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후반부에 독일 도시들을 겨눈 연합군의 무차별 공습(이른바 '지역 폭격')은 전쟁범죄의 한 유형으로 비판을 받는다.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 또는 '도살자 해리스'(Butcher Harris)라 일컬어지던 아서 해리스(1892-1984) 영국 전략폭격기사령관의 주도 아래 영국은 야간 폭격을 맡았다. 영국 주둔 미 육군항공대(USAAF) 소속 제8항공군은 이름만 그럴듯한 '정밀 폭격'을 내세우면서도 주간 폭격에서 사실상 해리스의 만행을 뒤따랐다.
이렇게 밤낮 가릴 것 없이 영미 연합군의 폭격기들은 독일 시민들을 불지옥의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문자 그대로 공습테러였다. 연합군의 공습으로 60만(일설에는 50만)의 독일인 희생자가 생겼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일본의 공습 희생자 숫자와 거의 같다(떨어진 폭탄의 총량은 독일 140만톤, 일본 82만 톤).
공습의 명분이야 어떠했든, 민간인의 대량 학살은 전쟁연구자들 사이에서 공습테러이자 전쟁범죄라고 한 목소리로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승자인 영미 전쟁지도부는 전범재판을 비껴갔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승자의 재판이란 비판을 받는 까닭이다.
공군력이 전쟁 승리의 결정적 요인?
여기서 물음이 하나 떠오른다. 그렇게 많은 민간인들은 죽이는 공습은 전쟁의 승패를 가름할 만큼 결정적인 요소일까. 이 물음에 대해 '폭격기 해리스'를 비롯한 공습 예찬론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여러 전쟁연구자들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이미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전반에 걸친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엄청난 북폭을 해대고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공습의 한계를 드러낸 바 있다.
공습을 다룬 역작 가운데 하나인 <승리를 위한 폭격>(Bombing to Win, 1996)을 쓴 로버트 페이프(시카고대, 정치학)를 비롯, 여러 전쟁 연구자들은 '지금껏 전쟁의 승패는 하늘이 아닌 땅에서 결판났다'고 지적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부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1965-1972), 이라크전쟁(제1차 걸프전쟁, 1991) 등 주요 전쟁에서의 공습과 그 정치군사적 효과를 분석한 페이프는 '승리의 열쇠는 적국 국민이나 경제를 공격하는 것보다 적국의 군사전략과 군대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페이프에 따르면, 군사적 강제(military coercion) 성격을 지닌 공습은 전쟁 승리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한계를 지녔다. 그 운용비용이 엄청나게 비쌀 뿐더러, (드레스덴을 공습해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던 '폭격기 해리스'가 믿었듯이) 결정적 승리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공군력 혼자서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는가?'(Can air power alone do the jobs?). 이 물음에 그가 내린 대답은 짧은 한 마디, 'No'다(그렇다면 죽이지 않아도 될 민간인들이 공습으로 공격하는 것은 헛된 일이 되는 셈이다).
심지어 오늘날 스마트 폭탄이니 뭐니 해서 '정밀유도 미사일 혁명'(precision-guided missile revolution)을 가져온 상황에서도 공습은 한계를 지녔다고 페이프는 지적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공중 폭격으로 민간인들에게 희생과 위험을 강요하는 방식으로는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지 못하며, 다른 하나는 공습 자체가 적국의 항복을 이끌어내는 강제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Robert Pape, <Bombing to Win: Air Power and Coercion in War>, Cornell University Press, 1996, 314-315쪽 참조).
공습의 '정치적 배당금' 챙긴 히틀러
항공력의 역사와 제2차 세계대전사를 다뤄온 전문연구자로 이름이 알려진 리처드 오버리(엑서터대, 현대사)도 페이프와 같은 입장이다. 그의 의견을 들어보자.
[드레스덴 파괴를 포함하여 포격전쟁의 마지막 단계가 (영미 연합국에게는) 직접적인 전략적 이득은 거의 없고, 점점 더 무방비가 되어가던 민간주민에게는 과도한 수준의 사상(死傷)을 일으키는 일종의 과잉(overkill)을 보여주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존 안드레아스 올슨 편, <항공전의 역사>, 한울, 2017, 90쪽).
오버리는 연합군의 공습이 독일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측면은 있지만, 그 공습으로 나치 독일의 전시지도부가 반사이익을 누렸다고 지적한다. 연합군의 공습이 나치 히틀러 정권으로 하여금 국민 총동원 체제를 더 쉽게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셈이라는 얘기다.
[독일의 폭격 당한 주민들은 심각한 사기 저하에 빠졌으며 집중폭격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영미 연합국에게) 기대되었던 정치적 배당금은 현실화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 배당금은) 사실은 독일 지도부에게 주어졌다. 집중적인 폭격은 (독일 국민들의) 무관심과 체념을 유발했으며, 이는 (나치) 체제로 하여금 이렇다 할 공공연한 정치적 반대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주민들에게 상당한 요구를 계속해서 할 수 있게 해주었다](존 안드레아스 올슨 편, 91쪽).
낮에는 미 B-17 전폭기가, 밤에는 영국 랭커스터 중폭격기가 출격해 밤낮으로 독일 도시들에 폭탄을 퍼부었지만, 독일은 항복하지 않았다. 히틀러 총통의 자살(1945년 4월30일), 바로 그 다음날 '히틀러의 나팔수'였던 괴벨스 선전장관의 자살을 재촉한 것은 독일 중심부를 향한 연합군(특히 소련군)의 압박이 결정적이었다(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방의 원폭보다는 소련군의 만주 침공이 히로히토로 하여금 항복 결정을 서두르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연재 44 참조).
해리스, "정유소 공습이 만병 통치약이냐"
그렇다면 영국 폭격기사령관 아서 해리스는 무슨 이유로 '독일의 피렌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던 드리스덴을 지옥의 땅으로 만드는 공습에 앞장섰을까. 해리스가 그의 상급자인 찰스 포털 공군참모총장에게 '동부 전선에 있는 소련에게 어떤 형태로든 군사적 지원을 해야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며 드레스덴 공습을 주장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이는 확인이 어렵고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드레스덴 공습이 필요했다며 '폭격기 해리스'를 감싸주는 쪽의 견해를 대표하는 전쟁사가는 앨런 존 퍼시벌(A.J.P) 테일러(전 옥스포드대 강사, 1906-1990)이다. 그는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The Second World War: An Illustrated History>(1974)이란 책에서 연합군의 드레스덴 공습과 이를 주도한 영국 사령관 아서 해리스를 감쌌다. 테일러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1945년 2월에 서방 연합국은 여전히 독일인들과 격렬하고 피 튀기는 전투를 치를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영국 참모부는 심지어 유럽전쟁이 11월까지 지속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은 (독일의 산업시설인) 종합석유공장에 폭격을 집중했다. 아서 해리스는 '이러한 공격이 만병통치약이냐'고 조롱하며 지역폭격을 고집했다. 한 번 더 공습을 하면 천둥 같은 폭격소리가 독일인들의 사기를 무너뜨릴 것이었다. 그리하여 해리스는 이전에 한 번도 공격받은 적이 없는 드레스덴을 목표로 삼았다](A.J.P 테일러,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페이퍼로드, 2020,396-397쪽).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해리스의 기대와는 달리 공습은 오히려 독일의 적개심과 저항의지를 부추겼다. 드레스덴 공습 당시에도 논란이 따랐지만, 공습 3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독일이 항복을 하자 그런 민간인 학살을 낳은 작전이 꼭 필요했느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테일러는 '모든 사람들은 그해 2월에는 독일의 저항이 만만치 않게 여겨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며 해리스를 감쌌다. 그러면서 (글 아래에서 살펴보듯이) 처칠을 향해 '드레스덴 공습에 대한 비난이 일자 서둘러 책임을 부인했다'고 비난했다.
('폭격기 해리스'를 감싸준 A.J.P. 테일러는 '히틀러 논란'을 일으킨 전쟁연구자다.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다룬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1961)란 책에서 히틀러마저 감싸고 돌아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히틀러가 사악한 마스터 플랜을 세워놓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잘못과 실수로 전쟁을 시작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히틀러가 흔히 많은 이들이 '악마적인 인물'이 떠올리지만, 실제는 '정상적인 독일 지도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 때문에 그는 '나치 부역자'라는 인신공격마저 받았다.)
스탈린, 드레스덴 폭격 요청 안 했다
스탈린이 드레스덴 폭격을 요청했는가도 관심을 끈다. 1945년 2월4일부터 11일까지 1주일 동안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우크라이나 쪽 지명은 크름 반도)에 있는 휴양도시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미), 윈스턴 처칠(영), 이오시프 스탈린(소)이 모였다. 전쟁 막바지 마무리와 독일 패전 뒤 독일을 분할 점령을 논의하는 자리였다(얄타에서의 합의대로 1945년 독일 항복 뒤 전승국인 미·영·소 3개국에 프랑스가 더해져 4개국이 독일을 나눠 통치했다).
겨울철에 러시아에서 그나마 날씨가 따뜻한 곳이 얄타였다. 전시 지도자들의 회담을 얄타에서 소집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그는 소련군은 동부전선에서 큰 희생을 치르며 열심히 싸우며 베를린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영미 연합군은 서부전선에서 진격이 느린 점을 답답해했다.
당시 영미 연합군은 라인강 건너 베를린을 목표로 한 진격이 주춤한 상태였다. 히틀러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마지막 도박으로 벌인 아르덴 대공세(독일군이 아르덴 지역을 급습해 1944년 12월 16일부터 1945년 1월 25일까지 서부전선에서 펼친 겨울 대공세)에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피를 흘린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이 자국 병사의 손실을 줄이고 편하게 승리의 열매를 따려는 속셈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마저 품었다고 한다.
알타에서 소련군 참모차장 알렉세이 안토노프는 영미 연합군 폭격기들이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교차 지점을 공습함으로써 독일군 병력의 이동을 방해하는 안건을 꺼냈다. 영미 쪽에선 얄타회담 이전에도 베를린을 공습해왔기에 빠르게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드레스덴을 공습한다는 논의는 없었다. 드레스덴 공습 직전에 소련에 통보했을 뿐이다.
얄타회담 회의록에도 드레스덴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스탈린이 드레스덴을 구체적으로 찍어 공습을 부탁했던 사실은 더더욱 없다. 오히려 소련 쪽에선 자칫 영미 연합군 폭격기들의 오폭으로 말미암아 (독일 동부 지역에서 베를린을 향해 나아가려는) 소련군에 피해를 줄까 걱정했다. 실제로 그런 우려는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레스덴 공습에 나섰던 미군 폭격기 편대 가운데 하나는 목표지점에서 한참 떨어진 체코 프라하를 잘못 폭격하는 일조차 벌어졌다.
소련을 의식한 '정치적 폭격'
벨기에 태생의 역사학자 자크 파월을 비롯한 전쟁사가들은 영국과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드레스덴 공습을 결정했던 배경은 소련을 의식해서였다고 본다. 스탈린에게 연합군의 공습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전쟁 뒤 독일 점령지와 유럽에서의 동서 세력 경쟁을 염두에 두고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드레스덴을 공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성격을 지닌 폭격'이다.
[드레스덴 폭격은 얄타회담이 열리기 전에 소비에트 지도자가 오만하고 다루기 힘들 것이라 믿고 계획한 작전이다. 서방 연합군의 군사적 역량을, 특히 공군력을 시위하여 알릴 필요가 있는 상황이었다. 소비에트가 상대할 수 없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폭격기 편대, 가장 멀리 있는 표적에도 궤멸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를 영국과 미국이 갖고 있다는 것을 스탈린에게 알려주려는 것이었다](자크 파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오월의 봄, 2017, 203쪽).
1945년 2월 초 소련군은 베를린에서 70km 떨어진 오데르 강에 이르렀다. 영미 연합군의 진공 속도는 (독일의 아르덴 대공세 탓에) 느려져 라인강을 건너지도 못했다. 그런 흐름이라면 소련군은 베를린을 단독으로 점령한 뒤 독일 서부로까지 세력 범위를 늘릴 판이었다(그 뒤 전쟁 양상은 실제로 그렇게 흘러갔다). 그런 상황에서 얄타에서 스탈린을 만나게 되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소련이 갖지 못한 최강의 군사적 카드를 내밀고자 했다.
특히 처칠이 적극적이었다. 폭격기 편대를 이용해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느 군대든(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타격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길 바랐다. 스탈린을 향한 무력시위는 드레스덴을 공습하려고 출격을 준비하는 영국군 조종사들에게 나눠준 작전 지침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보자.
[폭격의 목적은 이미 부분적으로 무너진 방어선 후방에 적군이 가장 아프게 느낄 지점을 공격하고, 적군으로 하여금 향후 도시를 침략의 발판으로 쓰지 못하게 하며, 동시에 러시아인들이 이 도시에 진격해 들어왔을 때 (영국) 폭격기사령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세르히 플로히, <얄타: 8일간의 외교전쟁>, 역사비평사, 2020, 403쪽).
이 작전 지침서는 드레스덴 공습 목적 가운데는 적의 후방 도시를 공격해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뿐 아니라,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무력시위적인 성격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소련군의 베를린 진공에 도움을 주려고 드레스덴 공습을 했던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베를린을 향한 소련군의 빠른 진공 속도에 긴장한 영미 연합국 전시 지도자들은 드레스덴에 대한 파상 공습으로 독일의 저항 의지를 꺾고 항복을 앞당겨 받아내려는 욕심이 아주 없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조기 강화에 나설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함부르크나 베를린 등 주요 도시들이 잇달아 폭격을 받아온 상태에서, 드레스덴 폭격으로 빠른 항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강대국의 세력 경쟁에서 비롯된 '정치적 폭격'이 애꿎은 드레스덴 시민들을 희생양으로 만든 셈이다.
실제로 소련군은 베를린 공방전에 집중하느라, 1945년 5월8일 독일 항복 이전까지는 드레스덴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다. 드레스덴 공습이 소련군에게 실제로 도움이 됐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그 공습이 없었다 하더라도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걸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민간인 대량살상은 없어도 될 일이었고, 연합국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드레스덴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정치가 윈스턴 처칠의 위선
영국의 전시 지도자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영국 의회에서 성격이 불같고 화를 참지 못하는 공격적 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일까, 처칠은 전쟁 초기부터 폭격기 공습을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처칠로부터 '폭격 면허장'을 받은 영국 공군은 한편으로는 중폭격기 생산을 늘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유공장이나 군수공장, 철도 등 군사관련시설물에 대한 정밀폭격에서 한 도시 전체를 목표로 삼은 '지역 폭격'으로 전술을 바꾸어 갔다.
'폭격기 해리스'가 앞장섰다. 독일 도시들은 하나둘씩 초토화됐고, 종전 3개월을 앞두고 드레스덴은 불지옥을 겪었다. (지난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독일 선전장관 괴벨스가 바삐 움직인 덕분에) 드레스덴 공습의 참상이 알려지자, 영국과 미국 안에서조차 논란이 됐다. '오랜 역사와 문화의 도시인 드레스덴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폭격할 이유가 있었느냐'는 논란이었다. 드레스덴이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큰 도시도 아닌데, 그런 도시를 마구잡이로 폭격해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비난의 화살이 영미 지도자들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해리스의 공습은) 비록 히틀러와 전쟁을 한창 벌일 때 대다수 영국민들에게 즐겁지 않은 만족감을 주기는 했어도, 국민 전체의 지지를 결코 누리지 못했다. 그 공습의 윤리성에 대해 영국 상원과 하원에서 의문들이 제기됐다. 영국 보수당 명가의 수장인 솔즈베리 후작은 '물론 독일인들이 그 짓을 시작했지만, 우리는 악마를 본받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7, 648-649쪽).
윈스턴 처칠은 드레스덴 공습을 둘러싼 영국 국내의 싸늘한 반응에 매우 곤혹스러워한 나머지, 비겁하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관련, 영국의 전쟁사가 앤터니 비버의 글을 보자.
[드레스덴과 더불어 독일 동부의 다른 교통 요충지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던 처칠은 전략폭격 작전의 '격렬함'에 겁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찰스 포털 영국 공군참모총장에게 '드레스덴 파괴는 연합군의 폭격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남긴다'는 메모를 보냈다. 포털은 이것이 매우 위선적이라 생각했고, 처칠에게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앤터니 비버, <2차세계대전: 모든 것을 빨아들인 블랙홀의 역사>, 글항아리, 2017, 1080쪽).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폭격기' 해리스
공군참모총장인 포털 대장은 왜 처칠의 메모가 '위선적'이라 여겼을까. 타고난 군인인 포털의 눈으로 본 처칠은 (스탈린을 의식해 드레스덴 공습을 재촉하고 승인해 놓고는) 나중에 다른 말을 밥 먹듯이 하는 '약삭빠른 정치가'로 여겨졌을 것이다. 처칠은 훗날 역사가들의 비난을 의식한 나머지 일종의 '면피용 소명자료'를 남기려고 그런 메모를 보낸 것으로 알려진다.
전쟁이 끝난 뒤 해리스의 폭격기사령부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처칠은 전쟁 승리를 알리는 방송에서 여러 부대 이름들을 꼽으면서도, 폭격기사령부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폭격기사령부 근무자들을 위한 종군 기장도 만들지 않았다. 해리스는 영국군의 다른 주요 사령관에게 주어지는 작위를 받지 못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을 '폭격기 해리스'는 들어보지 못 했을 테지만, 이런 경우가 그에게 딱 맞는 얘기일 듯하다. 5만5573명에 이르렀던 영국 폭격기사령부 소속 전사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7년이 지난 2012년이 돼서야 런던에서 열린 전몰자 추모식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추모를 받을 수 있었다.
민간인 희생에 사과 없이 침묵한 처칠
영국 보수당을 이끌었던 처칠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7월의 총선에서 노동당에 져 총리에서 물러났다. 히틀러에 맞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었지만, 많은 시민들은 처칠을 '평화와 재건에 적합한 정치인'으로 여기진 않았다.
총리에서 물러나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되자, 처칠은 회고록 집필에 들어갔다.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그의 여러 저작 가운데 하나가 <제2차 세계대전>이다. (원제목은 The Second World War. 워낙 두꺼운 분량이라서, 1959년에 축약본이 나왔다. 축약본의 한국어 번역본은 2016년 상하 2권으로 나왔다). 회고록에서 처칠은 연합군의 공습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썼다.
[(지상군과 마찬가지로) 연합군 공군 역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공군의 끊임없는 공격은 적군의 패배와 해체를 촉진했으며, 전력이 쇠퇴하고 있던 독일 공군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만들었다. 계속된 아군 중폭격기의 급습으로 독일의 정유 생산량은 위기를 맞았고, 그들의 수많은 비행장은 폐허처럼 변했다. 그리고 타격을 입은 수송체계는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렀다](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하, 까치, 2016, 1322쪽).
처칠은 회고록에서 ('폭격기 해리스'를 뺀 채로) 연합군 공군의 공을 길게 썼지만, 독일 민간인 학살에 대해선 슬그머니 넘어갔다. 연합군의 공습으로 집을 잃고 목숨마저 잃은 수십만 민간인들에 대해선 최소한도의 사과나 유감마저 나타내지 않았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 처칠은 미국에 몇 달 동안 머물며 웨스터민스터 대학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다. 그런 자리에서도 영국이 겪었던 고통과 전쟁의 승리만 얘기했을 뿐, 독일 민간인들이 겪었던 고통과 희생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다음 주엔 드레스덴을 비롯한 독일 공습과 관련, 미국의 전시 지도부를 비판적으로 들여다 볼 참이다. 이들은 전쟁 초반부엔 '군사적 목표물에 대한 정밀 폭격' 원칙을 지켜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후반부엔 사실상 '폭격기 해리스'의 공범으로 독일 도시들을 맹폭하면서 그곳 민간인들을 생명을 앗아갔다. 하나 차이라면, 일본에 그토록 퍼부었던 소이탄(네이팜탄)을 독일에선 쓰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인종차별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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