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영국에 국빈으로 방문해 다우닝가 합의(Downing Street Accord)라는 것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한국 기업들이 영국에 총 210억 파운드(약34조 원)를 투자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한국서 34조 투자받는 英, 경기 부양에 34조 붓는다(23.11.23 아주경제)
대통령실 "순방 비용 든다고 투자유치 활동 멈추면 국가적 손해"(23.11.19. 조선일보)
영국은 한국의 34조 투자에 반색했다. 영국 총리실은 보도자료를 통해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이 "무역과 투자"에 중점을 둔 것이며, 한국의 투자로 "1500개 이상의 고숙련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홍보했다. 아주경제 보도에 따르면 영국은 공공부채 비율이 국내총생산(GDP)의 100.8%로 60년 만에 최대치에 달한 상태였는데, 한국의 투자를 약속받은 직후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그러자 JP모건 등의 투자은행들은 영국의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을 0.1~0.2%p 상향했다. 재정 여력이 없고 투자 자금이 부족했던 영국을 한국이 도와준 셈이다.
이번 순방 전,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 예산이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대통령실 관계자는 "순방 비용이 조금 든다고 해서 이런 투자 유치 활동을 멈춘다면 오히려 국가적 손해"라고 답했다. 그러면 한국이 투자를 유치한 금액은 얼마일까. 언론을 뒤져보니 "영국 에너지기업 두 곳이 총 1조5000억 원 규모의 한국 투자"를 결정했다는 보도 외에 다른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번 영국 및 프랑스 순방은 대통령의 올해 13번째 출국이었다는데, 영국 왕과 사진 찍은 것 외에 한국이 챙긴 실익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윤 대통령이 영국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서, 영국의 지방 재정이 어떤 형편인지를 알려주는 소식이 전해졌다. 영국의 대도시 중 하나인 노팅엄시 시의회가 파산을 선언했다는 것. 영국 지자체들의 파산은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2018년 이후 사실상 파산한 시의회가 6곳이었고, 노팅엄시가 7번째였다.
Nottingham City Council declares itself effectively bankrupt (23.11.29 BBC News)
Why are councils going bankrupt? (23.11.29 Skynews)
Nottingham homelessness report points to worsening crisis (23.10.11 BBC News)
UK weather: Homeless man ‘freezes to death’ while sleeping in the car in Nottingham as temperature plunged to –10C (23.12.03 NationalWorld)
One in 50 Londoners homeless and in emergency homes – London Councils (23.08.03 BBC News)
Nearly one in five English councils at risk of bankruptcy, says LGA (23.12.06 Financial Times)
Britain’s food banks brace for worst winter yet (23.10.18 Reuters)
영국의 지자체 파산이 늘어나는 원인에 대해 BBC 등의 외신은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첫째, 2013년부터 영국 중앙정부가 지자체에 지원하는 예산을 감축했다. 둘째, 지자체가 제공하는 서비스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서 서비스란 주로 노인복지와 아동 돌봄을 가리킨다. 영국에서는 65세 이상 인구가 지난 5년간 40만 명 증가했으며 팬데믹과 인플레이션의 여파로 아동 돌봄 수요 역시 지난 2년간 2만 명 이상 증가했다. 그래서 2019년에서 2020년 사이에 영국 지방정부들은 지출의 80%를 돌봄에 사용했다고 한다(2010년에는 지출의 52%만 돌봄에 사용).
외신에 따르면 영국 지방정부들의 돌봄 서비스 수요가 증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노숙자가 역대 최고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서 임대료를 내지 못하는 가구가 늘어났지만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강제퇴거 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노숙자 자선단체인 ‘셸터Shelter’의 집계에 따르면 영국 전역에서 임시 거처에 거주하는 가구의 수는 지난 10년 사이 87%나 증가해 10만 가구에 육박한다. 임시 거처란 저렴한 B&B 여관이나 호스텔 같은 곳인데, 노숙자들을 이런 곳에 투숙시키는 비용은 지자체들이 부담한다. 지난 10월 BBC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노팅엄 시의회는 노숙자 돌봄에만 하루 약 2만2000파운드를 지출하고 있었다. 노팅엄에 노숙자가 늘어나서 시의회가 임시 거처를 늘렸지만, 여전히 1만 명이 대기자 명단에 남아 있다. 최근에는 기온이 영하 10도로 떨어진 날 노숙자가 차 안에서 잠을 자던 중 동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팅엄만이 아니고 다른 대도시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BBC는 전했다. 런던의 경우 시민 50명 중 1명꼴로 노숙자가 되었다가 지자체가 운영하는 임시 거처에 머무르고 있다. 런던 시의회에 따르면 그 수가 약 17만 명이고, 그중 어린이는 약 8만3000명이다. 시의회가 운영하는 임시 거처에 들어온 사람 수가 그 정도니 실제로는 안정적 거처가 없는 사람이 더 많다고 봐야 한다. 런던 시의회는 2022년~2023년 사이에 런던 시내의 노숙자가 1만7000명이나 증가했으며 그 원인은 생계비 급등이라고 진단했다. 이처럼 노숙자를 돌보는 데 들어가는 비용 때문에 영국의 지방의회 5곳 중 1곳이 파산 위험을 안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명색이 G7이라고 하는 영국에 노숙자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사실은 한국 언론에 많이 소개되지 않는다. 영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6위지만, 영국의 다수 국민들은 1년이 넘도록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겨울을 앞두고 영국의 푸드뱅크에는 비상이 걸렸다. 영국 최대의 푸드뱅크 연합회인 '트루셀 트러스트Trusell Trust'는 현재 영국인 7명 중 1명이 생계비 부족으로 굶주릴 우려가 있으며, 올 겨울에만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식료품 지원을 필요로 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영국은 과거에 우리가 알던 영국이 아니다.
Cities crack down on homeless encampments. Advocates say that’s not the answer (23.11.29 AP)
Homeless children in crisis as pandemic funds go away (23.12.07 UPI)
"'대변' 가득한 샌프란시스코 거리…'X춤' 배워야 할판" 조롱 폭발[핫이슈](23.12.08 서울신문)
Shattered Dreams: Homebuyers Grapple With High Mortgage Rates Derailing Their Plans (23.11.09 Realtor.com)
미국도 노숙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 노숙자와 마약 중독자, 쓰레기와 범죄가 넘쳐난다는 보도는 국내 언론에도 제법 있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노숙자 텐트를 대대적으로 철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노숙자 텐트촌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한 것은 지난 몇 년 사이의 일이다. 대도시의 몇몇 공원은 텐트로 뒤덮여 시민들이 공원을 이용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AP통신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등 대도시에서는 지자체들이 수천만 달러를 들여 노숙자 텐트촌을 없애려고 했지만 인도나 공원, 도로변에 텐트가 계속 세워진다. 노숙자 가정의 아이들이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것도 문제다. 미국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100만 명이 넘는 미국의 학령기 아동이 노숙을 하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중산층이 가진 '내 집 마련의 꿈'도 산산조각 나고 있다. 미국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크게 상승해 7~8퍼센트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기존에 낮은 대출 금리로 주택을 구입한 사람들은 이사를 가지 못하고 눌러앉아 있으며, 신규로 주택 구입을 원하는 사람들은 높은 금리 때문에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다. 의식주 중 '주'가 해결이 안 되고 있는데도 통계상으로 미국 경제는 호황이고 고용 지표도 좋다. 월가를 위시한 미국의 상위 1%는 계속해서 풍요를 누리겠지만 99% 대중의 실제 생활은 다른 문제다.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와 다른 시스템을 가졌다고 알려진 독일로 가보자. 독일은 원래 '세입자의 나라'로 불렸다. 유럽 인구의 70%가 자신이 소유한 주택에 거주하는 반면, 독일에서는 인구의 46%만이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장기간 임대로 거주해도 큰 불편이 없을 정도로 세입자 보호가 잘 되고 임대료도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독일 정부의 주택 정책은 후퇴했고 사회주택의 민영화가 늘어났다.
2022년 말 기준으로 독일의 사회주택 재고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한편, 시장에서는 주택가격과 임대료가 계속 상승했다. 여기에 금리까지 높아지자 대다수 독일인들은 주택을 구입할 형편이 못 되어 너도나도 임차를 선택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세입자들끼리 경쟁이 붙어 임대료가 더 뛰었다. 현재 독일 국민들은 순수입의 3분의 1 정도를 임대료로 지출한다. 지난 8월 발표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 국민들의 80퍼센트는 독일의 경제 상황이 불공정하며, 60퍼센트는 독일 사회가 빈곤층과 부유층으로 갈라져 있다고 답했다. 우리가 알던 독일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Germany: Housing is almost unaffordable (23.08.03 DW)
High inflation fuels sense of rising inequality, mistrust of govt in Germany – survey (23.08.10 Reuter)
EU economy loses momentum amid Ukraine war, inflation, natural disasters and higher interest rates (23.11.09 euronews)
지금 독일의 문제는 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탈산업화로 공장들이 문을 닫고, 제조업 경쟁력은 하락하고 있다. 독일이 경제난을 겪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에너지 가격 상승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봐야 한다. 전쟁 전까지 독일은 러시아에서 에너지를 저렴하게 수입해서 공장을 가동했다. 그런데 전쟁 발발 이후에는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수입하지 못하고 미국에서 2~3배 비싼 천연가스를 수입해서 써야 했다. 독일 제조업 경쟁력의 급격한 하락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유럽 경제의 엔진이었던 독일이 주춤하자 유럽 경제 전체가 동력을 잃고 있다. 유럽연합 국가들은 산업 생산과 소비가 모두 둔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난 9월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는 올해와 내년 유럽연합의 경제 성장률을 각각 0.8%, 1.3%로 하향 조정했다.
러시아 경제, 우크라戰 이후 2년만에 플러스 성장 반등…1등공신은 제조업(23.11.01 아시아투데이)
러시아는 서방과의 '경제 전쟁'에서 승리했나(23.09.29 동아일보)
러시아산 다이아몬드 불매 선언에...크렘린궁 '콧방귀'(23.11.20 매일경제)
Vladimir Putin plans AI boost in Russia to fight 'unacceptable and dangerous' Western tech monopoly (23.11.27 euronews)
반면 서방의 각종 제재를 당한 러시아는 마이너스 성장을 탈피하고 2년 만에 3%대 성장률을 기록했다. 미국은 러시아를 국제금융결제망 SWIFT에서 퇴출시켰지만, 러시아는 서구의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인도, 튀르키예 같은 나라에 석유와 가스를 수출할 수 있었다. 단순히 자원 수출로만 버틴 것도 아니고 제조업의 성장도 이뤄냈다. 기계공업이 20% 이상 성장했고, 서방의 제재 속에서 일부 부문에서는 수입품들을 국산품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최근 러시아 정부는 올해 러시아의 GDP 성장률 전망을 기존 0.5~2.0%에서 1.5~2.5% 사이로 상향 조정했다. 경상수지는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상승하고 있다. 올해 러시아는 최저임금을 6.3% 인상했고, 내년에는 18.6%를 더 인상할 계획이다. 최저임금 산식도 변경해서 노동자의 임금을 더 많이 끌어올리겠다고 한다. 한국 언론들도 러시아 경제가 생각보다 건재하다고 보도한다.
다급해진 G7 국가들은 내년 1월 1일부터 러시아산 비산업용 다이아몬드 수입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러시아 크렘린궁은 "러시아는 지금까지 제재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면서 오히려 "유럽이 ‘부메랑 효과’로 피해를 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렘린궁의 자신감에는 일정한 근거가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미국과 서방의 제재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러시아가 아니라 독일이다.
지난해 EU의 외교정책 고위대표인 호세프 보렐은 공개석상에서 "유럽은 정원"이고 "나머지 세계는 대부분 정글"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소식들을 보면 세계가 실제로 정원과 정글로 나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모두가 보렐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미국의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은 세계의 정치경제적 변화를 설명하면서 "정원이 끝나고 정글이 열리고 있다"고 평했다. 허드슨의 분류에 따르면 "정원"은 영어권과 유럽에 사는 10억 명의 백인들이고, "정글"은 글로벌 사우스를 비롯해서 세계의 진짜 다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윤석열 정부는 보렐이 옳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정원"에는 언제까지나 꽃이 필 것이라고 믿고, 정원만 바라보고 내달리는 외교를 한다. 중국을 자극하는 정책으로 15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라는 기록도 세웠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장면도 연출된다. 지난번 영국 방문을 앞두고 윤 대통령은 <텔레그래프>와 인터뷰에서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대만 문제를 언급했다. 그리고 며칠 후 부산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서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2030 부산 엑스포"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안다. 그래도 정부는 "세계 수출 6대 강국에서 5대 강국으로의 도약"을 외친다. 착각과 모순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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