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중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 벌인 침략전쟁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침략국인 일본의 사망자는 약 310만 명. 침략을 당한 중국은 적어도 1600만 명, 많게는 21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전선에서 또는 광산을 비롯한 노동현장에서 죽은 조선인 숫자는 적어도 20만 명을 넘는다(본 연재 12 참조). 그 하나하나의 희생마다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한 비극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민간인 희생은 1945년에 집중
일본인 사망자 통계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310만 사망자 가운데 군인은 약 230만, 민간인은 80만 명이다. 일본의 인명 손실은 패색이 짙어가던 1945년에 집중됐다. 히로히토가 좀 더 일찍 항복이나 강화조약으로 전쟁을 끝냈더라면, 그런 희생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토 요코(도쿄대, 일본근현대사)가 집계한 항목별 사망자를 보자.
△도쿄 대공습(1945년 3월10일)에서 10만, △오키나와 공방전(1945년 4월~6월)에서 20만(군인 10만, 민간인 10만), △히로시마 원폭으로 14만, △나가사키 원폭으로 7만, △1945년 일본 주요도시들에 대한 공습으로 수십만 명이 죽었다. 군인 사망자 230만 가운데 60%인 140만이 전쟁 말기 식량부족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가토 요코, <일본은 왜 전점 더 큰 전쟁으로 나아갔을까> 소명출판, 2022, 46-47쪽).
굶어죽은 군인이 140만 명이라면, 전체 군인 사망자(230만)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연합군의 공세에 밀리면서 태평양의 작은 섬이나 특정 지역에 머물던 일본군 가운데 상당수가 퇴각 기회를 놓쳤다. 미군은 디딤돌 건너뛰는 식으로 작전상 유리한 지역만을 골라 공격·섬멸했다. 미군이 건너뛴 섬이나 지역에 고립된 일본군 부대들에선 보급이 끊어졌고,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죽은 전우의 인육을 먹고 버텼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들은 당시 일본 패잔병들의 극한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문제는 전쟁의 광풍에 휘말린 비무장 민간인들의 다수가 무차별 공습으로 죽었다는 점이다. 패전 뒤인 1945년 8월23일 일본 내무성 방공본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민간인 공습 사망자를 26만 명(부상 42만 명)으로 꼽았다. 이 숫자는 실제보다 적게 발표된 것으로, 원폭 사망자들을 포함해 민간인 공습 희생자 규모는 60만 명쯤으로 알려진다(아라이 신이치, <공습의 역사: 끝나지 않는 대량학살>, 어문학사, 2015, 167-168쪽).
히로시마 방문한 오바마, 사과는 없었다
세계전쟁사에서 처음으로 핵폭탄 사용을 명령했던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죽을 때까지 원폭 사용에 대해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빈 적이 없다. 트루먼의 후임자들도 마찬가지로 사과는 없었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이 미국의 원폭 투하 71년 만인 2016년 5월27일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도 그랬다(그 전까지 미 현직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없었다. 1984년 5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딸 에이미와 함께 히로시마로 갔을 땐 퇴임한 뒤였고, 조용히 다녀갔다. 2023년 5월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G7 정상들과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했지만, 다함께 하는 헌화와 묵념으로 그쳤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계획이 알려지자, 관심이 쏟아졌다. 그가 미국의 원폭 투하와 관련해 어떠한 언행을 할지를 두고 일본 언론들은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냈다.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바마는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원폭 희생자들에게 조화를 바쳤다. 그러나 미국의 원폭 사용에 대해선 사과의 뜻을 나타내진 않았다. 헌화를 한 다음에 으레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머리를 깊이 숙이지도 않았다.
헌화 뒤 연설에서 그가 히로시마에 온 것은 '전쟁에서 숨진 무고한 모든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만을 추모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정치적 수사나 다름없는 말을 했다.
"71년 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아침 하늘에서 죽음이 내려앉고 세상이 바뀌었다. 섬광과 불의 벽이 한 도시를 파괴하면서, 인류가 스스로를 파괴할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왜 이곳 히로시마에 왔을까?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분출된 끔찍한 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일본인 10만 명, 한국인 수천 명, 포로로 잡힌 미국인 12명을 포함해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게 된다. 지구촌은 히로시마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고 책임감을 공유해야 한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만들자."
(https://obamawhitehouse.archives.gov/the-press-office/2016/05/27/remarks-President-obama-and-prime-minister-abe-japan-hiroshima-peace)
오바마는 '죽은 이들을 애도한다'면서도 원폭으로 죽은 일본인 숫자를 10만 명으로 줄였다. 한국인의 숫자도 '수천 명'으로 줄여 잡았다(실제로는 4만명 추산). 숫자야 틀릴 수 있다고 치자. 더 중요한 것은 오바마가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70년 12월7일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의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을 흘렸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일본인들이 그런 브란트의 모습을 오바마에게 기대할 염치는 물론 없겠지만, '그래도 속으론 혹시나 하며 기대를 품었다'고 한다. 하지만 허무하게 돌아서야 했다.
그런 모습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오바마가 히로시마로 가기 전에 백악관 대변인은 '이번 방문에서 대통령의 사과는 없을 것'이라 밝혔다. 진주만 공습 등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정치 정서를 고려한 것이긴 하지만, 군사대국인 미국도 과거사를 정리하는 모습에 관한 한 선진국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는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사설에서 '미국이 떨어뜨린 원폭 두 방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유감을 느낀다'는 정도로 말하기가 그리 어려울까 하며 서운함을 나타냈다.
오바마는 히로시마 방문 7년 전(2009년 4월) 체코 프라하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요지의 연설을 하면서, '핵무기를 사용한 적이 있는 유일한 나라로서 미국은 도의적 책임이 있다'며 우회적인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프라하 발언 뒤 그해 오바마에게 노벨평화상이 주어졌다. '오바마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를 둘러싸고 당시 논란이 따랐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노벨평화상의 신뢰도는 여러 번 훼손된 바 있다. 1973년 헨리 키신저 미 국무가 베트남전쟁을 끝내는 파리평화협정 뒤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이나, 1978년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이집트에게 시나이반도를 돌려주는 캠프데이비드 협정 뒤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이 대표적인 보기다. 강도가 빼앗았던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자, 경찰서장에게서 모범시민상을 받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아베, "진주만 공습과 원폭을 상쇄하자"
오바마가 히로시마를 방문할 무렵, 일본은 우경화 흐름을 가속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극우 성향을 보이는 아베 신조가 총리로 있는 시점에서 히로시마를 가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였다.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이용해 마치 일본이 전쟁 피해국가인 것처럼 선전을 해댈 것이란 우려가 나왔고, 실제로도 그랬다.
일본 우익 언론들은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위령탑 앞에 나란히 선 오바마와 아베의 모습을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이를 두고 중국의 언론들은 '오바마와 아베의 히로시마 쇼(show)'라 비판했다. 베이징대 교수 구이융타오(국제관계학)는 관영 <환구시보>에 실은 기고문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할 수 있다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난징(南京)을 찾아 사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극우화 흐름을 보이는 일본 정치권에서 총리가 중국 난징으로 가 무릎을 꿇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두고 '난징학살과 진주만공습을 비롯한 일본의 전쟁범죄와 미국의 원폭 투하를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둘 다 잘한 것은 없으니 과거사는 이제 그만 잊고 넘어가자는 것이냐'라는 지적은 귀 기울일 만하다.
실제로 아베는 오바마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진주만 공습과 원폭을 상쇄하자"는 얘기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과 1945년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서로 상쇄를 시키는 게 어떨까 하는 얘기였다. 오바마가 외교적 예의상 빈말이라도 동의할 리 없는 그런 얘기를 꺼낸 것은 일본의 원폭 피해 심리를 보여준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일본인들은 '원폭을 두 방이나 맞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일본이 전쟁 가해국이기 보다는 피해국이라는 생각들이다('진주만 공습과 원폭 투하를 퉁치자'는 식의 아베 발언은 일회성 으로 그냥 넘어갔다. 아베도 오바마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길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진주만 처벌하려면 원폭 투하도 처벌해야"
자료를 뒤져보면, 진주만 공습과 원폭 상쇄론이 처음 나온 얘기는 아니다. 도쿄재판에서도 도조 히데키 등 피고인들을 변호를 맡았던 미국인 변호사는 진주만 공습의 책임자를 가려내 전쟁범죄자로 처벌하려면 원폭 투하의 책임자도 가려내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와 관련, 중국 출신 법관으로 도쿄재판에 참여했던 11명의 판사 가운데 한 사람인 메이루아오(梅汝璈)가 남긴 글을 보자.
[1946년 5월 14일에 벌어진 재판에서 피고측 변호인은 기소장 가운데 제39항에 적시된 범죄행위를 취소해 달라고 신청하였다. 이 항목은 미국의 진주만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미국 해군 장병들을 살해한 범죄내용이었다. 미국인 변호사 블레이크니는 다음과 같이 강변하였다. "만약 해군 장병들이 진주만에서 폭격을 맞아 죽은 것이 음모 살인사건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그 사람 이름을 알아내야 하고, 이 작전 계획을 세운 총참모장 이름을 알아야 하며, 이것에 모든 책임이 있는 총사령관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메이루아오, <도쿄전범재판: 중국대표법관의 미완성기록> 민속원, 2019, 117쪽).
여기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결정을 내린 '총사령관'의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었듯이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이다. 문제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원폭 투하를 같게 다룰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논란을 부르는 주제다. 원폭을 투하한 것은 일본인들로선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특별 선언(1946년 1월19일)으로 설립된 도쿄 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다루기로 된 것은 일본의 전쟁범죄였다. 관할 범위에서 미국의 전쟁범죄는 빠져있었다.
도쿄 법정에서 변호인이 '미국의 원폭 투하는 전쟁범죄'라고 주장한 것은 틀린 지적이 아니다. 하지만 '국제법상 전쟁은 합법으로 전쟁 중 살인은 불법이 아니며, 국제법은 국가에 해서만 적용되기 때문에 개인의 전쟁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이기에 피고인 전원은 무죄여야 한다'는 주장은 틀렸다. 그의 주장은 일본도 함께 참여했던 1928년 켈로그 브리앙조약, 이른바 부전(不戰)조약을 어기는 것이다.
히로히토, "히로시마 원폭, 어쩔 수 없었다"
히로히토는 그가 신민(臣民)이라 여기는 일본 시민들에게 자신의 책임 아래 이뤄졌던 일제의 침략전쟁과 그에 다른 일본인들이 없었던 극심한 고통과 희생에 대해 사과를 했을까. 특히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빌었을까. 그렇지 않다.
히로히토는 패전 30년 만인 1975년 10월 국빈으로 미국에 간 적이 있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났던 닉슨의 후임자)을 만난 자리에서 히로히토는 에둘러 '사과성' 발언을 했다. 일본이 일으켰던 아시아·태평양전쟁을 가리켜 '내가 매우 슬프게 생각하는 그 불행한 전쟁'이라며 그 전쟁에 휩쓸려 죽은 미국인들의 희생에 대해 '깊은 슬픔'을 나타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기대했던, '침략전쟁을 벌인 것은 내 잘못이었다'거나, '전쟁범죄를 저질러 죄송하다'는 사죄는 뚜렷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 뒤 히로히토가 보여준 태도가 논란이 됐다. 캘리포니아 디즈니랜드에서 미키 마우스와 함께 싱글거리며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보는 미국의 전쟁 희생자 유가족들은 마음이 착잡했을 것이다.
귀국길에 히로히토는 TV 카메라들이 늘어선 자리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 물었다. "당신의 지난날 전쟁 책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히로히토가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기소되지 않고 넘어간 뒤로도 줄곧 따라다니던 부담스런 주제를 공개적으로 건드리는 질문이었다.
심리학에서 '잊고자 하면 잊혀진다'는 말이 있다. 히로히토에겐 그런 말이 쉽게 통했을까? 아니면, 시간이 많이 흘러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던 주제였을까? 기습적으로 전쟁 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자, 히로히토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면서 이렇게 더듬거렸다. "그런 말의 표현법에 대해서는, 문학 방면에 대해 별로 연구한 바가 없어 잘 모르기 때문에, 질문에 답할 수가 없습니다." (허버트 빅스, <히로히토평전>, 삼인, 2010, 745쪽)
히로히토에게 불편한 질문이 이어졌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히로히토가 더듬거리며 내놓은 대답은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만, 히로시마 시민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허버트 빅스, 745쪽)
히로시마 원폭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니다. 히로히토를 비롯한 일본의 침략전쟁의 부산물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원폭 투하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에 대한 응징이었다(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소련의 개입을 의식한 나머지 일본의 항복을 재촉하려고 서두른 결정이기도 했다). 미 트루먼 대통령이 원폭 투하 결정을 내림으로써 비무장 민간인을 대량 살상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런 끔찍한 무기가 일본에 던져진 데엔 히로히토의 책임도 컸다.
이미 전세가 기울대로 기운 상태임에도 히로히토는 '일격 강화론'(미군에게 일격을 가해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이끌어낸다는 논리)을 고집하며 항복을 늦추다 원폭 두 방을 맞았다(본 연재 41 참조). 히로히토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말이 전쟁 중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 히로히토의 이 말에 대해 많은 일본 시민들은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도 아주 힘들었다고?
일본인들은 지난날의 전쟁범죄를 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전쟁의 피해자'라 여긴다.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배경으로는 전쟁 말기, 특히 1945년 8.15 항복 직전까지 겪었던 엄청난 고난의 기억이 깔려 있다. 이는 패전 뒤의 독일과 닮았다. 히틀러를 지지함으로써 나치의 집권이 가능하도록 했던 독일국민들이지만, (나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공범이란 인식보다는 전쟁 말기 연합군의 공습으로 비롯된) 피해의식을 더 크게 지녔던 것과 마찬가지다(본 연재 33 참조). 패전 뒤 일본인들의 의식을 다룬 가토 요코의 글을 보자.
[일본인은 전쟁의 책임을 솔직하게 사죄해야 하지만, 이것이 잘 안 되고 있다. 그 정서적 배경에는 패전까지 1년 동안 체험한 비참했던 경험이 있다. "나도 아주 힘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쟁의 비극을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일본이 아시아 각국에 머리를 숙이며 솔직하게 사과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같다](가토 요쿄, 50쪽).
위 글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나도 아주 힘들었다'고 여기는 까닭은 터무니없는 엄살이 아니다. 도쿄 대공습과 원자폭탄은 일본인들의 피해자 의식을 키운 대표적인 보기다. 일본계 미국인인 하세가와 쓰요시(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 러시아사)는 '그 피해의식이야말로 일본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군국주의, 식민정책, 침략을 직시하고 진지한 윤리적 책임을 공유하는 것을 막아왔다'고 지적했다(<종전의 설계자들>, 삼인, 2019, 603쪽).
문제는 그들의 침략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인 자신들이 겪은 피해보다 훨씬 더 큰 피해와 고통을 아시아 지역 사람들에게 안겨주었다는 반성적인 역사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야스쿠니 신사를 드나드는 일본 극우들은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 '자학(自虐)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곤 한다.
"신이시여, 우리가 무슨 짓을 했나요?"
많은 일본인들이 '나도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면, 원폭을 떨어뜨린 미군 조종사들은 힘들지 않았을까.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렸던 미 B-29기 탑승자들의 얘기로 글을 끝내려 한다. 이즈음도 넷플릭스 동영상으로 볼 수 있는 전쟁다큐가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이다. 마지막 편에서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다루었다. 여기에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에 '꼬마'(little boy)란 이름의 원폭을 싣고 히로시마로 갔다 돌아온 한 미군 장교(윌리엄 딕 파슨스 해군대위)와 인터뷰 장면이 눈길을 끈다.
무기 및 폭탄 담당인 파슨스 대위는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폭탄이 드디어 투하됐습니다. 정확히 예정된 시각에 투하되었고, 예상했던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여기까지 조리 있게 말하던 파슨스는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그러다 다시 카메라를 바로 보는가 싶더니 곧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인간이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내 손에 피를 묻혔다'고 자책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감정이 인터뷰 도중에 솟아오른 듯했다(파슨스는 해군소장으로 있던 1953년 심장마비로 죽기 직전까지 실제로 오펜하이머와 매우 가깝게 지냈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담은 다이애나 프레스턴(영국 역사가)의 글을 보면, B-29 '에놀라 게이'의 탑승자들은 핵폭탄 '꼬마'가 폭발하면서 낸 충격파에 휩쓸렸다. 앉은 자리에서 반쯤 밀려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고, 전신주와 크게 충돌하는 느낌이 들었다고도 했다. 정신을 차린 뒤 히로시마 상공으로 솟아오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보면서, 후미 기총수 밥 캐론은 '아름다울 정도로 끔찍했다'고 말했다. 부조종사 루이스 대위는 그의 수첩에다 이렇게 적었다. "신이시여, 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다이애나 프레스턴,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마리 퀴리에서 히로시마까지 > 뿌리와이파리, 2006, 490-491쪽)
원폭 투하 뒤 정신병원에 갇힌 조종사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에 함께 했던 B-29 조종사 가운데 한 사람은 끝내 정신병동에 갇히는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이름은 클로드 이덜리(1918-1978). 1945년 당시 27살의 젊은 대위에게 주어진 임무는 '에놀라 게이'보다 1시간 앞서 B-29를 몰고 가 히로시마의 날씨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이덜리가 히로시마로 다가갔을 때 시내 바로 위 하늘은 구름 사이로 큰 틈이 갈라져 빛줄기들이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이덜리의 부하 무전병은 암호로 폭격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에놀라 게이'에게 타전했다.
[이덜리는 B-29를 몰고 티니안으로 돌아온 뒤 침묵과 우울 속에 파묻혀 여러 날 동안 아무와도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는 전쟁피로증이란 진단을 받고 귀가 조치됐다. 제대하고 잠시 동안은 안정된 가정생활을 찾아가는 듯 보였으나, 밤이 되면 지옥 같은 악몽이 이 퇴역 조종사를 괴롭혔다. 시간이 흐르면서 술로도 더 이상 그 악몽을 씻어낼 수 없게 되었다. 극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마침내 이덜리는 1950년 뉴올리언스의 한 호텔방에서 최초의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른다](윌프레드 버체트, <히로시마의 그늘>, 창작과비평사, 1995, 155-156쪽).
위 글을 쓴 윌프레드 버체트는 호주 출신의 언론인이다. 영국 <데일리 익스프레스> 기자로 서방 기자 가운데 히로시마에 가장 먼저 들어가 참혹한 피해 상황을 외부에 알렸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상황이 외부 세계로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던 맥아더 사령부에게 버체트 기자는 '요주의 인물'로 여겨졌다. 그가 히로시마의 참상을 보도한 뒤 도쿄로 돌아오자, 강제로 군병원에 입원시켰다. 히로시마에서 찍었던 사진필름이 담긴 그의 콘탁스 카메라도 사라져 버린 것도 그때였다.
히로시마 원폭과 관련된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클로드 이덜리는 미 텍사스주 와코에 있는 재향군인병원의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그 뒤로도 다시 마음의 병이 도져 입·퇴원을 되풀이했다. 그 과정에서 히로시마 어린이 피해자들에게 보낼 돈을 훔치다 발각됐고 부인과도 이혼했다. 그의 부인은 이덜리가 자식들을 만나는 것까지도 막았다.
국가로부터 미움 받은 반전평화주의자
이덜리가 힘든 시간들을 보낼 때 그의 손을 잡아준 사람은 독일의 사회철학자이자 작가인 귄터 안더스(1902-1992)였다. 폴란드계 유대인인 안더스는 라디오, TV 등 언론 매체와 원자폭탄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문명이 세계와 인간 관계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등에 관심을 쏟아 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연구자다(안더스는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첫남편이다. 하이데거의 제자로 있던 시절에 알게 된 한나 아렌트와 1929년에 결혼했지만, 1930년대의 혼란기에 헤어졌다. 아렌트는 1940년에 독일 유대인 출신의 지식인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재혼했다).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에 자리 잡은 반전평화주의자 안더스는 이덜리가 느꼈던 '고통의 속죄적 성격'에 감명을 받아 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안더스는 그에게 히로시마 원폭이라는 '대량학살의 임무를 맡겨 결국 그의 삶을 망쳐버린 체제'에 맞서 싸우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윌프레드 버체트, 156쪽 참조).
안더스의 격려에 힘입어 이덜리는 반전평화주의자로서 활동하면서 그 나름의 속죄를 꾀했다.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 감동적인 편지 내용은 세계 여러 언론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워싱턴의 권력자들에게 이덜리는 눈엣가시였기에 군 정신병원에 가두어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가 도망치자, 숨어있던 그를 다시 붙잡았다. 그리곤 난폭한 정신병자들이 수용된 병동에 장기간 감금해버렸다. 그 뒤로 그의 정신건강은 더 악화됐고, 암 진단을 받아 1978년 그곳 군병원에서 숨졌다.
이덜리는 B-29 조종사였다가 히로시마 악몽에 시달리면서 반전평화주의자로 거듭났다. 하지만 국가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의 불운했던 삶은 거대한 국가 시스템이 한 인간을 어떻게 쉽게 생매장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다음 주엔 영·미 연합군이 1945년 2월에 벌였던 독일 드레스덴 폭격이 지닌 문제점을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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