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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원폭 투하를 서둘렀던 세 가지 이유, 실제 목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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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원폭 투하를 서둘렀던 세 가지 이유, 실제 목적은?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43]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인가 ⑭ 원자폭탄 下1

오래 전의 일이지만, 1992년 히로시마에서는 UN군축회의가 열렸다. 1979년부터 해마다 열려온 이 국제회의는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줄이자는 목적을 지녔다. 히로시마가 '핵무기 공격을 받은 첫도시'라는 상징성이 더해져 UN군축회의는 지구촌의 눈길을 끌었다. 히로시마로 회의장소를 정하려고 일본 쪽에서 로비를 열심히 벌였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각국 정부대표는 물론 반핵 평화운동가들이 기자들과 함께 회의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온 한 하버드대학 교수의 말이 논란을 불렀다.

[원폭 투하는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고 수많은 일본인의 목숨을 구했다. 원폭 투하가 불러일으킨 공포는 그 뒤 핵전쟁을 예방하는 데 기여했으므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결국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의 생명도 구한 셈이다](이안 부루마,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한겨레신문사, 2002, 134쪽).

누가 들어도 미국의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는 발언이었기에, 참석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핵무기 폐기운동을 벌여온 평화운동가들이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며 먼저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원폭 희생자 유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희생자들과 아픔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가해자의 관점'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격분했다.

일본 언론들도 나섰다. '명색이 하버드대 교수라는 사람이 피해자의 관점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다. 그의 망언에 혐오감을 느꼈다'며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미국이 이런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핵무기를 갖지 않은 나라들로부터 많은 저항을 받을 것'이라 지적했다. 일본 언론의 속성상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저질렀던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편은 아니지만, 원폭으로 민간인을 무차별 살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사설에 담겼다.

독자들의 오해를 막기 위해 먼저 짧게 적는다. 이 글은 히로히토를 우두머리로 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저질렀던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범국가 일본을 잘못된 방식(원폭 투하)으로 대응함으로써 비무장 민간인들을 무차별 살상했던 미국의 전쟁행위는 이른바 '반인도적인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라는 문제의식이 이 글의 출발점임을 강조하고 싶다.

▲ 1945년 8월6일 원폭을 맞은 히로시마 시가지의 처참한 모습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원폭 신화, '미국인과 일본인의 목숨을 구했다'

원자폭탄 투하가 있은 지 벌써 80년 가까이 흘렀다. 그동안 원폭 투하가 정당했느냐를 둘러싼 여러 논란이 벌어지면서 '원폭 신화(神話)'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여기서 '신화'란 원폭 사용을 긍정적으로 (또는 비판적으로) 보려는 시각과 관련된다. 핵무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신화'라는 용어는 좋은 의미로든 비판적 의미로든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그 첫째 원폭신화는 '원폭 투하가 없었다면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고, 미군이 펼칠 일본 본토 상륙전에서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됐을 것이다. 따라서 원폭이 숱한 미군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일본과의 처절했던 전쟁을 끝장내고 미군 병사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 원폭 투하는 올바른 결정이었다는 논리다.

아래 글에서 보겠지만, 워싱턴의 미군 지휘부는 원폭 투하 없이 1945년 가을에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펼칠 경우, 26만 명의 미군 손실이 생길 것으로 예상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21만 명에 버금가는 미군의 전사상자가 나온다는 얘기다. 미국의 시각에서는 미군 1명의 목숨이 일본인의 목숨보다는 당연히 귀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국인 26만을 아끼려고 일본인 21만을 희생시켰다는 '미국식 셈법'으로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다.

두 번째 원폭신화는 '원폭 투하로 더 많은 일본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원폭이 두 방이나 거푸 떨어져 많은 사망자를 내는 것을 보고 일본이 항복했기에, 그나마 더 이상 일본인 전쟁 희생자가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는 논리다. 실제로 미군의 본토 상륙작전이 일어날 경우 (미군의 희생도 크겠지만) 일본 군인은 물론 민간인의 희생이 컸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서다. 하지만 반핵 평화주의자들은 '더 많은 일본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논리로 원폭 투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원폭 투하 자체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을 금지하는 국제법을 어기는 전쟁범죄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미리 짚어볼 사항. 1억 옥쇄를 외치며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일본 군부의 강경파를 누르고 히로히토 일왕이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들기로 이른바 '성단'(聖斷)을 내린 배경에는 원폭 두 방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히로히토의 항복 결정 요인엔 원폭보다는 소련군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이에 대해선 다음 주 글에서 살펴봄).

1946년 3월 간토(関東)평야로 침공 계획

1945년 전반기 일본은 전쟁을 이어나갈 힘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태평양 바닷길은 제해권을 쥔 미군 함대의 봉쇄로 말미암아 석유와 철강 등 전쟁물자와 식량 수입이 끊겼다. 공장들은 가동을 멈추고 국민들은 굶주렸다. 미군 B-29 폭격기의 잇단 공습에 대공포를 쏘거나 일본 군부가 그토록 자랑하던 제로센(零戦) 전투기를 띄워 맞서지 못하고,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조금 더 기다리면 일본이 항복할 것이 뻔히 내다보이는 상황에서 굳이 핵폭탄을 투하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량 살상했다는 비난이 두고두고 따를 것을 무릅쓰고 (뒤집어 보면, 만에 하나 미국이 전쟁에서 일본에 졌다면 미국의 전쟁지도부가 전범재판에 기소될 수도 있음에도) 두 방이나 거푸 원폭을 떨어뜨린 사정들은 무엇이고, 고개를 끄덕일 만큼 납득할 만한 사정들인가. 오늘 이 부분을 중심으로 원폭 문제를 살펴보자.

아시아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이른 1945년 봄 미국의 전시지도부는 일본을 항복시키는 방법론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육군 수뇌부는 본토 진공작전을 펴야 일본을 무릎 꿇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 해군과 육군항공부대(1947년 9월 18일에 창설된 미 공군의 모태) 수뇌부의 견해는 육군과 달랐다. 일본 본토 침공작전이 펼쳐질 경우 미군 전사상자 문제가 반드시 생겨날 것이므로, 근거리 전략폭격을 이어가면서 일본 해역을 봉쇄하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특히 해군은 중국 해안의 기지를 미군이 접수하는 것도 일본의 저항을 줄일 수 있는 방책이라고 했다.

이에 맞서 미 육군은 '전략폭격이 적국에 영향을 주긴 하지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한다'며 '일본 본토 진공작전 말고는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없다'며 폭격의 한계를 지적했다. 실제로 독일의 경우 연합군의 집중공습을 받았지만, 독일의 패배를 이끈 것은 지상군 공격이었다. 일본의 경우도 도쿄 대공습(1945년 3월10일) 같은 주요 도시들을 겨눈 잇단 폭격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전쟁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일본 본토 침공을 주장하는 미 육군의 이런 입장을 앞장 서 이끌었던 이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었고, 육군 수뇌부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오키나와 전투가 한창이던 1945년 5월말 워싱턴의 합동참모회의는 일본 본토 진공작전을 논의했다.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이라 이름 붙인 계획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945년 11월1일 후쿠오카·나가사키 등이 자리한 규슈(九州) 상륙작전을 벌이고(작전명: 올림픽), 1946년 3월1일 일본의 가장 큰 섬이자 도쿄 오사카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이 자리한 핵심지역인 혼슈(本州)와 간토(関東)평야 쪽으로 침공한다는(작전명: 코로넷) 계획이었다.

본토 침공계획은 문서로만 남았다. 1945년 7월16일의 핵실험 성공은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만들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전세가 급격히 기울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몰락 작전'은 없던 일이 됐다. 트루먼 미 대통령을 비롯한 워싱턴의 전쟁지도부가 원폭 투하로 가닥을 잡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세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 원폭 부상자들. 피폭 당일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방사능 오염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7 대 1의 '사이판 비율'

첫째, 미군 전사자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미 전쟁의 운동장이 기울대로 기운 상황이었는데도, 일본 군부의 강경파들은 입으로는 1억 옥쇄를 주장했다.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1945년 8월15일 자결)를 비롯한 일본 육군 강경파들은 '결호 작전'이란 이름 아래 본토 결전을 주장하며 항전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1945년 7월23일엔 국민의용병역법을 만들었다. 이 법에 따르면, 15~60세 남자, 17~40세 여자는 국민의용전투대에 들어가 총검술 훈련을 받도록 했다. 하지만 이들을 무장시킬 소총이 없어 기껏해야 죽창이 주요 장비였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문제는 일본의 전국민이 손에 수류탄을 들고 옥쇄하겠다는 각오로 본토 방어에 나설 경우 미군 희생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미 미군은 사이판, 이오지마, 오키나와 등 태평양의 주요 섬들을 공략하면서 많은 전사자를 냈다. 일본군이 죽음을 각오하고 드세게 저항하는 것을 보고 워싱턴의 전쟁 지휘부는 충격을 받았다.

[사이판에서 미군 해병대가 입은 손실은 전사 3,426명, 부상 1만 3,099명이었다. 일본의 완강한 방어전으로 말미암아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일본 7명을 제거하는 데 미군은 전사자 1명, 부상자 몇 명이 나오게 된다'고 판단하게 됐다. 그 뒤 미국의 작전 입안자들은 이 '사이판 비율'을 '태평양의 전략 수준에 따른 사상자 추계치'로 이용했다](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 삼인, 2010, 861쪽).

사이판전투(1944년 6~7월)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2만 3,811명이었고 미군 전사자 3,426명이었다. 사이판 전투를 치른 뒤,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일본군 7명 대 미군 1명' 꼴로 전사한다는 이른바 '사이판 비율'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오지마, 오키나와, 일본 본토 진격 등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 생겨날 미군 희생 규모를 '사이판 비율'로 가늠하게 됐다.

사석(捨石)이 된 이오지마 수비대원들

'유황도'(硫黄島)로도 알려진 이오지마에서의 전투(1945년 2~3월)는 '사이판 비율'보다 더 미군에게 출혈을 강요했다. 1945년 3월18일 미군에게 이오지마가 완전 점령되기 전날 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 육군중장은 일본군 대본영에 '이제 탄환도 없고 물도 모두 말랐다. 17일 밤에 본관이 앞장 서 살아남은 자 전원은 장렬히 총공격을 감행한다'는 마지막 전보를 보냈다.

도쿄의 전쟁지도부는 다가올 최후의 일본 본토 결전에 대비하면서 태평양의 모든 주요 섬 수비군들이 되도록 많은 출혈을 미군에게 강요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들 섬 수비대는 바둑으로 치면 사석(捨石, 버리는 돌)과 같았다. 본토 결전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치르기 위한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히로히토는 최후의 본토 결전을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태평양의) 모든 섬의 수비대에 본토를 위한 외호(外濠)가 될 것을 명했다. 수비대의 사명은 적에게 되도록 많은 출혈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오지마 수비대 사령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은 이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히로히토는 그 불운한 수비대가 미 해병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히로히토는 일본의 패배를 인정하고 적절한 절차를 밟을 것을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희생을 부추겼다](허버트 빅스, 538쪽).

이오지마 전투의 결과는 처참했다. 그곳을 지키던 일본군 수비대 2만 3천 명 거의 전원이 '옥쇄'하기까지, 미군은 전사자 7,315명(부상자 1만9,189명)을 냈다. 이 경우 전사자 비율은 어림잡아 일본군 3명 대 미군 1명이다. 오키나와전투(1945년 4~6월)에서는 미군 전사자 1만 2,500명, 일본군 전사자 9만~12만명으로 '사이판 비율'이 대충 들어맞았다.

▲ 1945년 7월에 열린 포츠담회담. 트루먼 미 대통령은 회담 첫날에 원폭실험 성공 소식을 들었지만 회담 막판에야 스탈린에게 알렸다. 스탈린은 정보망을 통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대일 참전을 서두르고 있었다. ⓒ위키미디어

"일본 본토에 76만 미군 투입하면 26만 손실"

일본 수뇌부의 버티기 전략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짜는 워싱턴 전략가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사이판 비율'을 일본 본토 진공작전에 적용할 경우, 수십만 명의 미군 전사자가 나올 걸로 보였다. 1945년 6월18일 백악관에서 육해군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해리 트루먼대통령은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에게 먼저 의견을 물었다.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일본 본토 침공을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월1일 규슈에 최초 상륙할 병력은 76만 6,700명이 될 것이었다. 그는 피해가 크겠지만 항공력만으로는 일본을 정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항공대를 대변하는 이커는 그런 판단이 사실임을 시인했다. (유럽전선에서도) 항공대는 독일군을 제압하지 못했다](존 톨런드, <일본제국 패망사>, 2019, 1153쪽).

위 문장에 나오는 이커는 아이라 C. 이커 중장을 가리킨다. 그는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 대장을 대신하여 그 백악관 회의에 들어갔다. 마셜 장군의 말이 끝나자 트루먼은 합동참모회의 의장인 윌리엄 레이히를 바라봤다. 직설적인 성격을 지닌 해군 제독으로 미 태평양함대사령관을 지낸 레이히는 미 본토상륙작전이 지닌 위험성에 대해 말했다.

"육군사단과 해병대사단이 오키나와에서 35%의 사상피해를 입었고, 일본 본토에서 첫 침공지로 선택된 규슈를 공격할 때 비슷한 사상자 비율을 예상할 수 있으니, 그 작전에 군인 76만 명을 투입하면 전사상자 수가 지금까지 전세계 모든 전선에서 미국이 입은 전사자와 얼추 같은 수인 26만 8,000명은 될 것이다"(존 키건, <제2차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7, 853쪽).

갑론을박 끝에 백악관 회의는 '몰락 작전'이란 이름 아래 일본 본토로의 진공작전을 추진한다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트루먼은 '일본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오키나와 전투 같은 대량 전사상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위에 쓴 대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 전사자 숫자가 1만 2,500명에 이르자, 미국 여론이 좋지 못했다. 정치인인 트루먼은 당연히 앞으로 생겨날 미군 전사자 누계 숫자가 적힌 서류의 곡선이 올라가는 데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미군 사상자 전망 수치가 신경 쓰인다면 그럴듯한 대안은 무엇일까. 유대인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맨해튼 프로젝트 팀으로부터의 핵무기 개발 성공 소식이었다. 트루먼의 시각에서 보면, 핵공격은 미군 사상자가 안겨줄 정치적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는 숨통이었다. 1945년 7월16일 트리니티 핵실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20일 만에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던 것은 그런 사정에서였다.

20억 달러짜리 원폭 안 쓰면 더 큰 비난

둘째, 원자폭탄에 들어간 개발비용이 워낙 컸기에 이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 따를 비난을 의식에서였다.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이란 이름 아래 원폭 개발에 쓰인 예산은 20억 달러. 이즈음 화폐 가치로는 적어도 300억 달러가 넘는 거액이다. 2023년도 한국 국방예산이 420억 달러 규모이니, 맨해튼 계획에 들어간 비용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도 국민의 세금으로 어떤 공사를 마쳤는데 효용도가 떨어지면 '국민의 혈세를 낭비했다'는 비난이 쏟아지곤 한다. 하물며 전쟁 중에 원자폭탄을 만든답시고 엄청난 돈을 쓰고도 정작 그 무기를 쓰지 않는다면, 예산 낭비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 무기를 안 써서 내 아들이 죽었다'는 부모의 원망을 들었을 것이다.

여론의 흐름과 선거를 의식해야 하는 정치인인 트루먼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아 '1945년 여름에 끝낼 수도 있던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더 많은 피를 흘렸다'는 비난만큼은 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수십만 명의 민간인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여기서 인종주의와 관련한 물음이 나온다. 만에 하나,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항복하기 앞서 미국이 핵무기를 손에 넣었다면, 같은 백인 기독교 문명국가인 독일의 주요 도시에다 원폭을 떨어뜨릴 수 있었겠느냐는 물음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미국에 있던 일본계 시민들은 집단 격리됐지만, 독일계는 자유롭게 지냈다.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을 가리켜 '누런 원숭이' 또는 박멸시켜야 할 '이'나 '기생충'에 견주곤 했다(그렇다고 원폭 투하를 인종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은 삼가야 할 일로 보인다).

소련 참전에 앞서 서둘러 원폭 투하

셋째, 소련의 대일전 개입 이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원폭 투하를 서둘렀다. 이는 전쟁 뒤 아시아 패권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관련된다. 돌이켜 보면, 미국은 핵무기 개발 전까지는 태평양에서의 잇단 전투로 늘어나는 미군 사상자 부담 탓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재촉하는 입장이었다.

[상당 기간 동안 미국의 정책은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을 대단히 바람직하게 여기고 있었다.소련군이 만주를 공략하면, 일본군 사단들이 만주에 묶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미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 본토로 복귀하는 사태를 막아줄 터였다](다이애나 프레스턴,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 뿌리와이파리, 2006, 459쪽).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미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독일 패전 뒤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을 벌이기로 약속했다. 스탈린은 대일전 참전의 대가로 루스벨트로부터 △러일전쟁 뒤 일본에 빼앗겼던 사할린 섬의 남반부를 반환 받고 △일본이 '지시마(千島) 열도'라 일컫는 쿠릴 제도를 러시아 영토로 병합하고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외몽고의 독립을 보전해 사실상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얄타회담 2개월 뒤인 1945년 4월12일 루스벨트가 숨을 거두자, 후임자 트루먼도 취임 초기엔 소련군의 참전을 재촉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1945년 7월16일 핵무기 개발 성공으로 생각이 달라졌다. 소련이 대일전에 일찍 뛰어든다면, 일본의 패전 뒤 소련은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고 극동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들 것이라 판단했다.

전승국 4개국이 분할 점령한 독일처럼, 일본을 소련과 나눠 군정을 실시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 막아야 했기에 트루먼은 원폭 투하를 서둘렀다. 트루먼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는 전쟁이 끝난 지 딱 15년 되던 날에 이렇게 그때를 돌아봤다.

"원폭 투하 바로 며칠 동안 그의(트루먼 대통령의) 견해는 나와 같았다. 즉 우리는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개입하기 전에 일본과의 전쟁국면을 끝내고 싶다는 것이었다"(U.S. News and World Report, 1960년 8월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는 소련이 대일전에 개입함으로써 따르게 될 번거로운 절차(승리자의 지분 나누기 협상) 없이 원폭 투하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쟁을 끝내려 했다. 번스는 '원폭 투하 뒤 일본은 항복할 것이고, 소련은 일본과의 관계에 그렇게 깊숙이까지 개입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바라는 대로 일이 풀려가지 않았다.

▲ 나가사키의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머물던 조선인 4만 명이 희생됐다. ⓒ김재명

흐루시초프, "너희에게 신세진 것이 없다고?"

스탈린은 트루먼을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봤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이용해 소련을 제치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후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쥐려 한다고 여겼다. 그런 판단 아래, 소련군 장성들에게 대일전 참전계획을 재촉했다. 소련군은 처음에 세웠던 1945년 8월15일 대일전 참전 계획을 8월9일 0시로 앞당겼다. 그때 소련 지도부가 대일전을 서두른 배경을 말해주는 자료가 있다. 데이빗 할로웨이(스탠포드대, 역사학)가 스탈린과 소련의 핵개발 추진 비화를 다룬 책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전 소련 총리)가 남긴 기록을 보자.

[스탈린은 과연 미국인들이 (사할린을 비롯해 전쟁 뒤 소련이 갖기로 한 영토) 약속을 지킬 것인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참전하기도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 어떻게 될까. 미국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몰랐다 '우린 너희에게 신세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라고](David Holloway, <Stalin and the Bomb> Yale University Press, 1994, 125쪽).

나가사키 원폭 투하 11시간 전에 이뤄진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은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남북에 각기 미군과 소련의 군정이 펼쳐지며 분단이 고착화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트루먼은 스탈린이 독일의 경우를 내세워 일본의 분단 점령에 나서려는 것을 막기 위해 한반도의 절반을 떼어줬다'는 이야기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워싱턴이 겉으로 말할 수 없는 진짜 목적"

이제 글을 매듭지어야겠다. 우리는 지금껏 미국이 원폭 두 방을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뜨린 배경을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봤다. △일본 본토 침공작전을 펼칠 경우 26만으로 예상되는 미군 사상자가 생겨나는 군사적 부담을 피하고 △20억 달러의 개발비용이 들어간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 따를 정치적 부담을 피하고 △소련의 대일전 개입 이전에 원폭을 서둘러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소련이 극동지역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막으려는 국제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특히 전쟁 뒤 극동지역 패권에 관련된 세 번째 사항이 미국에겐 중요했다. 벨기에 태생의 역사학자 자크 파월은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이란 부제목을 단 그의 책에서 "이것(패권)은 워싱턴이 겉으로 말할 수 없는, 일본과 싸운 진짜 목적이다"라고 강조했다(자크 파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오월의봄, 2017, 278쪽). 미국이 바라던 대로, 전후 일본은 미국의 전후 아시아 패권 확장의 전초기지(基地)가 됐다.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이른바 '기지국가' 일본의 탄생이다. 6.25 한국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의 병참기지로 활용된 것은 잘 알려진 사례의 하나일 뿐이다.

독일처럼 소련과 함께 분할 점령하지 않고 일본을 온전히 미국 혼자서 점령 통치하고 전쟁 뒤 아시아 패권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전략은 (기력이 다한 일본이 곧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트루먼으로 하여금 원폭 투하를 서두르도록 했고, 결과적으로 무고한 21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글 앞부분에서 살펴봤듯이, 미국인의 생명을 구했다느니, 일본인의 생명을 구했다느니 하며 '원폭 신화'로 핵무기의 민간인 대량학살을 정당화했다.

트루먼의 원폭 투하 결정은 미국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방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지구촌 반핵 평화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필요에 따라 비무장 일본 민간인들이 원폭의 제물이 됐다. 지난 글(연재 42)에서 살펴봤듯이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조선인 4만도 함께 희생됐다. 미·일 사이의 전쟁에 휘말린 그들의 허망한 죽음을 놓고 히로히토와 트루먼에게 책임을 묻는다 해도, 그들의 죽음이 삶으로 되돌려지진 않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글이 길어져 '원자폭탄 하(下)'를 둘로 나누었다. 다음 주엔 히로히토가 항복 결정을 내리는 데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충격 요인(원폭, 소련 참전) 가운데 소련의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대목을 살펴보려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꼭 떨어뜨리지 않아도 될 (또는, 백보 양보해서, 히로시마로 그쳐도 될) 원폭 투하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희생이 더욱 허망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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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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