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에 하나, 외계인들이 지구 행성에서 지난 20세기와 21세기에 벌어진 전쟁을 지켜봤다면 어떤 생각들을 할까. 특히 민간인들을 겨눈 무차별 공습 행태를 두고 어떤 평가를 내릴까.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르는 저 생명체들은 줄곧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흉을 볼 것이 틀림없다.
1907년에 맺어진 헤이그협약 25조는 방어능력이 없는 도시, 마을, 건물들에 대한 어떠한 공격이나 폭격을 금지했다. 이를 어기는 것은 곧 전쟁범죄 행위다. 그러나 드레스덴 공습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질 못했다. 1949년 제네바협약 제4협약(정식명칭은 '전시에 있어서의 민간인의 보호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협약')은 민간인을 겨냥한 마구잡이 살상을 전쟁범죄라 못 박았다.
하지만 그 뒤로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렸다'는 말을 들은 B-52 폭격기의 융단 공습이나, 21세기를 사는 이즈음 팔레스타인 가자(Gaza) 지역에서의 이스라엘 공습이 단적인 보기다.
선전의 귀재 괴벨스, 드레스덴 한껏 이용
드레스덴 공습을 둘러싼 논란에서 독일 선전장관(공식직함은 대중계몽선전국가부 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를 빼놓을 수 없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권력을 잡던 1933년 이래 나치 정권의 선동 선전을 맡았던 괴벨스는 뛰어난 대중연설 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설파하면서 독일 국민들의 정신세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독문학박사인 괴벨스의 언변은 괴팍하고 고집스런 히틀러조차 사로잡을 만큼 뛰어났다. 건축가 출신으로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던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이 남긴 회고록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괴벨스는 다듬어진 화술, 능란한 언변의 소유자였고 적재적소에서 풍자를 사용했으며, 히틀러가 기대하는 부분에서 정확히 칭송의 말을 할 줄 알았다. 필요할 때는 감상적인 대화도 서슴지 않았고, 가십이나 연애사건 등 다양하고 폭넓은 화제를 다루었다. 그에게는 연극, 영화, 옛날이야기 등 모든 것을 능란하게 조합해내는 재주가 있었다](알베르트 슈페어, <기억>, 마티, 2007, 448-449쪽).
선전·선동의 귀재답게 괴벨스는 드레스덴의 비극적 상황을 독일에 유리한 쪽으로 교묘히 이용했다. 드레스덴 경찰부는 드레스덴 공습 사망자가 2만5천 명이라는 보고서를 상부에 올렸다. 괴벨스는 스위스와 스웨덴 등 중립국 기자들을 불러 모아, 20만 명의 무고한 시민을 죽인 영·미 연합군의 공습은 '명백한 전쟁범죄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희생자 숫자가 20만이라면, 경찰 보고서의 숫자에다 0을 하나 덧붙여 부풀린 셈이었다.
중립국 언론 움직여 잡은 '세 마리 토끼'
괴벨스의 기만적 선전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상원의원 하이램 존슨이 '전쟁이 터지면 첫 희생자는 진실'(The first casualty when war comes, is truth)이라 했던 말을 떠올린다(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2005년 독일역사학자위원회는 사망자 숫자를 '2만 5000명보다는 확실히 적은 1만 8,000명 정도'라고 발표했다).
괴벨스의 주장을 기사로 옮긴 중립국 언론들을 통해 드레스덴의 참극은 전세계로 알려졌다. 당시 미국과 영국의 신문들은 '드레스덴은 더 이상 없다'(Dresden is no longer there) 또는 '드레스덴은 사라졌다'(Dresden is obliterated)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기사를 읽던 서구사회의 시민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히틀러를 혐오하고 나치 독일을 미워했지만, 드레스덴 시민들이 무참하게 죽어간 사실에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민간인 대량살상을 못 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우리가 짐승인가'라는 말을 탄식처럼 내뱉었다. 곧 적국인 영국과 미국 안에서조차 '드레스덴에선 너무 했다'는 이야기들이 퍼져나갔다.
선전활동을 통해 괴벨스는 세 마리 토끼를 잡았다. △적국의 여론을 독일에 동정적인 쪽으로 바꾸었고, △대공 방어망을 제대로 구축해놓지 못한 잘못으로 자국 시민들이 희생됐다는 국내적 불만을 잠재웠고, △전쟁에 냉소적이거나 비협력적이었던 독일 시민들의 투쟁의지를 북돋았다. 괴벨스는 '우린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고 외치며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는 한편으로, 페인트공들을 동원해 베를린 시내 곳곳에다 '복수는 우리의 미덕, 증오는 우리의 임무'라는 구호를 휘갈겨 쓰도록 했다(드레스덴 공습 열흘 전에 베를린도 엄청난 공습 피해를 입었다. 본 연재 47 참조).
"폭격기 포로들을 보복 처형하자"
드레스덴 공습 소식을 듣는 순간 괴벨스는 눈물이 솟구치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고 알려진다. 그는 히틀러에게 달려가 드레스덴 공습에 맞선 대응조치로, '영국과 미국 전쟁포로들을 처형하자'고 제안했다. 너무 흥분했을까, 그는 '죽은 민간인 숫자만큼 독일에 잡혀 있는 연합국 포로들을 죽이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폈다. 전쟁포로 학살은 1929년에 맺어졌던 제네바 제3협약(포로의 대우에 관한 협약)을 어기는 중대한 전쟁범죄라는 사실을 괴벨스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는 '협약 파기를 해서라도 포로를 처형한다면, 공습이 그칠 것'이라 우겼다.
[적국 폭격기 조종사들이 '수십만 명의 비전투요원들'을 최단 시간 안에 죽일 수 있다면, 그 제네바협약은 이미 무의미해진 것이다. 그 협약은 보복조치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독일이 자신을 지킬 수 없게 한다. 협약을 파기한다면, 독일 수중에 떨어진 모든 폭격기 승무원들에 대해 즉결재판을 열고, 저항할 수 없는 민간인들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그러한 조처는 서방 열강들이 어쩔 수 없이 폭탄 테러를 중단하도록 할 것이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교양인, 2006, 876쪽).
괴벨스와 마찬가지로 다혈질인 히틀러도 연합군 포로 처형론에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빌헬름 카이텔 육군 원수, 카를 되니츠 해군제독,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 등은 신중론을 펴는 바람에 제동이 걸렸다(앤터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 글항아리, 2017, 1081쪽 참조).
포로 처형을 둘러싼 여러 말들이 오간 끝에 히틀러는 제네바협약을 비롯한 전쟁 관련 국제협정의 파기가 가져올 장점과 문제점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구성된 임시 위원회는 괴벨스의 뜻과는 달리 '전쟁포로들을 처형하는 조치를 취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였고, 끝내 괴벨스의 광기는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만에 하나 히틀러가 괴벨스의 주장에 따라 포로 처형을 명령했다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이 문제가 큰 비중으로 다뤄졌을 것이다.
드레스덴 공습 뒤 괴링 제거 꾀해
독일을 겨눈 연합군의 공습이 거듭될수록 누구보다 위기를 느낀 이는 제3제국의 2인자로 행세하던 헤르만 괴링(1893-1946)이었다. 그는 독일 공군사령관 출신으로 원수(元帥) 계급을 지녔기에 독일 방공망을 허물어진 데 대한 책임이 컸다.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이 남긴 회고록에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보인다.
[연합군의 대량공습은 수주일간 계속되었지만 독일군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괴링의 입지가 더욱 약화되었다. 만일 괴링의 이름이 집중적으로 거론된다면, 히틀러는 괴링의 실수와 공중전을 위한 계획의 부재에 새삼 분노를 쏟아 부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폭격이 계속되면 도시가 파괴될 뿐 아니라, 국민의 사기도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떨어질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알베르트 슈페어, 448쪽).
히틀러가 괴벨스와 슈페어 두 사람만을 따로 불러 저녁식사를 했을 때 일어난 일도 눈길을 끈다. 식사 뒤 벽난로 앞에서 셋이서 느긋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뉘른베르크가 공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러자 히틀러는 즉시 괴링의 수석보좌관 보덴샤츠 준장을 불러들였다. 슈페어의 표현에 따르면, 잠을 자다가 히틀러 앞에 불려온 보덴샤츠는 가엾게도 '무능력한 제국 원수' 대신에 신랄한 비판을 들어야 했다(알베르트 슈페어, 449쪽).
괴벨스도 헤르만 괴링을 못 마땅하게 바라봤다. 모르핀에 중독된 괴링을 '기생충'이라 여겼다. 그는 일기장에 '괴링은 나치주의자가 아니라 '쥐바리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쥐바리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나오듯이, 파티 때 먼저 먹은 것을 게우기까지 하면서 배를 비워가며 식도락을 즐긴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고대 그리스 시민들을 가리킨다). 드레스덴 공습을 겪은 뒤 괴벨스는 괴링이 공습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군사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라면 연합군의 폭탄테러에 책임을 져야할 그 무위도식자를 특별재판소에 세울 것이다.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광대나 향수를 뿌리고 옷을 쫙 빼입고 우쭐거리는 바보가 전쟁을 지휘할 수는 없다. 스스로 자신을 바꾸든지 아니면 제거돼야 한다](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877쪽).
드레스덴 공습은 괴벨스의 권력쟁취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공습 바로 다음날 베를린 교외의 한 병원에서 후두염 치료를 받고 있던 하인리히 힘러(친위대와 비밀경찰 총수)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새로운 나치 지도부를 짜야 한다." 그럴 경우 괴벨스 그 자신이 제국총리 직을 맡고, 힘러는 국방군 총사령관, 히틀러의 수석보좌관인 마르틴 보어만이 당 총재가 되고,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한 히틀러는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는 역사적 위인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물론 괴벨스의 아이디어는 탁상공론에 그쳤다).
괴벨스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드레스덴 공습 뒤 괴벨스는 영국과 미국에 대한 증오심이 너무 큰 나머지 소련을 상대적으로 더 좋게 여겼다. 선전장관으로서 볼셰비키와 소련을 악마화하면서 비난을 거듭해왔던 괴벨스였다. 하지만 드레스덴 공습 뒤 그의 눈에 비친 스탈린은 (독일 도시들을 겨냥해 잇달아 엄청난 공습을 해대는) '영미의 미치광이 살인자들'보다는 더 현실적인 지도자로 보였다(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878쪽 참조).
(드레스덴의 끔찍한 상황을 이용해 세 마리 토끼를 잡았던 '선전의 귀재' 궤벨스도 전쟁 막판의 냉혹한 현실을 비껴갈 수 없었다. 스탈린의 군대가 베를린의 히틀러 지하 벙커로 다가오자, 그곳에서 온가족과 함께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괴벨스의 가족사진을 보면, 재혼한 부인 사이에 1남 5녀를 두었고, 모두 어린 나이였다. 괴벨스야 '나치의 나팔수'로서 지은 죄가 크지만, 그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싶다.)
폭격기 해리스, "폭격으로 승리 이끌겠다"
드레스덴의 공습과 관련, 괴벨스와 더불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의 인물이 아서 해리스(1892-1984)다. 1942년 2월22일 영국 공군 전략폭격기사령관에 올랐을 무렵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폭격으로는 전쟁에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 단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제 대답입니다. 두고 보세요"(존 키건,<제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7, 633쪽).
해리스의 이 말에서 '내가 폭격으로 승리를 가져 오겠다'는 결의가 물씬 묻어난다. 그의 별명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가 생겨난 이유다. 문제는 그가 독일의 군수공장이나 종합석유공장 같은 산업시설을 겨눈 폭격보다는 도시 지역 폭격에 집착함으로써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는 점이다. 해리스는 '산업시설물을 공격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이냐'고 조롱하면서 지역폭격을 고집했다. 도시의 민간 주거지역을 공습하면 할수록 독일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끝내 승리를 가져온다는 위험한 신념을 내보였다. 이런 해리스를 영국 역사학자 존 키건은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아서 '폭격기' 해리스는 야비한 외골수 지휘관이었다. 그에게는 (도시 주거민들을 무차별로 폭격해 죽이는) 지역폭격 정책의 정당성에 대한 지적인 의심도, 도덕적인 가책도 없었다. 폭격기 대수를 늘리고 (항법장치, 조준기 등) 폭격전문 보조기구를 세련화하고 (적 상공에서 알루미늄 은박지를 공중에 뿌려 대공포 공격을 비껴가는) 기만책을 정교하게 만드는 등 온갖 수단을 다해서 지역폭격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노력했다] (존 키건, 632쪽).
정밀 폭격에서 지역폭격으로 간 이유
전쟁 초반만 해도 영국 공군은 '전략 폭격'이란 이름 아래 도시 전체를 겨냥한 '지역 폭격'보다는 군사 시설과 관련된 특정 목표물을 공격하는 '정밀 폭격'을 하려 했다. 문제는 영국 공군이 폭격기를 몰고 나갔을 때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1940년 9월3일 처칠총리는 내각 회의석상에서 '독일에 폭탄을 수출하는 엉성한 화물 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을 정도였다.
희생도 컸다. 주간 폭격의 경우 폭격기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장거리 호위 전투기가 영국 공군에 없었다. 영국군 폭격기들이 독일 상공에 이르면, 독일 전투기와 대공포화가 기다리다가 이들을 제물로 삼곤 했다. 1941년에 폭격기 700대가 떨어졌다. 죽은 항공대원 숫자가 폭격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 숫자보다 많았을 정도였다. 대원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려고 많은 경우 독한 술에 기댔다.
주간 폭격에서 영국 공군의 손실이 크자, 야간 폭격으로 돌아섰다. 여기서 생기는 또 다른 문제는 지정된 목표물을 찾아내 정확히 폭탄을 떨어트리기가 어려운 점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항법장비의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폭격수들은 표적에서 한참을 빗나간, 엉뚱한 곳을 폭격하기 돌아오기 일쑤였다.
1941년 8월, 처칠의 명령으로 총리 보좌기관인 내각관방 간부인 데이비드 버트가 이 문제를 파헤쳤다. 버트는 공습 전후의 정찰사진 수백만 장을 대조해가며 공습 효과를 살펴봤다. '버트 보고서'에 드러난 공습 성적표는 형편없이 낮았다.
[조건이 좋은 달밤이라도 목표를 발견한 경우는 40%, 달이 없을 때는 15대 중 불과 1대였다. 그리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던 폭격기조차도 목표의 8km 이내에 폭탄을 투하를 수 있었던 경우는 불과 3분의 1이었다. 참담한 보고에 처칠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지만, 공군은 처칠을 달래는 한편 정밀도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지역폭격을 강화하도록 진언했다](아라이 신이치, <폭격의 역사>, 어문학사, 2015, 112-113쪽).
위 보고서는 독일 공업의 심장부이기에 폭격의 주요 목표지점인 루르 공업지대 상공에 들어간 폭격기는 10대 중 1대 꼴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존 키건, 631쪽). 크게 창피를 당한 영국공군은 야간 폭격을 이어 가되, '정밀 폭격'에서 '지역 폭격'으로 공격 범위를 넓혀 활로를 찾으려 했다.
"제국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
1942년 2월 영국공군 총사령부는 '이제 적국의 민간인 인구, 특히 공업노동자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지령문을 내놓았다. 정유공장이나 군수공장, 철도 등 군사관련 특정 시설물에 대한 정밀폭격에서 인구 밀집지역인 도시의 주거지역에 폭탄을 떨어트리겠다는 쪽으로 폭격 전술의 변화가 이뤄졌다. '폭격기 해리스'가 영국 폭격기사령부의 지휘권을 잡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해리스를 비롯한 영국 공군 간부들은 '만약 4,000대의 중폭격기 부대가 만들어지고 이 방법으로 출격한다면, 전쟁은 6개월 이내에 끝날 것'이라고 여겼다(아라이 신이치, 113쪽). 1942년 여름 독일 상공에서 뿌려진 영국군 전단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독일을 폭격하고 있다. 도시에서 도시를 더 맹렬하게 폭격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들이 전쟁을 멈추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목적이므로 우리는 후회하지 않는다. 밤낮으로 우리는 출격할 것이다. 제국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당신들 근처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들의 집을, 당신들을 직접 공격할 것이다](아라이 신이치, 113쪽).
이 전단에 적힌 내용은 마치 도쿄를 비롯한 일본 주요 도시들을 마구 폭격함으로써 군수공장 노동자 등 전시 노동인력을 없앤다는 명분을 내걸었던 커티스 르메이(미 육군 제21폭격단 사령관)를 떠올린다(본 연재 40 참조). 새 사령관 해리스에게 큰 힘이 된 것은 그의 취임 무렵에 모습을 드러낸 신세대 폭격기 랭카스터였다. 폭탄 적재량과 항속거리가 이전의 다른 폭격기들보다 엄청나게 늘어났고, 독일 전투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도 버틸 수 있는 다부진 맷집을 지녔다.
폭격기 해리스, 도살자 해리스
해리스의 사령관 취임 뒤 독일 도시에 대한 야간 공습이 본격화됐다. 1942년 3월 발트해의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 뤼벡이, 4월엔 발트해의 또 다른 중세도시 로스톡에 소이탄 불세례를 쏟아 부었다. 두 도시의 고풍스런 가옥들은 잿더미가 됐다. 그래 5월엔 쾰른을 폭격기 1,000대로 공격했다.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이 도시는 쾰른성당만 빼고 나머지 시내 전지역이 불에 탔다. 지난주에 살펴본 함부르크 폭격(1943년 7월)은 해리스가 지시한 독일 도시 공습의 한 보기일 뿐이다. 해리스 경력의 정점은 1945년 2월의 베를린 공습과 드레스덴 공습이다.
'폭격기 해리스'란 별명을 지닌 해리스의 또 다른 별명은 '도살자 해리스'(Butcher Harris)다. 사령관 해리스가 폭격기 승무원들을 '소모품'처럼 여기고 부하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내부의 불만이 그런 별명에 담겼다. 출격 횟수가 늘어지면서 그에 따른 희생도 쌓여갔다. 전쟁 기간 중 전사한 폭격기 승무원은 5만 5,000명을 넘어섰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영국군 장교 숫자보다 많다. 대공포망에 걸려 격추되면, 지상에서 기다리는 적국 주민들에게 붙잡혀 피투성이가 되도록 뭇매를 맞았다.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보자.
[폭격에 참여했던 12만 5000명의 영국 항공대원 중 5만 5573명이 사망했다(사망률 45%). 미국 제8비행단은 2만 6000명의 전사자를 냈다. 약 350명의 연합군 항공대원은 추락한 뒤 린치를 당하거나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 민간인 사망자 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약 50만 정도로 집계된다](앤터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 2017, 1081쪽).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했어도 영국 폭격기사령부 소속 군인들은 정작 전쟁이 끝난 뒤 푸대접을 받았다. 사령관 해리스도 처칠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이에 대해선 다음 주 글에서 살펴보려 한다.
오늘 글에서 드레스덴 공습에 관계된 두 문제의 인물을 살펴봤다. 괴벨스가 가진 무기는 입(선전·선동 능력)이었고, 해리스는 폭격기였다. 둘 다 승리를 위해선 타인의 고통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적에 대해선 광기에 가까운 증오심을 보였고,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감도 떨어졌다. 해리스는 독일 국민을, 괴벨스는 유대인을 벌레처럼 여겼다.
괴벨스는 헤르만 괴링을 제치고 권력 서열 2위를 노렸지만 전쟁에서 져 자살했고, 해리스는 전쟁에서 이겼지만 '학살자' '도살자'란 비난을 받았다. 둘 다 역사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글이 길어져 상·중·하로 나누었다. 다음 주엔 독일 4분할 점령에 합의했던 얄타회담(1945년 2월4~11일) 이틀 뒤에 벌어졌던 드레스덴 공습과 소련의 스탈린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연합국의 두 전쟁지도자(루스벨트와 처칠)는 공습에 대해 어떤 입장을 지녔는지, 아울러 '폭격기 해리스'와 그의 부하 폭격수들은 전쟁 뒤 왜 버림받았는지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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