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외통수에 빠졌다. 김기현 대표의 SNS 사퇴는 최악이었다. 그 배경에 대통령의 '격노'가 있었다고 한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김기현 대표가 먼저 불출마를 선언하고, 장제원 의원이 그 뒤를 따르길 바란 모양이다. 김 대표에게는 특히 '당대표는 유지하되,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김 대표가 우물쭈물한 사이 장 의원이 먼저 불출마를 선언하자 지구 반대편에 있던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게 스토리의 전말이다. 그 '격노'에 대한 화답은 김 대표의 'SNS 대표직 사퇴 통보'였다.
모든 게 꼬였다. 김기현 대표는 윤심(尹心)을 오독한 것이 아니라, 윤심에 저항한 것이다. 김 대표가 출마를 할지, 불출마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 같지만, 이젠 중요하진 않다. 메시지는 발산됐고, 감당은 윤 대통령 몫이 됐다.
김 대표가 얼마나 윤 대통령을 곤란하게 만들었는지 보자. 윤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물갈이'와 '물갈이'의 안정적 관리였다. 그 첫번째 스텝이 김 대표와 장 의원의 총선 불출마였다. 원래 인요한 혁신위의 미션이었다. 인요한의 공천관리위원장 요구를 "수고했다"는 말로 단칼에 자른 김 대표에게, 윤 대통령은 '인요한 혁신안의 완성'을 요구한 셈이다. '중진 불출마'를 '신핵관'으로 바꿔치기하기 위해선 김 대표의 '안정적 관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퍼펙트 스톰' 앞에서 국민의힘호(號)의 조타실을 먼저 탈출한다.
1년 반 재임한 대통령 임기 중에 당대표가 두 번 날라갔고, 비상대책위원회가 세 번째 들어서게 생겼다. 내년 4월 총선까지 비대위로 가게 될 경우 대통령 취임 23개월 중 11개월동안 비상 운영되는 정당이 집권 여당의 현 주소다. 이준석을 대표직에서 쫓아냈던 바로 그 행태가 1년 여만에 총선을 앞두고 재현됐다. 공교롭게도 '이준석 체제'를 무너뜨렸던 주호영,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은 지금 장제원과 김기현처럼 불출마 압박을 받고 있다. 비정한 정치판이다.
대통령이라는 유일 권력이 여당을 이리저리 조합해보고 있는 모양새다. 그런데도 하는 말이 "(비대위원회 구성은) 대통령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한오섭 정무수석)"란다. 이건 사실 민주적 외피를 쓴 5공 시대다. 전두환이 노태우를 민정당 대표로 지명하고 임명한 것처럼. 그래도 대통령이 당대표를 날리진 않았다. 박근혜도 유승민 당시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로 공격했지만, 실제 그를 원내대표직에서 날린 건 초재선 '친박 돌격대' 몫이었다. 대통령이 여당 대표에게 직접 불출마를 종용하고, 그 여파로 당대표가 사표를 쓴 건 처음 보는 일이다. 내용상으로 대통령의 구상이 완벽히 관철된 것도 아니다. 장제원은 인요한 혁신위를 무력화한 후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했고, 김기현은 대통령의 '불출마' 요구를 거부하고 대표직을 던졌다.
그런데도 이 일련의 과정들은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쫓아냈다고 믿게 만들었다. 총선을 앞두고 '제왕적 대통령' 프레임을, '권력 견제' 프레임을 오히려 강화키고 있다. 대통령은 힘이 빠지고 있지만, 유권자는 혼란스럽다. 거대 야당에 막힌 대통령은 여전히 당대표를 갈아치울 정도의 무소불위 권력으로 인식된다.
비상대책위원회로 쇄신을 한다? 정치인이 피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새로운 시도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이다. 새로움은 클리셰가 되고 반복은 진부함이 된다. 23개월 중에 11개월이 비상이면, 비상이 일상이다. '윤심' 비대위원장이 들어서서 '인요한 혁신위'를 계승하자고 중진들에게 칼을 휘두르면, 그걸 유권자들이 '혁신'으로 봐줄까? 비상의 남발이고 혁신의 남용이며 쇄신은 피로해졌다. 김기현 사퇴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뿐이다.
복합 위기의 동시 진행, 퍼펙트 스톰이다.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큰 위기의 이면에는 작고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300여 번의 위기들이 중첩돼 있다. 1991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퍼펙트 스톰>에서 만선의 꿈을 품은 선원들은 허리케인 소식을 듣고도 '작은 허리케인'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배를 타고 어장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이 작은 태풍은, 다른 자연 현상들과 맞물리며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여기에 사사로워보이는 사고들이 중첩되며 선원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완벽한 재앙'에 갇히게 된다. 지금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처한 상황이다. '윤핵관' 이철규 의원이 지난 8월 의원총회에서 "타고 있는 배를 침몰하게 하는 승객은 승선 못 한다"고 말했지만, 그가 타고 있는 배는 지금 '퍼펙트 스톰'을 향해 돌진 중이다 .
'퍼펙트 스톰'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이 해야 할 일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향후 윤 대통령 앞길에 놓인 정치 일정은 비정하기 짝이 없다. 당장 28일 처리가 확실시되는 '김건희 특검법' 정국이 있다. 반드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다. 일각에선 재의결 과정에서 국민의힘 표의 이탈을 우려하지만, 친윤이든, 반윤이든 총선을 앞두고 특검이 가동되면 다 죽는다는 걸 누구보다 본인들이 잘 알 것이기에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문제는 제 2의 '김건희 특검법', 제 3의 '김건희 특검법'이다. 당장 야당은 꽃놀이패다. 김건희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 의혹'을 이번 특검 법안에 집어 넣으려 무리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이번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새 비대위원장을 위시한 여당이 재의결을 막아도, '디올 백 특검'은 총선 이후 새로 만들면 된다. 지금 <서울의 소리>가 검찰에 고발한 '디올 백 사건'은 형사부에 배당된 상태다. 검찰 수사를 지켜 본 후 특검을 새로 발의해도 늦지 않다. 야당 탓 하기는 애매하다. 영부인 본인이 자처한 일이기 때문이다.
방법은 있다. 배를 돌리는 것이다. 지금 모든 문제의 근원은 '대통령 예외주의'에 있다. 이걸 벗어나면 된다. 당장 국정 기조를 변화시키고 협치에 나서야 한다. 기준은 있다. 보수 가치를 해하지 안되, 야당의 입장을 고려해 줄 수 있을만한 일들은 양보하는 게 먼저다.
첫째, 인사 문제. 당장 검사 출신 김홍일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를 거둬들이고, 이념 과잉 '뉴라이트' 장관들을 교체해야 한다. 언론 장악 논란, 홍범도 흉상 논란 등 '이념 전쟁'의 싹을 자르고 모든 걸 원위치 해야 한다. 둘째, 야당과 공감을 나누는 정책 우선 추진을 천명하고 야당에 협조를 구한다. 이를테면 연금 개혁, 의대 정원 개혁 이슈는 극한 대립 속에서도 충분히 야당과 대화할 만한 과제가 아닌가. 셋째, 당무 개입을 중단하고 총선 엄정 중립을 선언해야 한다. '김태우 공천'과 같은 어이없는 정무 판단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공천권을 당에 돌려주는 게 맞다. 넷째, 김건희 리스크 해소를 위해 영부인은 성실하게 '명품 백 의혹' 수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최소한 주가 조작 특검 처리 시점을 총선 이후로 미루자고 할 만한 명분이 생길 수 있다.
이 네가지 외의 것은 국민의힘이 가진 '보수의 가치'에 기반해 야당과 치열하게 논쟁하면 된다. 재정 문제(감세 문제), 교육 개혁, 노동 개혁 문제에선 얼마든지 야당과 각을 세우며 '보수 정부'의 가치를 내세울 수 있는 주제가 아닌가? 답안지는 나왔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기조가 바뀌었다는 신호를 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퍼펙트 스톰 이전으로 돌아가, 그간 뭘 잘못했는지, 사사로이 보이는 것들까지도 짚어내고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인요한 전 혁신위원장이 명언 하나는 남겼다. 의도치 않았지만, 텍스트는 발화되는 순간 해석하는 자들의 것이 된다.
"와이프와 아이 빼고 다 바꿔야 된다."
지금 대통령은 이 격언을 엉뚱한 방식으로 완전히 오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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