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으레 반복되는 행사 중 하나로, 여러 매체가 '올해의 책'을 뽑곤 한다. 이런 선정 목록을 볼 때마다 덩달아 나도 한 해 동안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신간을 꼽아보곤 하는데, 올해 번역서 가운데는 이 책을 맨 위로 올리고 싶다. 바로, 사회과학자이자 생태운동가들인 마티아스 슈멜처, 안드레아 베터, 아론 반신티안이 공저한 <미래는 탈성장: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로 가는 안내서>(김현우, 이보아 옮김, 나름북스, 2023)다.
이 책은 탈성장 논의에 관한 백과사전이라 할만하다. 관련된 거의 모든 쟁점을 다 짚는데, 단지 얄팍하게 소개하는 수준이 아니다. 깊이 있게, 더구나 저자들의 독창적 시각까지 담아 정리한다. 그렇다고 여러 주제를 단순 나열하거나 번잡한 논의에 빠지지는 않는다. 결코 지루할 틈 없는 독서를 통해 독자가 자기도 모르게 탈성장 논의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든다. 그래서 탈성장에 이미 관심 있는 이들로 하여금 생각을 더 깊이 가다듬을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탈성장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경우는 오해와 편견을 불식하도록 돕는다.
이렇게 훌륭한 책이건만, 그만큼 널리 알려지거나 회자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탈성장이라는 주제 자체에 대한 기피 혹은 공포다. 어떤 언론사는 노골적으로 이 책을 신간 소개란에 다루길 거부했다는 후문은 이런 정황을 잘 말해준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기적적인 '성장'에 성공했다는 신화가 국교(國敎) 역할을 하는 사회에서 '탈성장'은 충분히 금기어가 될 만하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탈성장'은 과거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오늘날의 '페미니즘'에 이어 또 다른 마녀사냥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사실 나 역시 탈성장의 충실한 신도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미래는 탈성장>을 읽었다면 '신도' 따위 표현은 쓰지 않을 것이다. 탈성장은 그런 식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확신에 가득 찬 탈성장론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기후위기가 심각해질수록, '녹색성장'론처럼 생태전환을 위해서도 성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에는 점점 더 동의하기 힘들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반대로 경제성장 비판 논리에는 더욱더 마음을 열게 된다.
지금은 이런 고민과 회심(回心)이 집단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때다. 그러나 <미래는 탈성장>이 받는 대접에서도 얼핏 드러나듯이, 경제성장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의 일체에 대한 한국 사회의 거부감은 사뭇 완강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현 대한민국 헌법에서 그 단단한 뿌리를 발견한다.
현 헌법 119조보다 더 21세기에 어울리는 제헌헌법 84조
현행 헌법에는 이른바 '경제 민주화' 조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경제 질서의 기본 가치와 지향을 규정한 제119조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19조 ①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119조 2항에는 "경제의 민주화"라는 문구가 선명히 박혀 있을 뿐만 아니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한다거나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한다는 '경제 민주화'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조항을 경제 민주주의를 추진할 유력한 근거로 들곤 하며, 많은 이들이 현 헌법에서 대표적인 '진보'적 내용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 조항에는 "경제의 민주화"만큼이나 우리의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인상적 단어가 있다. 바로 "성장"이다. 비록 "균형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달고는 있지만, 아무튼 "국민경제의 성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한다. 국가는 무엇보다 먼저 성장을 추구해야 하며, 만약 성장과는 반대 방향에서 경제가 움직인다면 이는 헌법이 요구하는 바에 위배되는 셈이다. 좀 강하게 해석하면, 성장은 한국 사회의 경제적 이념 중 가장 우선적인 내용이다.
헌법이 아예 이렇게 되어 있으니, 한국 사회가 탈성장 같은 논의에 유독 거리를 두거나 귀를 닫는 것도 이해가 간다. 물론 헌법 안에 '성장'이 명기됐다고 하여 '탈성장'을 논의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겠지만, 제6공화국 질서의 근간이 되는 정신이 성장주의 비판론과 긴장을 빚거나 충돌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를 통해 군부독재 시기를 청산했다고 하나, 그때 비롯된 성장 숭배는 민주화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진다. 우리는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본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앞에 인용한 현 헌법 199조 2항은 실은 1987년 헌법 개정 과정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문구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이전 헌법, 무엇보다도 그 첫 헌법인 제헌헌법에 '경제 민주화' 조항의 원형이 이미 담겨 있었다. 제헌헌법 제84조가 그것이다.
"제84조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실은 '경제 민주주의'에 더 어울리는 것은 현 헌법 119조 2항이 아니라 이 제헌헌법 84조다. 이 조항은 대한민국 경제 질서의 근간이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에 대한 "존중"(현 헌법 119조 1항)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이라 규정한다. 경쟁의 승리자 혹은 승리가 유력한 자들의 자유가 아니라 모든 국민을 잘 살게 하는 사회정의가 경제 이념임을 못 박은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야깃거리이지만, 일단은 '성장'에 더 주목해 보자. 제헌헌법 84조에는 '성장'이란 말이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단지 '발전'이 있을 뿐이다. 현 헌법 119조 2항의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이라는 문구 대신 제헌헌법 84조에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이 등장한다.
아마도 시대 배경 탓일 것이다. 제헌헌법을 제정하던 1940년대 말에는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에도 아직 '성장'이라는 용어가 정착되기 전이다. 제헌헌법 84조에 담긴 '발전'은 사회 발전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관념이 20세기 중반 이후 성장 신화에 완전히 종속되기 전 상황을 반영한다. 반면에 제6공화국 헌법 작성자들에게 사회 발전이란 이미 경제의 양적 성장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대한민국 헌법에 처음으로 ('경제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성장'을 새겨 넣었다.
'발전'은 양적 성장 일변도의 경제 질서나 관념을 비판한 뒤에도 중요하게 다뤄야 할 가치이자 지향이다.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성장주의 비판은 자본주의의 무한 성장과 지구라는 한계가 빚는 모순을 처음 발견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주목한 것은 경제의 양적 성장과 인간-사회 발전 목표 사이의 불일치였다. 그래서 GDP를 대체하려는 다양한 인간-사회 발전 지표들이 개발되었으며, 기후위기라는 새로운 요소가 부상한 현재도 이런 대안적 발전 목표의 달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고 보면 21세기 한국 사회가 직면한 현실에 더 어울리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1987년에 제정된 현 헌법보다는 오히려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 쪽이다. 현 헌법 119조가 등장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경제 질서의 근간을 규정했던 제헌헌법 84조는 지금 우리가 신자유주의 이후의 경제 대안을 모색하면서 반드시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과거 속의 미래'다.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 – 사회발전과 탄소제로 목표를 통해 교정되는 시장경제 회계
이것은 결코 단순한 복고 취향이 아니다. <미래는 탈성장>은 "탈성장의 미래"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에서 탈성장론이 더 고민해야 할 쟁점들이 무엇인지 밝힌다. 그 가운데에는 '민주적 계획'도 있다. 시장만능주의가 지배하던 신자유주의 시기를 겪어온 우리에게 '계획'이란 말은 너무 낯설다.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통해 성장 신화를 실현한 나라인데도 그러하다. 그래서 지구 한계에 맞게 경제 활동을 조절하려면 새로운 디지털 기술의 잠재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타진해 봐야 한다는 <미래는 탈성장>의 신중한 제안조차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제헌헌법 84조가 제시하는 가치와 지향에다, 기후위기에 따라 급박하게 제기되는 탈탄소 목표를 더해 생각을 굴려보면, '계획'이 의외로 낯설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우선은, 계획과 시장을 대립시키고 계획을 '시장의 폐지'와 등치시킨 20세기의 특정한 경제계획관을 떨쳐버려야 한다. 목표는 시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 경우에 계획은 시장의 대립물이기는커녕 특정한 시장경제를 조성하기 위한 일련의 제도들이다.
계획이 개입되지 않은 시장경제에서는 오직 하나의 회계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가격과, 이로부터 파생된 수입과 지출, 수익과 저축 같은 요소들로 이뤄진 회계다. 이 회계에 따라 개인과 기업이 벌이는 활동이 측정되고 평가받으며, 국가의 예결산과 정책 평가 역시 이에 종속된다. 이 세계에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의 이야기들은 드러나지만(이것조차 정말 그런지는 재검토되어야 하지만),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의 이야기들은 알아채기 힘들다. 더구나 오염 물질 배출을 필사적으로 줄여가는 이야기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계획이란, 이러한 시장경제 회계를 그 바깥의 두 측정-평가 체계와 대조함으로써 시장경제 회계에 드러나는 이야기들만이 아닌 다양한 다른 이야기들에 따라 경제 활동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인간-사회 발전을 기준으로 한 측정-평가 체계와, 탄소 배출량을 비롯한 지구 한계에 대한 영향을 기준으로 한 측정-평가 체계에 따라 시장경제 회계에서 수익과 성과로 기록된 것들을 재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기존 시장경제 회로에서 벗어나 이 재평가 결과에 따라 보상과 책임, 자원 투입과 새로운 투자를 재조정해야 한다.
만약 인간-사회 발전 지표와 지구 한계에 대한 영향 지표가 시장 가격 지표만큼이나 복잡하게 진화해 있다면, 개인과 여러 집단이 제출한 정보를 슈퍼컴퓨터의 연산 과정에 투입하기만 하면 계획이 순조롭게 입안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그 정도로 성숙한 대안 지표가 아직 없다. 오랫동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경험하면서 가격 체계에 맞춰 사회가 진화해온 것과 마찬가지로(비록 그 시간은 더 짧아질 수 있더라도), 대안 지표들이 발전하려면 일정한 진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계획의 중심 원리로서 민주주의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부터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모두 활용한 참여와 숙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 인간-사회 발전의 다양한 기준을 잡고 지구 한계에 대한 영향의 허용치를 정해야 한다. 한 차례 토론하고 합의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새롭게 반응하고, 인간 활동에 대한 지구의 반작용 또한 종잡을 수 없이 변화한다.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시민들은 이런 변동에 맞춰 끊임없이 각각의 측정-평가 과정을 다시 설계하고 기준을 새로 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진화해 가는 대안적 측정-평가 체계에 따라 시장경제의 성공과 실패를 재평가함으로써 시장경제 역시 특정한 방향으로 진화해 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복합위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민주적 계획'의 골간이다. 이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을 처음 만들 때에 합의한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이라는 목표와, 앞으로 헌법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기후위기에 맞선 생태적 전환"이라는 목표에 현 경제 질서를 대면시키려는 노력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험난한 격동의 시대에 이것보다 더 "경제의 민주화"에 부합하는 집단적 생존 방책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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