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2일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은 '시간당 임금 400원 인상' 요구안 교섭이 결렬되자 파업에 들어갔다. 필자가 속한 플랫폼C 페미니즘 공부모임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하는 것'을 중요한 실천으로 생각하던 차였다. 마침 집근처 덕성여대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이라니, 반가운 마음에 지지방문을 하기로 했다. 한국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10월 13일 파업 2일 차 결의대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가벼웠던 마음은 이내 매우 무거워졌다. 집회가 끝나고 들른 총장실 앞 철야농성장의 상황은 '최초 자교 출신 여성 총장'인 김건희 총장이 여성노동자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지 잘 드러냈다. 총장은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피해 도서관에 따로 사무공간을 만들었고, 그 흔한 면담조차 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덕성여대에 처음으로 연대방문을 했던 10월 13일은 청소노동자들이 2022년도 노동조건 합의를 위한 교섭을 시작한 지 이미 11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김총장은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자교 선배인 자신에게 학생들이 보여준 기대감을 이용해 청소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와 투쟁에 대한 왜곡과 악의적 선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는 약자'라는 프레임에 기대어, 대학 캠퍼스를 투쟁 구호판으로 만들고 억지 주장을 일삼는 불법행위가 더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청소노동자들과 학생들을 갈라쳤다. 몇몇 학내 구성원들은 이 주장에 동의해 학내에 청소노동자들을 비판하는 자보를 부착하기도 했다.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임에도, 여성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왜곡하는 김건희 총장을 보면서 플랫폼C 페미니즘 공부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책 '99퍼센트 페미니즘 선언'의 한 구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여성들이 유리 천장을 부수고, 그래서 대다수가 바닥에 쏟아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게끔 만드는 일에 관심이 없다. 전망 좋은 사무실을 차지한 여성 CEO에게 박수를 보내는 게 아니라 CEO와 전망 좋은 사무실이란 것을 없애 버리길 원한다."
물론 불평등한 유리천장은 반드시 깨져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핵심 고위공작자 93퍼센트가 남성이며, 국회의원 81퍼센트, 기초단체장 96퍼센트, 광역단체장은 100퍼센트가 남성이다. 기업에선 고위 간부의 여성 비율도 고작 4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들이 경력의 사다리를 올라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불평등한 구조를 강화하는 역할을 자처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성 개인이 유리천장을 부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다수 여성들의 삶은 바뀔 수 없다.
유리천장을 부순 여성 총장, 여성노동자를 무시하다
2022년도 노동조건 합의를 위한 집단교섭은 2021년 11월 2일에 시작되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서울지역대학 청소노동자 사업장(고려대, 고려대 안암주차, 동덕여대, 덕성여대, 서강대, 성신여대, 숙명여대, 연세대, 연세대재단, 이화여대, 인덕대, 홍익대, 카이스트서울 총 13개 사업장)은 2022년도 노동조건 합의를 위해 동일한 요구안을 걸고 집단교섭을 시작했다. 이후 석 달 동안 10차례에 걸쳐 교섭을 진행했지만 학교들과 중간 하청업체들이 안을 내지 않아 교섭은 결렬되었고, 2022년 3월 14일부터 투쟁이 시작됐다.
청소노동자들은 각 대학 사업장별 선전전, 순회 집회, 대통령 인수위원회 앞 기자회견, 집중 결의대회 등으로 투쟁의 수위를 올렸다. 집단 투쟁 석 달 후인 6월 10일, 드디어 홍익대분회에서부터 합의가 이뤄졌다. 9월까지 덕성여대를 제외한 12개 대학·재단은 노동자들과 잠정 합의 도달했다. 이처럼 덕성여대뿐 아니라 다른 사업장들도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 투쟁은 쉽지 않았다. 무려 열 달의 시간 동안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단호하게 투쟁하며 교섭에 임했고, 합의안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들의 성과는 덕성여대 총장의 버티기로 완성되지 못했다. 13개 사업장 청소노동자들은 공동교섭을 하니 전체 합의가 완료되어야 합의안이 집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은 덕성여대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국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은 철야 농성과 파업 투쟁을 선택하였다. 파업은 9일 동안 계속되었지만 학교는 요지부동이었다.
유리천장을 부수고 학교의 최고책임자가 된 여성총장이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공격하는 모습을 목도하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몇몇 일부 여성들이 사회적 편견을 이겨내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여성차별이 거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이 받고 있던 임금은 시간당 9390원으로 최저시급 9160원 보다 230원 많은 수준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평생 동안 평균 20년 가까이 일하는 데, 그 중 10년 이상을 최저임금 이하 임금을 받는다. 일하는 여성 절반이 받고 있는 최저임금 사업장의 고용 조건이 개선된다는 것은 여성차별을 없애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이 투쟁이 단지 하나의 사업장이 일이 아니라, 여성노동자들의 전반적인 노동조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이 투쟁의 승리가 플랫폼C 활동가들에게도 간절해졌다. 시작한 이상 끝을 보겠다는 절실함으로 시작된 연대는 이후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은 매일 아침 선전전을 했다. 우리도 일주일에 2~4일은 꼭 함께 했다. 함박눈이 쏟아져도, 영하 20도 가까운 칼바람이 불어도 멈추지 않았다. 김총장의 공격은 집요해서, 노동조합 간부들의 아침선전전 참여 시간을 계산해서 임금에서 삭감했다. 대화는 계속 거부되었고 탄압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연대를 호소하는 글을 쓰고, 정당함을 알리는 간담회와 토론회를 조직했으며, 노동자들을 지지할 졸업생들을 찾아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연대 집회를 열어 서로를 확인하고, 지지자들을 찾아내 파업지지 인증샷도 모았다. 학교 졸업식에서 김총장을 쫓아서 마치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뛰어다니며 요구안을 외치고, 도망가려는 김총장의 차를 에워싸고 끈질기게 요구해서 드디어 면담일정을 잡았다. '덕성여대청소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연대'에 속한 단체들과 38세계여성의 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대회도 성사시켰다. 역대급으로 추웠던 지난겨울을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면서 그렇게 뜨겁게 보냈다. 6개월 동안 덕성여대를 뻔질나게 다니면서 덕성여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차미리사 선생을 닮은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
덕성여대 캠퍼스는 참 예쁘다. 서울에선 흔치 않은 탁 트인 넓은 평지에, 북한산이 교정을 둘러싸고 있어 사시사철 멋들어진 풍경을 볼 수 있다. 작년 가을 처음으로 덕성여대에 방문했을 때 함께 학교를 거닐던 노동조합 간부는 내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름다운 학교 캠퍼스를 자랑했다. "내가 서울에 엔간한 학교는 다 가보았는데 우리 학교처럼 예쁜 학교는 없어!" 자부심이 묻어나는 그의 말투와 반짝이던 눈동자에서 학교에 대한 사랑이 크게 느껴져 뭉클했다. 이 멋진 학교에서 왜 이런 가혹한 노동탄압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덕성여대는 캠퍼스 못지않은 멋진 역사도 자랑한다. 덕성여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이 세운 학교로,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다. 김건희 총장은 틈날 때마다 '차미리사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차미리사 선생은 일제 강점기 여성해방과 여남평등의 신사상을 고취하는 계몽활동을 하며 모은 성금으로 1920년 덕성학원의 전신인 부인야학강습소 근화학원을 세웠다. 당시 차선생이 만든 교훈은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였다. 주체적 삶, 창의적 지식, 실천적 사고를 강조한 것이었다.
덕성여대에서 차미리사 선생의 교훈을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청소노동자들이었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내걸고 싸워, 389일 간의 투쟁 끝에, 마침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킨 이들이야 말로 주체적이며 창의적이지 않은가. 그 긴 투쟁 동안 노동조합이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단결하여 만들어 낸 성과였다. 물론 정년퇴직자를 충원하지 않기로 일부 양보가 있었지만, 박수가 아깝지 않은 귀한 성과였다.
투쟁이 마무리 된 후, 그동안 밉기만 하던 김건희 총장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총장 덕택에 나에겐 수 십 명의 귀한 언니들이 생겼다. 연대로 맺어진 끈끈한 정으로, 송년회 때 노래방에서 함께 음주가무를 즐기고, 4월에는 봄맞이 야유회로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맛있는 회도 먹었다. ‘덕성여대청소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연대’를 통해 알게 된 지역 활동가들과의 교류 덕분에 지역여성운동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이 모든 소중한 인연들이 김 총장의 그 부당한 탄압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김 총장에게 감사편지라도 써야 할까 진지한 고민도 하였다. 하지만, 나에게 이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준 것은 탄압이 아니라 투쟁이었다. 만약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이 김 총장의 탄압에 맞서 그 긴 기간 동안 싸우지 않았다면, 나에게 그 뜨거웠던 겨울은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안타깝게도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은 아직도 2023년 임금교섭안을 합의하지 못했다. 학교 측은 작년처럼 노골적인 탄압을 하지는 않고 있지만, 교섭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또다시 작년 같은 상황이 온다면 '덕성여대청소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연대'는 작년보다 훨씬 빠르고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버거웠지만 함께여서 외롭지 않았으며, 승리했던 투쟁의 기억이 있으니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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