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의 공습으로 독일의 많은 도시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1945년 초까지만 해도 드레스덴에 대한 공습은 없었다. 그렇기에 독일의 중상층 가운데 일부는 드레스덴을 안전지대로 여기고 그곳을 임시 거처 삼아 많이들 옮겨 갔었다. 또한 그곳에는 소련군의 진격을 피해 많은 난민들이 들어와 있었다. 문제는 누가 봐도 전쟁의 운동장이 기울어 독일의 패전이 멀지 않은 시점에서 마구잡이 폭격으로 수만 명의 민간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드레스덴의) 상황은 화염폭풍이 몰아쳤던 함부르크, 다름슈타트 등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끔찍했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체는 불에 타서 쪼그라들었고, 지붕에서는 납이 녹아내려 쏟아졌으며, 도로에는 아스팔트가 녹아 사람들은 파리끈끈이에 달라붙은 것처럼 오도 가도 못하고 죽었다](앤터니 비버, <2차세계대전: 모든 것을 빨아들인 블랙홀의 역사>, 글항아리, 2017, 1080쪽).
[공기가 점점 더 빨리 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공 토네이도였다. 풍속 150km 이상의 폭풍이 드레스덴에서 인간과 도시의 잔해를 섭씨 1000도 이상의 온도로 불타는 오븐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불길은 모든 유기물, 불에 타는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수만 명이 불타고, 질식해 죽었다](자크 파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오월의 봄, 2017, 196쪽).
위에 옮긴 두 개의 글은 1945년 2월13일에서 14일에 걸쳐 독일 동부 드레스덴에서 영국과 미국의 연합 공습이 벌어진 뒤의 처참했던 순간을 보여준다. 인용문 가운데 '드레스덴'이란 단어가 보이지 않았다면, 독자분들은 아마도 도쿄 공습(1945년 3월10일)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떠올렸을 것이다(도쿄 공습에 대해선 본 연재 40 참조).
독일 민간인 60만 공습으로 사망
전쟁사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군인 전사자는 400만 명으로, 공습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 희생자 규모를 50~60만 명쯤으로 추산한다. 영국의 전쟁사가 앤터니 비버는 원서의 두께만 해도 880쪽에 이르는 <The Second World War>(2013, 국내 번역본은 <제2차 세계대전: 모든 것을 빨아들인 블랙홀의 역사> 글항아리, 2017)에서 공습 희생자를 50만 명쯤으로, 같은 영국의 전쟁사가 존 키건은 (출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59만 3,000 명이라 썼다(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877쪽).
연합국은 파괴력과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새로 개발한 네이팜탄(소이탄)을 전체 폭탄량의 절반 넘게 투하했다.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네이팜탄은 1945년 3월 미군이 도쿄 공습을 벌일 때도 엄청난 파괴력을 보였다. 공습으로 비롯된 사망자는 독일과 일본이 각기 60만 명쯤으로 엇비슷하다.
독일 도시들은 1940년대 전반기 내내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지만, 일본에 대한 공습은 1945년에 집중됐다. 독일에 견주어 일본의 공습 기간이 짧은데도 사망자가 거의 같은 것은 두 방의 핵폭탄(히로시마 14만, 나가사키 7만)과 목조 건물이 독일보다 많은 까닭이었다(일본 사망자 통계는 본 연재 46 참조).
공습 공포로 생리 현상 끊긴 런던 여성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독일은 영국의 군사시설물을 겨냥하며 공습을 하긴 했지만, 런던 주거지역에 대한 폭격은 삼갔다. 아돌프 히틀러는 폭격의 효과보다는 반작용이 더 클 것이라 판단했다. 영국의 전시지도자 윈스턴 처칠도 같은 생각이었다. 적의 사기를 떨어트리기는커녕 오히려 전투 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여겼다.
그런데 작은 사건 하나가 상황을 악화시켰다. 1940년 8월24일 밤 런던 외곽의 군사 목표물을 폭격하려던 독일 폭격기가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폭탄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몇 채의 집이 불타고 인명 피해가 생기자, 윈스턴 처칠 총리는 곧바로 보복 폭격을 하라고 명령했다. 40대의 영국 폭격기 출격했고, 베를린이 처음으로 폭격을 받았다.
히틀러는 분노했다. 1940년 9월4일 한 정치집회에서의 연설에서 이렇게 외쳤다. "영국이 2톤, 3톤의 폭탄을 떨어트리면, 우리는 150톤, 300톤을 투하하겠다. 그들이 우리 도시를 공격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도시를 완전히 쓸어버리겠다." 사흘 뒤(9월7일)부터 독일 공군의 폭격이 벌어졌다. 런던, 리버풀, 맨체스터, 포츠머스, 사우샘프턴, 버밍햄, 선더랜드, 뉴캐슬을 비롯한 영국의 많은 도시들이 공습 피해를 입었다.
특히 런던은 50일 동안 끊임없이 공습을 받았기에 피해가 컸다. 사망자 6만 명 가운데 런던에서만 3만 명으로 전체 희생자의 절반에 이르렀다. 공습이 주는 심리적 부담은 엄청났다. 당시 런던의 많은 여성들은 공습의 공포로 생리 현상이 끊겼다고 알려진다.
독일에 150만 톤의 폭탄 퍼부어
하지만 독일이 전쟁 중반부에 수세 국면으로 들어서자, 상황이 뒤바뀌었다. 영·미 공군의 폭격량은 지난날 독일 공군의 폭격량을 훨씬 뛰어넘었다. 1940년 5월부터 9월까지 독일 공군이 런던에 떨어트린 폭탄의 총량은 1만8000톤이었지만, 1944년 영국이 독일에 퍼부은 폭탄은 총량은 50만 톤에 이르렀다. 연합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 독일에 무려 150만 톤의 폭탄을 쏟아 부었다(넷플릭스 전쟁다큐,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드레스덴 편 참조).
연합군의 잇단 공습으로 주요 전쟁물자들을 생산 공급하던 독일 함부르크, 독일 남부의 수도 슈투트가르트 같은 대도시들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서부 루르 공업지대와 그 주변의 28개 소도시들 모두 연합군 공군기의 맹폭을 받았다. 오랜 문화유산을 지닌 소도시들도 공습을 피하지 못했다. '독일의 베르사이유'로 일컬어질 정도로 프러시아 왕들의 궁전이 몰려 있는 포츠담, 바그너 축제가 열리던 바이로이트 등도 그라운드 제로가 됐다.
특히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는 U-보트 잠수함 기지와 다이너마이트 공장 등 주요 전쟁시설들이 몰려 있어 집중 공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43년 7월25일부터 8월2일까지 1주일 넘게, 밤에는 영국군 폭격기들이, 낮에는 미국군 폭격기들이 번갈아 가며 함부르크를 두들겼던 그때의 상황을 보자.
[폭격으로 인한 사망은 대부분 일산화탄소 중독이나 질식사였다. 산 채로 불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풍으로 어머니의 팔에서 아기가 떨어져 나가 화염 속에 내던져졌다. 4만5000명 희생자의 절반이 여성이고, 남성의 대부분은 고령자였다. 3000대 이상의 폭격기가 출동해 9000톤 이상의 폭탄을 쏟아 부었다](아라이 신이치, <폭격의 역사: 끝나지 않는 대량학살>, 어문학사, 2015, 119쪽).
히틀러, "런던을 거대한 불꽃으로 만들어야"
히틀러의 총애를 받아 1942년 2월 군수장관에 임명된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는 '히틀러의 건축가'로 알려진 인물이다(본 연재 32 참조). 전시 독일의 무기 생산을 총괄하면서 조국의 승리를 위해 그 나름 애를 썼고, 그 때문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20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형기를 다 채우고 출소한 뒤에 그가 펴낸 회고록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Inside the Third Reich, 독일어 초판 1969년)에서 함부르크 공습 관련 대목을 보자.
[첫 공격으로 수돗물 보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그 뒤 일어난 화재는 소방 당국도 진압할 방법이 없었다. 화재는 화염의 폭풍으로 변했고 아스팔트는 녹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지하실에서 질식하거나 거리에서 불에 타 숨졌다. 연이은 폭격으로 거대한 지진에나 비유될 만한 엄청난 피해를 불러왔다. (중략) 1940년 히틀러와 괴링이 런던을 목표로 구상했던 계획이 함부르크에서 현실화되고 말았다](알베르트 슈페어, <기억>, 마티, 480-481쪽).
슈페어가 말하는 '1940년 히틀러와 괴링(독일 공군참모총장)이 런던을 목표로 구상했던 계획'이란 우리가 잘 아는 '런던 대공습'을 가리킨다. 총통 관저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을 때 히틀러 혼자서 목청 높이 떠들며 밝혔던 '파괴에 대한 열망'을 슈페어는 이렇게 전한다.
[런던 지도를 본 적이 있나? 집을 하도 빽빽이 지어 놓아서 한 번의 폭격으로도 도시 전체를 다 태울 수 있을 것 같더군. 괴링은 신형 소이탄을 대대적으로 떨어뜨려 런던 전체를 불태우자고 했지. 온도시가 불길에 휩싸이는 거야. 곧 런던은 하나의 거대한 불꽃으로 바뀌겠지. 괴링의 생각이 옳아. 소이탄이 좋을 거 같군. 런던의 완전한 파괴라...곳곳에서 불이 나기 시작하면 소방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알베르트 슈페어, 481쪽).
히틀러의 런던 파괴 구상은 (영국 공군이 치열한 공중전과 방공망으로 맞서면서)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전세가 뒤집히면서 히틀러의 파괴 열망은 꺾였다. 오히려 함부르크 같은 독일 주요 도시들이 공습을 겪게 됐다. 군수장관 슈페어는 함부르크의 파괴상에 큰 충격을 받았고, '앞으로 이런 식의 공격을 몇 번 더 받으면 주요 군수시설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우울한 보고를 히틀러에게 올려야 했다.
무차별 공습, 누가 더 죄가 많은가
함부르크 공습에선 특히 어린이들과 고령자의 피해가 컸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그 밑에 깔리거나 불에 타거나 숨이 막혀 죽는 참극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야말로 불지옥이 따로 없었다. 영미 연합군 공습작전의 이름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죄악의 도시 '고모라'였다(공습을 하는 쪽에선 죽은 민간인들이 나치 히틀러를 지지했던 죗값을 받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런 무차별 공습을 마구 저질러도 되는 것인지, 나아가 어느 쪽이 더 죄가 큰지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영미 연합군의 공습은 함부르크에 그치지 않았다. 베를린도 주요 공습목표였다. (드레스덴 공습 열흘 앞인) 1945년 2월3일, 베를린 상공에는 900대 이상의 B-17 폭격기가 나타나 주요 시설물들을 파괴했다. 폭격기와 함께 출격한 전투기는 수송시설들을 겨냥해 기총소사를 퍼붓기도 했다. 연합군은 군사 목표물로 범위를 특정해서 정밀 폭격을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공습으로 베를린 시민 2만 5,000명이 죽은 것이 말해주듯, 무차별 폭격이나 다름없었다.
소도시들도 공습을 피해가지 못했다. 바이에른주의 아름다운 소도시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가 있는 비르츠부르크는 군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공습을 피하지 못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비르츠부르크를 비롯해 군사 전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도시들을 공습해 민간인 피해를 늘리는 행위였다. 우리가 살펴볼 드레스덴공습이 대표적인 보기다.
소이탄 불지옥으로 바뀐 '독일의 피렌체'
드레스덴은 독일 동부 작센주의 중심 도시로, '독일의 피렌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다. 엘베 강을 사이에 두고 우아하고 고풍스런 건축물들은 오랫 동안 여행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왔다. 신성로마제국에 속하는 지방 국가였던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로 가꿔졌기에 드레스덴은 르네상스 이래의 오래된 문화유산을 지닌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들 가운데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혔다. 이 멋진 도시가 독일 항복 3개월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불바다가 됐다.
기독교에서 사순절이 시작하는 참회의 화요일과 재의 수요일 사이에 먼저 두 번에 걸쳐 영국 공군(RAF) 랭커스터 중폭격기 722대의 폭격이 이뤄졌다. 다음날 아침 미 육군항공대(USAAF)의 B-17 중폭격기 527대가 잇달아 폭격에 나섰다. 세 차례에 걸친 공습에서 3900톤 넘는 폭탄이 드레스덴 시내 주거지에 떨어졌다. 폭탄의 50% 이상은 마그네슘, 인, 젤리로 가공된 석유 등 인화성이 강한 화학물질로 채워진 소이탄(네이팜탄)이었다.
그 소이탄을 여러 개 묶어 용기 하나에 넣은 집속탄이 화재폭풍을 일으키자, 드레스덴 시민들은 그야말로 불지옥을 겪었다. 7만8000채의 가옥이 불타 무너졌고, 오랜 역사를 지닌 석조 건축물들도 파괴를 피하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의 언론들은 자국의 전쟁지도부에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독일의 패전을 코앞에 두고 민간 주거지역을 겨냥해 너무 심한 폭격을 퍼부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동독 시절엔 복구 못하고 방치
드레스덴 희생자 규모는 공습을 받았던 다른 도시들에 견주어 보면 아주 크지는 않다. 드레스덴 공습이 논란을 부른 것은 전쟁 끝 무렵에 군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도시의 비무장 민간인들이 마구잡이로, 그것도 끔찍한 방법으로 희생됐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드레스덴 공습의 희생자 규모는 2만5000명 쯤으로 알려져 왔다. 정설처럼 굳어진 이 숫자는 다시 바뀌었다. 드레스덴 참사 60년을 맞았던 지난 2005년 독일역사학자위원회는 사망자 숫자를 '2만5000명보다는 확실히 적은 1만8000명 정도'라고 발표했다.
몇 해 전에 드레스덴에 가보니, 아직도 곳곳에서 복구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 뒤 1990년 10월3일 동서독이 하나로 되기 전까지 드레스덴은 동독에 속했다. 동독 정부는 재정 문제 등으로 드레스덴의 옛모습 복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질 못했다. 복구 기간이 길어진 원인 가운데 하나는 워낙 도시 자체가 철저히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곳 사람들의 얘기다. 드레스덴이 옛모습을 조금씩 찾아간 것은 1990년 독일 통일 뒤부터였다.
다행히도 드레스덴이 원형으로 복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 화가가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풍경화가 베르나르도 벨로토(1720-1780)은 이탈리아와 동유럽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아주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그린 그림들을 남겼다. 드레스덴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독일은 벨로토의 그림들을 청사진 삼아 드레스덴의 옛모습을 복원해왔다(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877쪽 참조).
"아무 의미도 없는 학살"
드레스덴 공습을 두고 많은 논란과 비판이 따랐다. 첫째, 드레스덴 폭격이 정당했느냐는 논란이다. 공습을 옹호하는 쪽에선 '독일이 전에 저질렀던 런던 공습이나 로테르담 공습에 대한 보복조치로 이뤄진 것이므로 정당하다'는 주장을 편다. 영국의 전쟁사가 앨런 테일러(전 옥스포드대 강사)는 '드레스덴은 그동안 독일의 다른 도시들이 거듭해서 받았던 공습과 다를 바 없었고, 많은 다른 도시들이 받았던 폭격의 정도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더 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A.J.P 테일러,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페이퍼로드, 2020, 396-397쪽).
공습을 받았던 다른 도시들에 견주어 피해가 상대적으로 더 심하지 않았다'는 테일러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드레스덴 공습은 전쟁 끝 무렵에 많은 민간인들에게 끔찍한 죽음을 안긴 학살 행위이자 전쟁범죄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벨기에 태생의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자크 파월은 드레스덴 공습을 옹호하는 테일러의 주장에 맞서 이런 반론을 편다.
[(독일의 공습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는 설명은 말이 안 된다. 1940년 독일공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파괴된 그 도시들에 대한 대가는 1942년, 1943년, 그리고 1944년에 베를린, 함부르크, 쾰른을 비롯한 셀 수도 없는 많은 독일의 크고 작은 도시들에서 이미 값비싸게 치렀기 때문이다. 또한 1945년에는 영국과 미국의 지휘관들은 아무리 맹렬한 폭격 공격도 '독일군을 위협하여 굴복시키는 데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작전 입안자의 동기로 삼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드레스덴 폭격은 아무 의미도 없는 학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크 파월, 197-198쪽).
군사 목표물을 비껴간 '트리스마스 트리'
둘째, 드레스덴이 그렇게 맹폭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느냐는 논란이다. 비판론자들은 '독일의 피렌체'라 일컬어지던 엘베강변의 아름답고 고풍스런 멋을 지닌 도시가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에 군사적으로나 산업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연합군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거나 '테러 폭격을 했다'는 비난을 무릅써가며 그렇게 엄청난 공습을 파상적으로 벌여 논란을 일으킬만한 곳이 전혀 아니라는 얘기다.
드레스덴 공습 작전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물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프레데릭 테일러는 드레스덴을 다룬 그의 책 <Dresden: Tuesday, February 13, 1945>(Harper, 2004)에서 '드레스덴이 보충 병력이 오가는 철도 교통의 요충지였고, 그곳에 군수공장과 작업장들이 있었기에 공습 그 자체는 필요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편다. 실제로 드레스덴에는 소총과 기관총을 만드는 군수공장과 전차 상륙함을 만드는 공장도 있었다.
테일러에 따르면, 드레스덴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여러 조건들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 했다. 다시 말해, 영국 공군의 폭격 효율성이 높아졌고, 기상조건이 좋았고, 독일의 대공방어망이 허술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그동안 드레스덴은 공습이 없었기에. 그곳에 있던 방공포들은 대부분 동부전선으로 옮겨졌다). 연합군의 손실은 랭커스터 6기, B-17 1기에 그쳤다.
테일러의 설명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결과는 딴판이었다. 드레스덴 공습은 시내 주거지에 집중됐고, 도시 변두리에 자리 잡은 독일군 비행장과 군수공장들은 전혀 공격을 받지 않았다. 영국군 폭격기를 앞서 이끌던 선도기는 공습 목표임을 알려주는 녹색 섬광 조명탄을 정작 중요하다고 할 만한 군 관련 시설물이나 철도역에 떨어뜨리지 않았다(당시 독일인들은 낙하산에 매달려 천천히 내려오는 조명탄을 '크리스마스 트리'라 불렀다).
방공호에 고인 녹색 액체
선도기가 떨어뜨리는 조명탄은 철도역 북쪽에 있는 도시 안으로 집중됐고, 폭격도 그에 따라 이뤄졌다. 시가지엔 엄청난 불길이 번져 나갔다. 철도역은 아주 작은 피해만 입었고 곧장 복구가 됐다. 이렇듯 폭격이 드레스덴 시내에 집중됐다는 것은 도심의 비무장 시민들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폭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한 시민의 증언을 옮겨본다.
[무서운 광경을 보았다. 불에 탄 어른이 어린아이 크기로 줄어들었다. 가족 전부가 불에 타 죽기도 했다. 불이 붙은 채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불에 탄 자동차는 죽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니는 사람도 많았고, 가는 곳마다 불, 불뿐이었다. 화염 폭풍의 열풍이 사람들을 화염에 휩싸인 집으로 밀어 넣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했다](아라이 신이치, 129쪽).
화염 폭풍의 열기가 엄청나기 뜨거웠기에 시내에서 가장 큰 방공호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 공습 7시간 뒤 구조대가 방공호 문을 열었을 때, 그 안에 있던 1,000명쯤의 사람들은 사라지고 (시신에서 녹아내린) 녹색 액체와 뼈만 남았다(넷플릭스 전쟁다큐,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드레스덴 편 참조). 단테의 지옥이 실제로 있다면, 그 모습이 바로 이럴까 싶다.
'위험한 환상'이 현실로
이렇듯 드레스덴 공습은 처참한 학살로 끝났다. 누가 봐도 독일 민간인들을 겨눈 공습 테러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클 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시산업뿐이던 드레스덴은 미국과 영국이 벌인 그 터무니없는 일을 정당화하기엔 너무나 작은 목표였다'고 지적했다(Michael Sherry, <The Rise of American Air Power: The Creation of Armageddon>, Yale University Press, 1989, 260쪽).
셰리에 따르면, 도시 폭격 같은 일들은 비무장 민간인들을 죽고 다치게 하는 등 너무나 끔찍하기에, 제2차 세계대전 초기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모든 국가들이 감히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셰리는 그런 생각을 '위험한 환상'이라고 지적한다. 핵무기를 비롯해 살상력 높은 무기들이 실전에 쓰일 수 있도록 대기 상태에 있는 오늘날, 드레스덴과 같은 끔찍한 일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경고다.
전쟁 중에는 모든 교전국들은 상대 적국의 도시를 폭격하기 마련이라며, 공습으로 비무장 민간인이 죽는 것을 놓고 윤리적 문제를 따질 것까진 없다며 손을 내젓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게 아니고요, 하며 그를 설득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전시지도부는 그들이 저질렀던 전쟁범죄로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전승국 지도자들은 전쟁 기간 중 독일에 퍼부었던 마구잡이 폭격으로 많은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고도 처벌에서 비껴갔다. 그래서 뉘렌베르크 국제군사재판도 도쿄재판과 마찬가지로 '승자의 재판'이란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글이 길어져 다음 주에 드레스덴 공습을 좀 더 다루려 한다. 독일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발 빠른 움직임 등 독일의 반응이 어땠는지를 들여다보고, 드레스덴 공습이 있기 바로 앞서 열렸던 얄타회담(1945년 2월4~11일)이 드레스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볼 예정이다(영·미 폭격기들의 드레스덴 공습이 소련군의 베를린 진격을 돕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고 얘기되지만, 비판적 연구자들은 스탈린에게 대한 무력시위 성격을 지녔다고 본다).
아울러, 영국의 정치·군사 지도자 두 사람의 냉혹한 맨얼굴을 그려보려 한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지역 폭격'이란 이름 아래 독일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이끌었던 영국 공군 전략폭격사령관 아서 해리스다. '폭격기 해리스'란 별명을 지녔던 해리스 장군은 왜 그토록 무차별 도시 공습에 집착했을까. 영국 랭커스터 폭격기 조종사들이 그를 가리켜 '도살자 해리스'라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 얄타에서 스탈린을 만난 뒤 드레스덴 공습을 밀어붙였던 처칠은 정작 그 공습이 전쟁범죄 행위라는 논란이 일자, 슬그머니 발뺌하려 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말을 떠올리듯, 해리스와 선을 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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