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31일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을 계기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홍익표 원내대표 등 야당 지도부와 잇달아 회동을 가졌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생'을 언급하며 한 목소리를 냈고, 웃으며 그와 3차례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야당 원내대표의 비판에도 고개를 끄덕였고, 회동 자리마다 "경청"을 언급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래 야당 지도부와 가장 많은 접점이 형성됐다는 점에서 섣부르지만 여야 간 협치 가능성도 점쳐진다. 다만 예산·법안 등 현안에서의 이견은 그대로여서, 야당이 주장하는 영수회담 수용 등 추가적인 관계 형성 노력이 뒤따를지 주목된다.
尹 "경청하겠다"…李 "민생 어려움 신경써달라"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이날 오전 예산안 시정연설 사전환담에서 지난 대선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오셨어요? 오랜만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며 악수했고, 이 대표는 말없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진 환담 모두발언에서 "국회의 협조를 부탁드린다"며 "저희들도 민생의 어려움에 대해서 계속 현장을 파고들고 경청하겠다"고 했다.
이 대표의 환담장 발언은 비공개로 진행됐으나, 민주당 권칠승 수석대변인은 이 대표가 이 자리에서 "민생 현장이 너무 어려우니 정부 부처는 이런 점에 좀더 신경쓰며 정책을 집행해달라"고 말했다고 기자들에게 전했다.
이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환담 내용에 대해 "대통령과 잠시 만나뵙는 자리에서 우리 현장의 민생과 경제가 너무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다"며 "정부 각 부처들이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생각으로 현장에 좀더 천착하고, 정책이나 예산에 있어서 대대적인 전환을 해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고 추가로 밝혔다.
홍익표 원내대표도 "대통령이 민생 관련 얘기를 했고, 이 대표도 '민생이 매우 어려우니 현장 목소리를 많이 듣고 민생 대책을 마련해달라'는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환담에 참석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상세한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덕담을 나눴다"고만 했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이날 윤 대통령의 국회 본회의장 입장·퇴장시에도 두 차례 더 손을 맞잡았다. 윤 대통령이 본회의장으로 들어서면서 먼저 입장해 있던 이 대표에게 다가갔고, 이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악수에 응했다. 윤 대통령이 연설을 마치고 의석을 돌며 여야 의원들과 악수하고 회의장을 나서려 할 때, 이번에는 이 대표가 먼저 윤 대통령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고 윤 대통령은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홍익표 "거부권 반복 행사 유감" …尹 "말씀 다 기억했다가 국정에 반영"
윤 대통령은 이날 국회 연설을 마치고 김진표 국회의장, 17개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들과 함께 간담회·오찬을 함께했다. 윤 대통령은 간담회장에서 먼저 "국회는 오늘 세 번째 왔지만 상임위원장님들을 이렇게 다같이 뵙는 건 처음"이라며 "저희 정부의 국정운영, 또는 국회의 의견, 이런 것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잘 경청하고 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환담장에 이어 이날만 두 번째로 "경청"을 반복 언급한 것이다.
윤 대통령에 이어 발언 기회를 가진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 면전에서 다소 비판적인 내용을 언급해 눈길을 모았다. 홍 원내대표는 "대통령께서 당선 후 첫 소감으로 '헌법정신과 의회를 존중하고 야당과 협치하면서 국민을 잘 모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며 "대통령께서 야당에 섭섭한 것도 있으시겠지만, 우리 야당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대통령께서 국회를 존중하는 문제, 야당과 협치하는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아쉬움이 크다"고 지적했다.
홍 원내대표는 특히 "국회에서 통과된 법들에 대해서, 대통령께서 협의보다 이후의 단독 처리와 거부권 행사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직격탄을 쏘았다. 그는 "조금 더 법안·예산 심사 과정에서 국회에서의 자율성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 특히 여야가 서로 협의해서 합의한 것에 대해서 대통령실이 열린 자세로 수용해 주시면 좋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홍 원내대표는 또 "민생 현장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 정부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그 역할이 더 중요한 시기"라며 "재정 건전성과 관련한 대통령과 정부의 고민도 이해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보다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것이 야당과 또 일부 상당수 국민의 생각"이라고 윤석열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를 비판하고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대통령께서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홍 원내대표는 이어 "물가·환율·유가 삼중고에 어려움이 있는데 금리 등 부분에 대해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서 서민과 중산층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국가 재정적 역할을 해야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는데, 윤 대통령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태도를 보였다.
홍 원내대표는 또 "현 정부 출범하고 불행한 사건이 몇 번 반복됐다. 이태원 참사, 오송 참사 등이 있었다"며 "이것은 대통령의 책임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대통령께서 따뜻한 손을 좀 내밀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물론 교회에 가셔서 추모 예배를 보신 것은 있지만, 현장에서 그 분들과도 소통하고, 그 분들의 말씀을 좀 들어주시고, 그 분들이 요구하는 여러 가지 법과 제도 개선 등에 대해서도 대통령실이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여야가 협의할 수 있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발언을 마무리했다.
윤 대통령 면전에서 거부권 행사, 긴축재정 운용, 이태원 참사 등 여야 간 이견이 큰 민감한 사안을 모두 거론한 것이나, 윤 대통령이 이에 대해 수용적인 제스처를 보낸 것 모두 주목을 끌었다.
윤 대통령은 홍 원내대표뿐 아니라 야당 소속 상임위원장들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 서울-양평 고속도로 의혹,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 등을 지적한 데 대해서도 의견을 청취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野 상임위원장들, 尹 면전에서 홍범도·후쿠시마·이태원 참사 언급하며 비판)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은 간담회 관련 오후 서면브리핑에서 "상임위원장들은 대통령에게 소관 분야의 현안에 대해 설명하고, 건의사항을 전달했다"며 "대통령은 상임위원장들의 건의를 잘 경청하고 일부 건의 등에 대해 즉석에서 답변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 대변인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간담회 마무리 발언에서 "위원장님들의 소중한 말씀을 참모들이 다 메모했을 뿐만 아니라 저도 아직은 기억력이 좀 있기 때문에 하나도 잊지 않고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가 국정운영과 향후 정부 정책을 입안해 나가는 데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잘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김진표 국회의장은 간담회 자리에서 윤 대통령에게 "이런 만남을 정례화하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윤 대통령은 어느 상임위원장이 "술 한 잔하면서 대화하니 여야가 없더라"라고 한 발언을 인용하며 '저녁을 모시겠다'고 했다고 이 대변인은 덧붙였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협치 분위기에 힘을 실었다. 윤 원내대표는 "홍 원내대표께서 취임 일성으로 야당을 존중하고 배려해달라고 말씀하셨다. 깊이 유념하고 실천하겠다"며 "여야가 지금까지의 오월동주 관계에서, 이제는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동주공제의 관계를 이루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윤 원내대표는 "정치는 궁극적으로 국리민복을 위한 것인데, 그동안 여야가 상대를 이기기 위한 정치를 하느라 정작 국민을 외면해 왔다"며 "국민들은 여야가 분열의 정치에서 통합의 정치로 나아가길 바라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윤 원내대표는 "통합의 정치, 국민 통합을 위해서는 대통령께서 늘 강조하시는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고 실현하는 노력을 해야 된다"며 "여야가 격렬한 논쟁을 벌일 때조차도 헌법적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여야 원내대표 및 상임위원장들과 약 1시간여에 걸친 간담회를 진행한 후 별도로 마련된 오찬장으로 이동했다. 윤 대통령은 오찬사에서 "제가 오늘 이렇게 국회에 와서 의원님들과 많은 얘기를 하게 돼서 저도 아주 취임 이후로 가장 편안하고 기쁜 날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여러분들이 아까 간담회 때 하신 말씀은 제가 다 기억했다가 최대한 국정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웃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윤 대통령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경제, 안보 등 대외적 위기 상황이 많이 있고, 또 국민들의 민생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초당적·거국적으로 힘을 합쳐서 국민들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미래세대를 위해서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모두 힘을 합쳐야 될 때"라고 강조하며 이같이 말했다.
정기국회 예산·법안 심사, 여야 '협치' 가능할까
이날 민주당 의원단이 윤 대통령의 본회의장 입장시 회의장 밖에서 '침묵 피켓시위'를 진행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윤 대통령 및 여야 대표·원내대표의 발언 내용이나 대화 분위기는 비교적 우호적인 기조였다. 여야가 정기국회 예산·법안 심사 및 내년 총선을 앞두고 극단 대결 대신 '민생'을 화두로 정책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국면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다만 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예산안 시정연설에 대해 "당면한 경제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국민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공감, 그리고 실질적인 대안은 찾아볼 수 없는 맹탕 연설", "반성한다던 대통령의 말씀과는 달리 국정운영 기조는 단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윤영덕 민주당 원내대변인)라고 비판하는 등 정부 예산안에 대해 엄격한 심사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고, 홍 원내대표도 전날 "감 놔라 콩 놔라 한다면 아예 협의 자체를 안 하겠다"고 정부에 엄포를 놓기도 했다.
윤 대통령이나 이 대표나 공히 '민생'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동음이의어에 가까울 만큼 민생 현안에 대한 인식 격차도 크다. 윤 대통령은 전날 국제노동기구(ILO) 차별금지 협약 탈퇴 요청과 중대재해처벌법 완화를 '민생 현장의 주요 목소리'로 언급했고, 국민의힘은 이날 화평법·화관법·환경영향평가법·외국인고용법·산업집적법·산업입지법 등 기업 규제 법안 완화를 경제위기 해법으로 내세웠다.
반면 민주당은 이날 홍 원내대표의 간담회 발언처럼 확장재정을 주장하고 있고, 특히 올해 정부 예산안에 담긴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방안에 강력 반대하고 있다. 노동 현안에 있어서도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가결을 다음달 9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고 하는 등 인식차가 크다. 민주당은 서울-양평 고속도로,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감사원 표적감사 의혹, 방송 장악 시도 등 4대 의혹 사안에 대한 국정조사도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윤 대통령이 국회를 찾아 선보인 '경청', '악수' 행보가 정기국회 여야 협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 소통과 대화·협상이 병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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