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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쓴 것 평생 후회한다"는 아인슈타인, 지옥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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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쓴 것 평생 후회한다"는 아인슈타인, 지옥문이 열렸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45]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인가 ⑯ 원자폭탄 下3

지난 주 글에 독자 한 분이 메일을 주셨다. '미국이 핵폭탄을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일본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고 버텼을 것'이란 요지였다. 틀린 말씀은 아니다. 두 방의 핵폭탄은 누가 뭐래도 일본의 항복을 이끈 요인이다. 지난 주 글의 요점은 원폭이 일본 항복에 미친 영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히로히토가 서둘러 항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더 큰 다른 요인(소련의 대일전 참전)의 중요성을 짚어본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일반적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원폭 때문에 일본의 항복했다고 여겨왔지만, △일본의 항복 요인은 '원폭과 소련군 참전'이란 이중의 충격 때문이며, △여러 연구자들은 둘 가운데 더 큰 요인으로 '소련군 참전' 충격을 꼽는다. 이들 수정주의 연구자들은 '원폭투하가 일본의 항복을 가져왔다'는 전통적인 견해에 고개를 가로 젓는다. 소련군 참전이 일본의 항복의 결정적 요인이라면, 굳이 원폭을 떨어트려 수십만 목숨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란 지적이 따르기 마련이다.

트루먼 앞에 놓인 또 다른 선택들

1945년 접어들어 전쟁의 운동장은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다. 그런데도 일본의 군국주의자들 가운데 특히 일본 육군의 강경파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1억 옥쇄'를 외쳐대며 뻗대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나온다. 트루먼에게 원폭 투하 말고 일본의 항복을 끌어낼 다른 대안은 없었을까. 이와 관련, 벨기에 태생의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자크 파월의 글을 옮겨본다.

[트루먼에게는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며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매우 매력적인 선택지가 몇 가지 있었다. 일왕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하지 말고) 사면해달라는 사소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붉은 군대(소련군)가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려 도쿄에 무조건 항복을 종용할 수도 있었으며, 해상봉쇄를 통해 일본을 굶주리게 만들어 도쿄가 조만간 화평을 청하도록 강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과 그 보좌진은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원자폭탄으로 일본을 초토화시키기로 결정했다](자크 파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오월의봄, 2017, 277쪽).

트루먼은 회고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원폭 투하를 놓고 나처럼 고민한 사람은 없을 것'이란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것들은 정치적 수사나 다름없는 변명이었다. 원폭 투하를 뺀 다른 선택은 뭉갰다. 자크 파월은 위의 여러 선택지를 마다하고 트루먼이 원폭 투하를 서둘렀던 이유로 소련을 꼽았다. 소련이 아시아지역의 전쟁에 뛰어들기에 앞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파월은 전쟁이 끝난 뒤 극동지역에서의 소련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목적에서 원폭 투하가 이뤄졌다고 풀이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소련이 극동아시아의 전쟁에 개입하면, 유럽의 전쟁에 상대적으로 늦게 개입한 미국이 얻었던 것과 같은 혜택을 아시아에서 소련에게 주어야 할 위험이 있었다. 미국은 원자폭탄의 힘으로 소비에트라는 원치 않는 불청객이 그들의 파티를 망치는 일 없이 극동아시아를 차지하는 희망을 품었다](자크 파월, 278-288쪽).

미국의 많은 사람들은 트루먼이 원폭 투하를 결정한 것은 그밖에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고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다는 '원폭 신화'를 받아들인다. 일본계 미국시민인 하세가와 쓰요시(캘리포니아대명예교수, 러시아사)는 위의 자크 파월과 마찬가지로 소련 참전을 의식하고 미국이 원폭 투하를 서둘렀다고 지적한다.

[일본이 소련의 알선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기대는 소련의 참전으로 분쇄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왜 원폭 투하를 서둘렀던 것일까? 트루먼은 원폭 투하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원폭 투하를 서둘렀던 것이다](하세가와 쓰요시, <종전의 설계자들> 메디치, 2019, 349쪽).

지난주 글에서 살펴본 여러 수정주의 연구자들도 위의 두 연구자(자크 파월, 하세가와 쓰요시)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다른 여러 대안을 마다하고 서둘러 원폭을 터뜨린 것은 소련의 대일전 개입을 의식해서였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히로히토·나가사키에서 죽은 조선인 4만을 포함한 20여 만 명의 사람들은 미 패권정책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그들의 허망한 죽음을 되돌릴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 파리에 주둔하던 미군 병사들이 ‘이제 평화가 왔다’며 기뻐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소련의 분할점령 막으려 미국에 항복

돌이켜 보면,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시민들이 원폭 피해를 입은 데엔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책임도 크다. 그들은 히로시마 원폭을 맞고도 이를 '조금 더 규모가 큰 또 다른 도시공습' 쯤으로 여기고 싶어 했다. '도쿄대공습을 견뎠듯이 견디고 버티면 된다'고 우겼다. 일본군 대본영은 원폭을 '조금 더 파괴력이 큰 신형폭탄일 뿐'이라면서 '흰옷을 입으면 다치지 않을 수 있다'거나 '방공호로 피하면 된다'는 식으로 일본 국민들을 안심시키려 들었다(일본역사학연구회, <태평양전쟁사 2> 채륜, 2019, 509쪽 참조).

일본 전쟁지휘부의 그런 태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곧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쓰나미가 밀려왔다. 19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을 맺은 이래 그때껏 중립국이던 (더구나 대미 강화를 중재해줄 걸로 믿고 있던) 소련의 만주 침공이었다. 히로시마 원폭에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 수락을 망설였던 히로히토는 큰 충격에 빠졌다. 머릿속엔 미·소 협공으로 일본이 나치 독일처럼 분할 점령되는 사태가 그려졌을 것이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이른바 '국체(國體)'라 하는 '천황'체제의 붕괴였다.

히로히토의 머릿속엔 독일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가 떠올랐을 것이다.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나자말자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재빨리 도망쳤다. 그 뒤 이뤄졌던 라이프치히 전범재판(빌헬름 2세를 포함한 12명 기소에 6명 유죄로 끝난 소규모 재판)을 비껴갔다. 빌헬름 2세처럼 전범재판에 기소되거나 적어도 '천황' 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부딪치자, 끝내 무릎을 꿇었다(그러면서도 꼼수를 부렸다. 지난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히로히토가 '종전 조서'를 통해 항복한 쪽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전쟁을 벌인 중국과 소련은 빠졌다).

원폭 투하는 히로시마로 그칠 수 없었나

미 트루먼 대통령과 그의 핵심측근 제임스 번즈 국무장관은 원폭의 파괴력을 보고 놀란 일본이 곧 항복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원폭이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전쟁의지에 미친 영향은 트루먼의 기대만큼 크지 않았다. 트루먼이나 번즈와는 달리,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이나 조지 마셜 육군 참모총장은 '한 방이나 두 방의 원폭 투하만으로 일본이 항복할 리 없다'고 여겼다(하세가와 쓰요시, 371쪽).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을 떨어뜨린 뒤로도 미국은 다른 일본 도시들에 대한 원폭 투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11시간 앞서 소련군 침공이 있었고, 일본은 바로 그날 밤 항복을 결정했다. 그러자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전시지도부의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다. 20억 달러 넘게 들여 만든 핵무기를 (대량의 인명 피해를 걱정해서) 그냥 창고에 묵혀두었다면, 트루먼은 전사자 부모의 원망도 원망이려니와 '국민의 혈세를 낭비했다'는 비판 속에 미 의회의 견제와 언론의 십자포화를 받았을 것이다.

여기서 물음이 하나 떠오른다. 원폭을 한 방만 히로시마에 떨어트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물음이다. 소련군은 8월9일 0시를 넘기자 150만 병력으로 만주 관동군을 공격하고 나섰다. 같은 날 오전 11시에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 '뚱보'(Fat Man)가 떨어졌다. 트루먼은 소련군의 대일전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뚱보' 투하를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트루먼이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소련군 참전을 알린 것은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3시(티니안 시각으로 오전 4시). 소련군이 만주 국경을 넘은 지 4시간 넘게 지난 뒤였다. 워싱턴에서 '뚱보'를 실은 B-29 폭격기가 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안 섬을 떠난 것은 같은 날 오전 3시 47분. 시간대로 보면, 트루먼이 기자회견을 하기 직전 폭격기가 일본을 향해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폭격을 취소 또는 미루려 했다면 시간대로는 가능했다.

소련군 참전이란 주요 사항이 생겼지만, 트루먼 행정부 안에서 두 번째 원폭 투하 방침을 재검토했다는 흔적은 없다. 투하를 취소하려 했는데 워싱턴과 티니안 섬 사이의 통신에 기술적 문제로 취소 못했던 것도 아니다. 논의의 핵심은 일본을 차지하기 위한 미·소 경쟁에 있다. 연구자들은 전후 극동아시아에서 펼쳐질 패권 경쟁 관점에서 볼 때, 소련 참전 소식은 오히려 미국의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재촉했다고 지적한다.

▲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들의 처참한 모습. 핵무기 사용이 반인도적인 전쟁행위라는 것을 말해준다. ⓒ나가사키 평화기념관

미 언론들, 흥분 속 미래를 걱정하기도

원폭이 히로시마에 떨어졌을 때 미 언론들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며 흥분하는 분위기였다. 핵무기가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확정짓고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식의 보도였다. <시카고트리뷴> 1945년 8월7일자 사설은 원자력 에너지의 발견이 이번 전쟁에서, 그리고 어쩌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적 성과라고 격찬했다. '비무장 민간인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전쟁범죄가 벌어졌다'는 문제의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량살상무기인 핵폭탄의 문제점을 걱정하는 사려 깊은 기사나 칼럼이 전혀 없진 않았다.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한 칼럼은 핵폭탄 투하를 가리켜 '당혹스런 경외감'을 느낀다면서 '별 볼일 없는 혹성 중 하나(지구)의 역사에서 벌어진 짧고 불쾌한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이런 발견을 가능하게 한 문명의 말살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마이클 돕스, <1945년: 20세기를 뒤흔든 제2차세계대전의 마지막 6개월> 모던아카이브, 2018, 525쪽).

<뉴욕타임스>의 군사평론가 핸슨 볼드윈은 핵무기가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겠지만 '이상하며 기묘하며 끔찍한 일들이 흔하고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돌풍의 씨앗을 뿌렸다'고 했다(마이클 돕스, 526쪽). 볼드윈이 말하는 '돌풍의 씨앗'은 제2차 세계대전 뒤 80년 가까이 지나는 내내 핵무기 개발·보유 경쟁으로 이어졌다. 미 과학자연맹에 따르면, 2023년 현재 북한과 이스라엘을 포함한 9개 핵국가에서 1만2500개의 핵무기를 보유중이다. 이 가운데 미국은 5244개, 러시아는 5889개로, 둘을 합하면 전세계 핵무기의 90%에 이른다. (https://fas.org/initiative/status-world-nuclear-forces/. 참조).

오펜하이머, "무인지대에 떨어뜨렸어야"

원폭 개발에 관계했던 학자들도 핵폭탄이 우리 인류에게 미칠 악영향을 걱정했다. 이를테면,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가 그러했다. 그는 히로시마·나가사키의 대량학살에 충격을 받고 수소폭탄 개발을 못 마땅하게 여겼던 인물이다(본 연재 42 참조). "내 손에 피를 묻혔다"는 그의 절규에 가까운 탄식은 두고두고 울림이 크다. 전세계 반핵평화주의자들에게 그의 말은 오랫동안 영감을 불러일으켜 왔다. 원폭 개발과 그 사용에 관련된 자신의 책임을 평생 의식하며 살았던 오펜하이머는 숨지기 5년 전 이런 글을 남겼다.

[핵폭탄은 일본에 떨어졌다. 당시 일본 본토를 침공해 들어가는 전투계획은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것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었다.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핵폭탄을 무인도에 떨어뜨려 그들에게 경고를 줌으로써, 전투나 전란 중에 죽은 사람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실번 슈위버,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시대의창 2013, 242쪽).

핵개발 당시에 '무인지대 투하'를 생각했던 사람은 오펜하이머 혼자만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의 옛 제자로, 오펜하이머와 함께 핵개발에 관여했던 물리학자 레오 지라드(헝가리 유대인 출신)는 트리니티 핵실험 한달 전인 1945년 6월초에 보고서 하나를 작성했다. 그 보고서는 '원자폭탄을 갑작스럽게 일본에 떨어트리는 것보다는, UN 관계자들이 참관한 가운데 버려진 섬이나 사막에 떨어뜨려 그 화력을 선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실번 슈위버, 245쪽 참조).

'원폭을 실제 살상에 쓰지 말고 순전히 기술적인 수준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자'는 내용을 담은 이 보고서는 그저 문서로만 남았다.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온 신경을 모았던 트루먼을 비롯한 워싱턴 전쟁지휘부의 눈으로 보면, 지라드의 보고서나 앞서 오펜하이머의 발상은 냉혹한 전쟁의 속성을 잘 모르는 책상물림 학자들의 탁상공론쯤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 1950년대 전반기의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두 사람은 20세기의 뛰어난 물리학자이자 ‘핵의 과잉’을 걱정한 시대의 지성인들이었다 ⓒ위키미디어

"핵폭탄이 2만 개라도 도움 안 된다"

오펜하이머는 미국과 소련이 핵경쟁을 벌이는 것이 평화에 도움이 안 되며 오히려 세계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여겼다. 원폭보다 훨씬 파괴력이 큰 수소폭탄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꺼렸다.

1953년 5월 월간지 <포춘>엔 '수소폭탄을 둘러싼 숨겨진 갈등: 미 군사정책에 역행하는 오펜하이머 박사'라는 글엔 오펜하이머에 대한 미 군부의 거부감이 잘 드러났다. 그 내용을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을 늦추려는 음모의 핵심인물'이란 비난이었다. 익명으로 돼 있기에 글 기고자의 이름이 드러나 있진 않았지만, 미 군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누군가가 마음먹고 쓴 것은 틀림없었다.

자신을 공격하는 위 글에 대해 오펜하이머는 곧장 대응에 나섰다. 그해 7월 외교전문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즈>에 '원자폭탄과 미 정책'이란 제목을 글을 실었다. 글 앞머리에서 오펜하이머는 "사람들은 원자폭탄의 등장이 단지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크고 끔찍한 전쟁의 종료(the end of a great and terrible war)를 뜻할 뿐만 아니라, 모든 전쟁의 종료를 뜻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썼다.

대량살상무기인 핵무기가 전쟁을 막는 순기능을 지닌 것은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강대국들 사이의 핵무기 경쟁이 치열해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만에 하나 핵전쟁이 터질 경우라면, 인류의 파멸을 부를 수 있다는 점을 오펜하이머는 걱정하고 있었다. 바로 같은 맥락에서 그는 수소폭탄 개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핵심 주장을 옮겨본다.

[끊임없이 대량파괴라는 공격 전략용으로만 핵폭탄을 이해하거나, 일단은 소련보다 많이 만들어서 저장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어차피 폭탄이 이미 2,000개를 넘어 이제는 2만 개가 되더라도 전략적으로 도움될 것이 없다](로버트 오펜하이머, Atomic Weapons and American Policy, Foreign Affairs, 1953년 7-8월호).

오펜하이머가 이 글을 쓴지 정확히 70년이 지났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2023년 현재 미국과 소련은 각각 5000개 이상의 핵무기를 지녔고, 지구상에는 1만2500개의 핵무기가 있다. 21세기의 핵폭탄이 지닌 파괴력은 엄청나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은 그저 불꽃놀이의 폭죽 정도로 여겨질 정도다. 우리는 이른바 '핵 공포의 균형' 아래 언제라도 핵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살얼음 위에서 살고 있는 상황이다. 평소에 잘 의식하지 않고 지낼 뿐이다.

아인슈타인, "편지 쓴 것, 평생을 두고 후회"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도 오펜하이머처럼 핵무기 개발과 사용에 신중한 입장을 지녔다. 1939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움직임을 경고하면서, '미국도 핵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권유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편지는 아인슈타인의 옛제자이자 같은 물리학자인 레오 지라드가 쓴 것이었다(헝가리 유대인 출신인 지라드는 위에 나오듯이 1945년 '핵폭탄의 무인지대 투하' 보고서를 썼다). '영향력을 지닌 명사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제자의 부탁을 받아들여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는 3년 뒤인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로 빛을 봤다. 미 핵개발의 산파역이 된 셈이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핵개발에 실무팀으로 참여하진 않았다. 하지만 루스벨트에게 핵개발을 서두르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반핵 평화주의자들로부터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다. 그런 비난에 부딪칠 때마다 그는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독일이 원폭을 먼저 개발할 가능성을 꼽았다. 숨지기 5개월 전인 1954년11월, 프린스턴대학교 연구실로 찾아온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도록 추천한 일은 내 평생을 두고 후회할 실수라네, 그렇지만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했다네"(실번 슈위버, 95쪽).

아인슈타인은 죽기 바로 몇 주 전에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전쟁 뒤에도 친구로 남아있던 독일 물리학자 막스 폰 라우에가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묻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원자폭탄에 대한 걱정을 담아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는 순전히 히틀러가 먼저 폭탄을 만들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에 덧붙여 아인슈타인은 '일본에 그 폭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어야 했다. 그런 노력을 나는 하지 못했다'고 자신을 책망했다(실번 슈위버, 96쪽).

핵무기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아인슈타인은 지난날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하게 됐다. 1945년 3월25일, 루스벨트가 사망하기 직전에 아인슈타인이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저는 핵무기 사용을 반대합니다. 제 생각에는, 전쟁 중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일반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것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습니다(To my mind, to kill in war is not a whit better than to commit ordinary murder)."

루스벨트는 그 무렵 건강이 좋지 못해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읽지 못했다. 4월12일 숨졌을 때 편지는 개봉되지도 않은 채 백악관 집무실 책상에 그냥 놓여 있었다. 루스벨트가 편지를 읽었다 해도, 또는 그 후임자 투르먼이 편지의 내용을 전해 들었다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순진한 물리학자의 뒤늦은 제언' 쯤으로 곧 잊혔을 것이다.

▲ 8월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날에 맞춰 ‘핵전쟁을 멈추라’며 시위를 하는 일본의 반핵 평화주의자들.ⓒ김재명

'핵의 과잉'을 걱정한 지성인들

아프리카 벨기에령 콩고에서 우라늄 원석을 들여와 핵개발에 나서려 했던 나치 독일은 실패했고, 미국은 독일 패망 2개월 보름 뒤인 1945년 7월16일 새벽 미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트리니티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20일 만에 미국은 서둘러 원폭을 투하했다. 그 소식을 듣자말자 아인슈타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비통하다!'였다.

그 뒤로 아인슈타인은 핵폐기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1955년 그가 숨지던 해엔 영국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버트런트 러셀과 함께 '군비 축소로 전쟁을 막으려면 그 첫걸음으로 핵무기를 버려야 한다'는 선언문을 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같은 유대인 출신의 물리학자이지만 나이 차이도 많고 개성도 달랐다. 하지만 핵전쟁을 막기 위해선 핵의 투명성과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다. 오펜하이머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 신뢰관계를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현실적인 영향을 지닌 UN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노년의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보다 급진적이었다. 각 국가의 안보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세계정부'의 수립을 외쳤다.

이 두 물리학자를 보는 미국 정부의 시각은 곱지 않았다. 전쟁 뒤 동서 냉전시대가 펼쳐지면서 미국에 세차게 불었던 매카시즘 바람은 오펜하이머를 괴롭혔다. 그의 애국심을 의심한 그레이위원회는 혹독한 대질심문을 거쳐 그를 보안등급을 빼앗고 미 정부의 핵개발 정보에 대한 접근을 막았다. 아인슈타인은 감옥에 갈 각오를 했을 정도로 매카시즘에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세계적인 명성을 고려했을까, 미 정부는 그를 체포하진 않았다. 이 둘은 평화주의 과학자였고, '핵의 과잉'을 걱정한 시대의 지성인들이었다.

미국도 히로히토도 사과는 없었다

1945년 미국이 핵폭탄이라는 지옥문을 열어젖힌 뒤 1949년 소련도 핵개발에 성공했고, 그 뒤로 지금껏 우리 인류는 핵전쟁의 현실적 위협 아래 살고 있다. 그래도 희망이 없진 않다. 2017년 UN 총회에서 100개국 이상이 서명하는 핵무기금지조약이 통과되고, 이를 위해 힘써왔던 비정부기구인 ICAN(International Campaign to Abolish Nuclear weapons)이 그 해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미국은 78년 전에 그 위험한 판도라의 상자를 처음 열어젖힌 만큼 책임감을 지니고 핵폐기에 앞장서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8개 핵보유국들도 하나같이 핵무기금지조약을 외면하고 있다. 늦게라도 미국이 앞장선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지만, 어려운 이야기다.

명분이야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수십만 명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학살한 미국의 반인도적 전쟁범죄(crimes against humanity)에 대해선 어떤 처벌도 없었다. 그렇기에 독일의 헤르만 괴링이나 일본의 도조 히데키가 '승자는 법관석에 앉고 패자는 피고석에 선다'는 투의 볼멘소리를 해댔다. 대형 인명 사고가 나면 누군가는 사과와 더불어 책임을 져야 마땅하지만, 원폭 피해에 대해선 지금껏 어느 미국 지도자도 사과하지 않았다.

히로히토도 마찬가지다. '일격 강화론'을 내세우며 질 게 뻔한 전쟁을 질질 끌다가 그의 '신민(臣民)'들이 수십만 명이나 죽었지만, 1989년 죽을 때까지 진심 어린 사과는 없었다. 죽은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한 일본의 극우들은 원폭 범죄와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퉁치자'는 몰염치한 말까지 내뱉는다. 다음 주엔 이 문제들을 살펴보고 원폭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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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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