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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바다'를 건넌 옥동자들과 처음 만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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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바다'를 건넌 옥동자들과 처음 만난 순간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초벌, 재벌을 거쳐 가마 문을 열어보니…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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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빚기 백날이 되는 날부터는 승훈이에게 불 떼는 방법에 대해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유명 도자꾼 곁에 발을 딛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의 경험 세계는 속속들이 그들만의 세계였기에 도서관에 소장된 도자기에 관한 글로 그들의 세계를 짐작했다.

그렇게 가마를 운용하는 정보를 알기 위해 혼자 천하를 뒤지고 다녔다. 나는 도자기술 탐색가였고, 도자예술 탐구자이자 자유로운 방랑자였다. 대학 시험공부를 할 때도 혼자 해내지 않았던가. 높은 산길 바윗길도 혼자 걷지 않았던가.

언제나 분주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어느 정도 그릇을 빚어내자 주저 없이 불 떼기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가마 안에 그릇을 쟁이는 일부터 시작했다. 가마 안은 생각보다 높고 깊고 넓어 그릇을 쟁이려면 가마 안으로 머리와 가슴을 밀어 넣어야 했다.

바닥 면은 35✕40cm 넓이와 5kg 무게 내화판을 네 개나 깔 수 있는 공간이다. 낮은 지주 위에 내화판을 얹고 난 후 그 윗면에 조심스럽게 작은 그릇들을 1cm 간격으로 밀어 넣었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알맞은 높이의 지주 3개를 가장자리 삼각형 꼭지점에 세워놓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내화판을 얹은 후 빚어낸 그릇들을 정성들여 세웠다. 한 블록에 얹어놓은 내화판이 8층이나 되었다.

똑같은 방법으로 오른쪽에도 쟁이고 보니 반듯한 건물 4동이 세워졌다. 가지런하고 조용했다. 좌우 네 구역을 합하니 내화판이 30개나 되었고, 그 위에 쟁인 크고 작은 그릇도 백 개가 넘었다. 한 나절이 더 걸렸지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가마 안을 바라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두 손을 모아 가마를 향해 합장하여 머리를 숙이고 난 후 가마문을 가만히 닫았다. 닫힌 가마 안은 밖과 다른 미지의 공간이요, 암흑의 세계였다. 130억 년 전 우주가 폭발하기 직전의, 시간도 공간도 없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초벌구이에 임했다. 약 6시간 동안 평온에서부터 시작하여 900℃ 가까이 끌어올리는 초벌구이, 불의 여정, 나도 여정의 길에 올라 있었다. 줄곧 긴장과 놀람의 순간이 반복되었다.

처음엔 가마문을 살짝 열어 가스 압력을 낮춰 놓고 두 시간 동안 200℃ 가까이 올라가기까지 온도를 높여간다. 공기 소통을 원활히 하여 온도가 상하좌우 모든 곳으로 골고루 퍼지고 스며들게 하기 위함이다. 갑자기 높이면 흙속에 남아있는 공기가 팽창해 그릇이 깨어질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내부 온도가 200도에 이르게 되면 가마문을 단단히 옭죄어 잠갔다. 그리고 남은 10개 가스관에 시간차를 두고 불을 지펴 나갔다.

내가 분초로 그려낸 도판에 따라, 시간표에 따라 시선을 온도계기와 압력계기, 시계에 맞춰 흐트러짐이 없이 압력과 온도를 지켜나갔다. LPG 가스통의 상태를 점검하거나 굴뚝 연기 상태를 관찰하는 등 꼭 해야 할 일이 아니고는 단 1초도 가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작업장에는 가마 속 가스 타는 소리가 굉장하게 울려 퍼지고 떨림으로 웅웅거린다. 그 속에 내가 있었다. 모든 순간순간 가마와 운명을 같이 하는듯한 느낌이 전신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초벌구이는 900℃ 가까이 가서 끝났다. 그때가 되면 가스 분출구를 꼭꼭 닫고 공기구멍도 틈 없이 막는다. 그리고는 하루동안 그대로 두면 가마 안 온도가 낮아진다. 하루가 지나 100℃ 밑으로 내려가면 초벌구이 가마문을 열어 식은 그릇을 꺼냈다. 서너 개에 금이 가 있을 뿐 다른 그릇들은 모두 멀쩡했다. 따듯하고 건강했다. 마음이 놓였다. 가벼운 하얀 빛이 감도는 엷은 황갈색이다. 모두 꺼내 나란히 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뒤 그릇 하나하나를 맑은 물에 휘저어 말끔하게 먼지와 찌꺼기를 걷어내 그늘에 말렸다. 유약을 입히기 전에는 그릇의 겉면에 그림을 그려 넣을지 색을 칠할지 선택하여야 한다. 도백(陶伯)을 넘어 화백(畵伯)이 하는 경지의 일. 내가 화가 노릇을 한다면 내 그림과 색이 천년만년을 갈 수도 있겠지만, 이 일은 전적으로 김 화백에게 맡겨놓고 참견하지 않았다. 그런 뒤 하얗게 희석한 유약 물통에 담갔다 건져 올리고 나무판에 가지런히 놓으니 그릇 모두 티 한 점 없이 하얗다.

이런 작업이 끝나면, 그릇들을 하나하나 정중히 가마 안에 다시 쟁여 초벌과정을 다시 거친 후 더 길고 더 높은 온도로 재벌과정을 거친다. 12시간 동안 온도는 1270℃까지 오르고 긴장이 연속되는 시간이 흐른다. 조금도 빈틈이 허락되지 않는다. 온도상승을 멈추고 난 후 굳히기까지 끝나면 재벌과정이 끝나게 된다. 불의 세계가 어느덧 희고 노랗고 찬란하고 은은하고 조용한 세계로 변해 있다. 고요함 속의 희열! 바로 그것이다.

새벽 찬 공기를 마시고 가마 철문 앞에 섰다. 가만히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숙였다. 가만히 철문의 운전대를 돌려 자물대를 풀었다. 숨이 멎는 순간, 가마 안의 숨소리가 밖으로 퍼져 나오는 듯하다. 그렇게 보았다. 옥빛 그릇의 아름다움을! 조용함 속의 찬란함을! 그 뜨거운 불을 이겨내고 어깨를 편 그릇들을! 작든 크든 하나하나가 거센 불의 바다를 견뎌 온 용사들이었다.

▲ 2010년 생활자기전에 전시된 신금호 선생이 빚은 도예품들 ⓒ손호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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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호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거쳐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안성에 정착해 도예가로 제2의 인생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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