각하에서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의료 공급자의 선호 내지 필요에 의해서 의료서비스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료공급자는 국가의 보건의료정책에도 큰 영향력을 미쳐, 국민건강보다는 의료공급자의 이익을 지키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국민의 의료수요 증가에 맞춰 의사수 확대가 필요한데도 정부가 지금껏 추진하지 못한 이유 역시 그러한 의료공급자의 압력이 작용해서이다. 국민건강과 관련한 의료정책에 의료공급자라는 이익단체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의료체계 설계의 잘못된 '게임의 룰' 때문
이와 같은 공급자중심의 의료체계가 형성된 이유를 공급자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의료공급자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책임을 지게 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문제의 근원은 의료공급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사들을 포함한 의료인, 의료기관들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는 보건의료체계의 '게임의 룰'에 있다. 의료공급자들은 너무도 똑똑하게 그 게임의 룰에 적응해 왔다. 잘못된 의료체계에 대한 책임은 의료공급자가 아니라 정부의 잘못된 의료체계에 있다. 대표적으로 잘못된 '게임의 룰'에는 행위별수가제, 비급여제도, 공공의료기관의 부족 등이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현재 게임의 룰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제도가 '행위별수가제'이다. 수가제란 의료공급자가 환자에게 의료서비스 제공하고 그 대가로 비용을 지불받는 방식을 말하는데, 다양한 방식이 있다. 그중 행위별수가제는 제공되는 의료서비스 양에 보상해주는 제도다. 의료공급자는 의료서비스 양을 늘릴수록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으므로 서비스 양을 늘린다. 건강보험공단은 서비스 양을 평가할 뿐, 서비스의 가치는 평가하지 않는다. 의료공급자는 제공되는 의료서비스의 가치와 무관하게 양이 많을수록 보상을 받게 되므로, 과잉진료를 남발할 수밖에 없다. 가치보다 양에 치중할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이 비급여 제도이다. 보통 비급여는 의학적 효과와 비용 효과성이 증명되지 않은 행위나 치료방법, 약제 등이다. 잘 알려진 비급여가 MRI/초음파, 도수치료, 다초점 수정체, 영양수액, 예방접종 등이다. 최근 MRI/초음파는 보험급여가 크게 확대되었지만, 아직 근골격계 질환 등에는 비급여로 남아있다. 급여항목과 달리 비급여는 건강보험공단이 가격규제를 하지 않고, 의료공급자가 자유롭게 가격을 결정한다. 비급여 가격이 통제받지 않다보니 그 가치보다 훨씬 높게 가격이 책정되고, 그만큼 수익이 많이 남으므로, 의료공급자는 비급여를 남발한다. 더욱이 이 비급여는 실손의료보험이 보상을 해주므로, 높은 가격과 비급여 강매에도 환자의 거부감은 덜하다. 하지만, 가입자의 부담은 사라지지 않는다. 실손보험료로 전가될 뿐이다.
그러다보니 의료기관들은 앞다퉈 비급여를 늘린다. 2021년 건강보험공단의 진료비실태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 의료기관 평균 비급여 비중은 15.6%이나 기관별로 차이가 크다. 종합병원은 8.5%이지만, 병원급은 무려 29.6%에 이른다. 동네의원도 25%이다. 의료기관 중에는 비급여 비중이 50%를 넘는 의료기관도 상당하다.
행위별수가제, 비급여, 공공병원 부족이 의료체계의 문제 유발하는 근원
의료의 가치보다 양을 보상하는 행위별수가제와 통제받지 않는 비급여가 우리의 의료체계의 여러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본적 원인이다.
3분 진료, 5분 진료가 만연한 이유가 뭘까? 왜 다른 나라처럼 15분 진료, 20분 진료가 이뤄지지 못할까? 현재 진찰료 수가는 1분 진료해도, 10분 진료해도, 심지어 1시간 동안 환자 진료를 해도 의원급 기준으로 15,000원이다. 충분히 투여한 시간을 보상받지 못하므로 10분 이상 진료할 유인이 없다. 이러니 진료 시간을 충분히 두고 환자를 진찰하고 설명하고 교육하고 궁금한 점까지 해결해주는 진료는 불가능하다.
의사들은 무엇이 가치있는 의료서비스인지를 잘 알지만, 정작 가치있는 서비스는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치가 부족해도 높은 가격을 보상받을 수 있는 진료에 매진하게 된다. 의사들이 필수의료 분야 전공을 외면하는 것도, 동네 주치의가 부족한 것도, 3분 진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왕진 진료가 안되는 것도, 잘못된 게임의 룰에서 기인한다.
한편, 좋은 공공병원을 확대하지 못한 것도 잘못된 게임의 룰을 강화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공공의료기관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절반 이상이고 심지어 미국조차 30% 수준이지만, 우리나라의 공공의료기관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조차 국가에서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 공공병원에 대한 국민적 인식은 그리 좋지 못하다. 공공병원에서 환자중심의 좋은 의료서비스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무엇이 좋은 의료인지 비교할 수가 없다. 우선 정부가 공공병원을 많이 설립하여 지역주민들이 손쉽게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공공병원은 과잉진료나 비급여 항목을 최소화 하여야 한다. 이러한 운영방식이야말로 잘못된 게임의 룰에 의해 작동되는 의료체계에 대한 견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공공병원은 정부의 외면으로 몰락 직전이다. 불과 2~3년전 코로나 시기 공공병원의 필요성을 우린 벌써 잊어버렸다.
환자중심, 가치중심의 의료개혁이 필요
향후 인구의 고령화로 인한 의료비는 급증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불가피하게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고 감당해야 할 미래이다. 지금의 문제투성이 의료체계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 과잉진료, 비급여 남발, 의사수 부족, 필수의료 공백, 과잉병상 공급 등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실타래 같은 해결과제들을 하나 하나 해결해야 한다. 우리 의료체계에서 비효율을 걷어내고 가치중심으로, 환자중심으로 의료체계를 재설계하고 재조직해야 한다.
게임의 룰을 바꾸면 된다. 게임의 룰의 핵심인 행위별수가제를 가치기반 지불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양이 아닌 가치에 보상해야 한다. 의료공급자가 수익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의료서비스 양은 줄이고 가치있는 의료서비스에 더 많은 보상을 하는 방식으로 수가제도를 설계하면 된다. 서구유럽이나 미국은 이미 10여년전부터 행위별수가제 아닌 가치기반으로, 의료의 질을 기반으로 의료공급자에게 보상하는 방식을 시도해왔고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다.
또한 비급여와 비급여의 팽창을 유발하는 실손의료보험을 규제해야 한다. 문재인정부 시절 모든 의학적 비급여를 급여화하고 비급여 발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실손의료보험 규제도 보험업계의 반대에 굴복해 실패했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여기에 더더욱 관심이 없다. 큰 일이다.
공공의료의 확대가 필요하다. 안타까운 것이 윤석열 정부들이 공공의료 정책이 크게 후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정부의 공공의료 강화, 공공병원 확대 계획은 대부분 백지화되고 있고, 지방 공공병원에 대한 지원은 축소하여 코로나 이후 공공병원은 풍전등화에 처해있다.
지금의 잘못된 게임의 룰을 계속 유지한다면, 우리 사회는 향후 다가올 의료비 폭등이라는 사회적 위험을 무방비로 맞이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행위별수가제 타파, 비급여 규제, 공공병원 확대에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