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위원장의 세 가지 포기 선언
2024년 1월 개최된 북한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김정은 국무 위원장은 근 80년간 지속되어온 남북관계사에 종언을 고하고, 한반도 두 국가론에 기초한 대남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선언했다. 또한 김 위원장은 북한 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할 것을 지시했다. 통일, 평화, 민족 개념의 포기선언과 다를 바 없다.
그에 앞서 작년 말 노동당 전원회의 제8기 제9차 전원회의를 개최한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에 기초한 북한의 고려연방제와 상반되는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 것들"과는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남한을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라고도 했다.
이어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가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니라고 규정했다. 올해 1월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는 북한 헌법에 규정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들이 삭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 주석 이래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7.4 공동성명 기본정신과 김정일 위원장 시기 채택한 '조국통일 3대 헌장'의 폐기를 지시한 셈이다. 기존 연방제 방식의 통일에 대한 명백한 포기선언이다.
최고인민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불변의 주적"으로 선언하고,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완전한 두 교전국관계"라고 규정했다.
이에 앞서 당 전원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전쟁'이라는 말이 이미 '현실적인 실체'로 다가오고 있다며, "유사시 핵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하여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할 것을 주문했다.
올해 1월 2일 담화에서 김여정 부부장은 '평화통일'을 환상으로 규정하며, "우리 군대의 군사 활동에 다시 날개가 달리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남북관계가 한국전쟁 시기로 돌아간 셈이며, 남북 간에 더 이상 평화공존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최고인민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우리를 향해 "동족의식이 거세된 대한민국족속들"이라고 지칭하며 남북관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동족, 동질관계로서의 북·남조선', '우리 민족끼리'와 같은 표현을 과거시대의 잔여물이라며 이를 처리하기 위한 실무대책을 지시했다.
또한 김 위원장은 북한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삼천리금수강산', '8천만 겨레'와 같이 남북을 '동족으로 오도하는 잔재적인 낱말'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헌법에 명기하는 것이 옳다고 언급했다. 남북관계를 민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포기한 셈이다.
한반도 두 국가론의 위험성
김 위원장의 한반도 두 국가론은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2015년 8월 15일 북한은 표준시를 30분 늦춰 동경 127도 30분으로 변경하고 이를 '평양시간'으로 명명한 바 있다. 시간은 모든 행위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다른 길을 이미 예고한 셈이다.
2021년 1월 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개정된 당규약에 이미 통일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두 삭제된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2022년 1월 21일자 노동신문에서는 김일성 주석 출생 110돌과 김정일 위원장 출생 80돌 경축을 기원하며, '김일성민족, 김정일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2022년 7월 북한이 주장하는 전승절 기념연설을 통해 김 위원장은 갓 출범한 윤석열 정권을 '극악무도한 동족대결'과 '사대매국행위'에 주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김여정 부부장은 2022년 8월 담화를 통해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며,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을 명백히 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부터 북한이 남한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북한의 전략변화는 남북관계를 둘러싼 환경이 구조적으로 변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통일방안은 고려연방제이며 이를 위해 통일전선전술을 채택해왔다. 이는 1민족, 1국가, 2체제 공존상황에서 남한의 친북, 친노동당 세력과 합세해 남한을 북한으로 흡수하는 북한식 평화통일방안이다. 그러나 북한이 주도하는 그 같은 평화통일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체제는 이미 해체된 지 오래며, 북한은 남북한 간 체제경쟁에서 완전하게 패배했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글로벌 국가의 위상을 확보한 반면 북한은 21세기에도 아직 식량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취약국가(fragile state)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실현 불가능한 북한 주도의 통일을 포기하고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 민족내부관계의 위험성을 피하고 주권국가로서 국제법의 보호를 받겠다고 나섰다면 김정은 정권과 북한체제 유지를 위한 수세적 노선으로 전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 정권은 집권 이후 경제-핵 병진노선을 채택했으며, 이는 경제개발에 중점을 두면서도 핵개발을 지속하겠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2017년까지 대남, 대미, 대외관계 없이 핵개발에 주력한 북한은 2017년 11월 국가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인 2018년에 들어와 협상노선으로 전환해 한반도 정상외교에 나섰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남북 및 북·미관계가 장기교착 국면에 직면했으며, 돌파구 마련이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은 자력갱생, 정면돌파를 내세우며 대남 강경책으로 전환했다.
문재인 정부는 비핵화 협상을 통한 남북관계 '발전'을 지향했지만, 윤석열 정부는 비핵화 협상이 중단된 상태에서 남북관계 '정상화'를 추구함으로써 대북정책의 조건과 내용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사실상 비핵화가 어렵다는 판단 아래 원칙적 대북정책을 견지함으로써 북한을 압박하고 거리를 두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이러한 윤석열 정부와는 자신에게 유리한 이해관계의 관철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의 대남전략 변화는 한반도 통일, 평화, 민족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분단체제의 해소와 평화를 지향하는 모든 이들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줬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김 위원장의 한반도 두 국가론이 가진 군사적 위험성이다.
최고인민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북한의 '절대적 힘'이 일방적인 무력통일을 위한 선제공격수단이 아니며, 꼭 필요한 방어적 차원의 '자위권에 속하는 정당방위력'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적들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결코 일방적으로 전쟁을 결행하지는 않을 것"이며, 이를 '나약성'으로 오판하면 절대로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먼저 도발을 하지 않을 것을 확약한 셈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의 남쪽 국경선을 군사분계선(MDL)으로 규정했지만, 북방한계선(NLL)은 '불법·무법'으로 규정하면서, "대한민국이 우리의 영토, 영공, 영해를 0.001㎜라도 침범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도발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김 위원장 언급대로 해석할 경우 NLL 절대수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남한은 이미 북한이 주장하는 영해를 깊숙이 침범했으며, '전쟁도발'을 한 셈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남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는 점에서 김 위원장의 두 개의 국가론, 교전 중인 국가관계 선언을 용인할 수 없다.
북한은 2022년 9월 핵무력 법제화를 통해 핵무기 사용조건을 매우 추상적이고 광범위하게 규정해, 사실상 자신들이 판단하는 어느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는 법적 요건을 마련해 놓은 상태다. 남한을 교전국가로 규정하고 임의의 상황에서 자신들 판단대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공언한 북한과 두 개의 국가관계로 지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북한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미국의 확장억제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불안한 평화를 국민들이 감내할 수 있을까?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통일 포기와 한반도 두 개의 국가론은 현 단계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의 결정일 뿐이다. 통일은 북한 체제와 노동당 존립의 근거이자 존재이유였으며, 북한주민들의 정신과 생활세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백두혈통, 혁명위업, 혁명전통 등 김정은 정권의 근간에 해당하는 개념은 모두 한반도 적화통일을 지향하고 있었다. 북한 지도부는 고난의 행군기를 비롯해 북한 주민들이 당면한 어려움과 경제난 모두 분단체제가 원인이며, 통일을 위해 고난을 감내해야 한다고 교육해왔다.
앞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교시를 실천하기 위해 북한 주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개조작업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주민들에게 통일의 희망을 대체해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김 위원장이 입만 열면 강조하는 '혁명'에서 통일, 평화, 민족을 제거할 경우 남는 것은 김씨 일가의 독재체제뿐이다. 지금 러시아가 연해주에 농업기지를 제공해 북한 주민이 농사를 지음으로써 만성적인 식량문제를 해결하려는 구상이 추진 중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남북을 교전국관계로 전환해 전쟁준비를 상시화하는 것은 무모한 선택이다. 핵전쟁의 위협을 내재한 위험한 한반도 두 국가론은 남과 북 모두에게 안보 불안의 상시화와 군사적 대치의 고비용 구조를 의미할 뿐이다.
분단사 근 80년을 경과하고 있으며 복합적인 한반도와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남북 일방이 주도하거나 단기적 처방으로 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1민족 1국가 2체제를 공통분모로 하는 남한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북한 고려연방제의 접합점을 넓혀나가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다.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즉 남북기본합의서는 통일시점까지 남북한 간의 공존과 특수관계를 규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실용적인 잠정적 합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동서독의 사례에서 보듯이, 동서독 기본조약에서 두 국가임을 선언했다고 해서 통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 국가론에서의 통일은 어느 한 국가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특수관계론보다 평화통일을 훨씬 어렵게 만들고 자칫 영구분단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직 북한의 헌법과 당규약이 개정되지는 않았다. 김 위원장은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으로 돌아와 북한 체제의 근간을 바꾸고 북한 주민에게 재앙을 가져오며 남북관계를 파탄시키는 한반도 두 국가론을 재고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 선언이 북한 주민이나 남한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선에 그쳤으면 한다. 우리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북한의 태도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대북 접근법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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