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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의 교회는 '좋은 종교'로 기능하고 있나?

[파시즘의 어제와 오늘] 칼 바르트와 바르멘 신학선언: 종교사회주의로부터 반나치 투쟁으로

세계화 시대에 종교의 의미와 행로에 대해 독일의 신학자 미카엘 벨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어떤 사회에서든 종교가 사라지는 사회는 없다. 다만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적 책임을 다하는 좋은 종교가 있거나 자신만의 유익을 추구하는 좋지 않은 종교가 있을 뿐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는 가운데 수년간 한국 사회에서 들려오는, 교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는 공공선의 증진에 기여하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에 골몰하고 있는 종교를 향한 아쉬움의 말들일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사회의 위기 속에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교회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산업혁명 당시 독일을 비롯한 유럽 사회의 종교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요청된 적이 있다. 사회적 불안, 실업의 증대, 노동자의 착취 등과 같은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교회를 향한 성찰의 촉구와 비판의 목소리가 19세기 말 종교와 사회민주주의가 만나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연대의 움직임이 결실로 표출된 것이 독일과 스위스에서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이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창당될 시기, 스위스의 종교사회주의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종교는 자유와 평등을 선포하는 주체로 서야 한다는 선언과 함께 사회의 한복판으로 뛰어 들었다. 치유목회로 유명했던 받볼의 목사의 아들이었던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민족주의적 제국주의를 경건의 탈을 쓴 악의 세력으로 비판하면서 중산층 사회의 대변자들과 현상유지의 무기가 된 종교의 모습을 성토하는 종교사회주의의 문을 열었다. 종교사회주의자 라가츠나 쿠터와 함께, 20세기의 교부로 불리웠던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정신적 제자로 자리매김해나갔다.

왜곡된 사회질서가 무조건적 순응을 강요할 때 종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19세기의 사회적 모순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대학살과 혼란의 도가니로 이어질 때, 종교는 긴 밤을 지새우며 파수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가. 뼈저린 질문을 던지며 실천을 향한 신학의 길로 매진해 나간 것이 바로 이러한 종교사회주의의 영향 속에 성장한 청년 신학자 칼 바르트였다. 스위스의 젊은 목회자로서, 청년 신학자로서 바르트는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는 가운데 자펜빌의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성장해 나갔다. "1800년동안 교회는 사회적 고난 앞에 서 있으면서도 항상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잔혹한 세계대전 앞에서 자신이 배워왔던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와 프로이센 제국 문화의 패퇴, 중산층 문화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당시 사회주의가 추진해왔던 제2차 인터내셔널의 실패를 목도하면서, 그럼에도 세계 속으로 파고드는 하나님 나라의 돌입을 기대하는 위기의 신학을 구사하는 바르트의 눈 앞에 바이마르 공화국까지 이어져 나갔던 중산층 시민사회적 독일사회의 분위기와 예술지상주의 사회, 형식화된 종교의 모습은 허울좋은 껍데기를 두른 것처럼 보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체계를 농락하고 프로이센의 시민사회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나치즘의 정권이 들어섰을 때, 바르트의 눈에 그들의 주장은 모순으로 가득찬 공허한 울림으로 비쳤던 것이 분명하다.

1934년 바르멘 게마르크에서 선포된 신학 선언은 이러한 배경 속에 태동된 저항의 몸짓이다. 새로운 시대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국 친화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독일의 종교기관, 시민사회의 안락함에 취해 있던 국가교회의 나태함을 뒤로 물리고 개혁교회, 루터교회, 연합교회 대표자들은 바르트를 필두로 공동의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렇게 탄생된 바르멘 신학선언은 총통이라고 하는 권력지도자가 아닌 자신들이 참된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라는 주제 하에 저항의 물꼬를 터나갔다. 이 선언의 중심 한복판에서 청년기 이후 바르트의 신학 속에 맥동하고 있던, 이 땅으로 돌입해 오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 그리고 저항과 변혁을 지향하는 신학적 외침은 나치즘의 시대에 저항의 중심동력으로 작용하며 반파시즘 진영의 구심점으로 작용해 나갔다. 이러한 외침 속에서 전체주의 세력에 대해 죽음을 통해 저항했던 본회퍼, 강제수용소의 고통을 뒤로 하고 종전 후 동서냉전 시기 평화주의자로 헌신해 나간 니묄러, 그리고 일일이 이름을 거명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담고 있는 본질적 가치를 질문하며 역사의 증언자로 살아 나갔다. 그들의 삶의 한복판에서 바르멘 신학선언은 끝없이 생동하는 숨을 형성해 나갔다.

바르멘 신학선언과 함께 본격화된 바르트의 저항정신은 1937년 스코틀랜드 신학 강의를 통해 선포된 '정치적 예배'의 개념에서, 그리고 반히틀러 전선을 향한 동참을 촉구하는 로마드카를 향한 서신에서, 그리고 종전 후 냉전 치하에서 화해와 평화를 선언하는 슈투트가르트 죄책선언과 다름슈타트 선언으로 이어져 나갔다. 국가는 그것이 왜곡될 때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 없고,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심판받아야 한다는 바르트의 선언은 저항권을 요구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나가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해 깨우침의 외침을 발해 나갔다. 스위스의 개혁교회 자녀로서 처음부터 민주주의적 이념을 간직했던 청년 바르트는 동서냉전 하에서 진영의 대립을 넘어선 하나님의 화해를 지향해 나갔으며, 동구권 독재진영 아래에서 살아가던 교회의 주역들 역시 바르멘의 신학선언 아래에서 자신들의 구심점을 찾아나갔다.

20세기 초 왜곡된 국가권력을 향해 선포된 바르멘의 신학선언의 정신은 20세기 후반, 그리고 21세기 초반까지 많은 영향을 발하며 저항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해나갔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이름 하에 인종차별이 자행되던 남아프리카의 상황 속에 벨하 신앙고백(1982)이라는 이름의 신학선언이 태동되어 나갈 때, 바르멘의 신학선언은 이 저항신학의 산파 역할을 하며 또다시 맥동을 이어나갔다. 사회의 격동적인 도전 속에 왜곡된 권력의 발호, 억압과 분열과 차별에 대해 바르멘의 신학선언은 위에서 말했던 '좋은 종교'의 방향을 질문하고 대답을 제시하는 중심역할을 수행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어쩌면 먼 나라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처럼 보일 수도 있는 바르멘 신학선언과 바르트의 신학적 저항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실은 우리가 서 있어야 하는 지평이 어디인지 질문하고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 한때 이 땅의 교회는 '좋은 종교'의 모습 속에서 고난의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담아내는 주체로 자리매김을 한 적이 있었다. 일제의 치하에서는 항거의 상징이었고, 독재의 체제에서는 저항의 중심이었으며, 가난하고 힘든 이들 앞에서 봉사와 헌신을 수행하면서 민족의 고난과 아픔 속에 성장해 나갔던 과거가 있었다.

오늘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산층 시민사회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교회는 100년전 독일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성과 비판의 능력을 상실한 채 권력을 향해 비판없는 찬가를 부르는 교회인지, 아니면 역사와 사회의 도전 속에서 '좋은 종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본질을 지향하는 교회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찰나의 안락 속에 바라봐야할 것을 시야에서 놓치고 사회의 문화적 기능적 수단의 하나로 전락할 때, 종교는 때로 오래전 독일사회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웃을 해하는 일에 동참하는 범죄의 일행이 될 수도 있다. 초기의 니묄러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잘못된 국가의 정책에 동참하면서 세월을 보내다 결국 추방되고 나서야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깨달아갔던 작가 토마스 만이 그러했던 것처럼, 때로는 무관심 속에서 너무 늦게 사태를 알아채곤 했던 모습이 지난 역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아쉬운 풍경이다.

▲이상은 서울장신대 교수. ⓒ필자 제공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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