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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 세상'에 물들지 못해 다시 시작된 생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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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 세상'에 물들지 못해 다시 시작된 생활고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후배 박세일 曰 "왜 노동위에 연연하십니까?"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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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방노동위원회의 위원장직은 3년 계약직이지만 별정직 2급 공무원으로 공무원 조직의 이사관급이었다. 노동위원회에는 나 말고도 정식 공무원 출신의 2급직 상무위원 한 명과 사무국장인 4급 행정직 한 명, 6급직 7명, 6급 별정직 1명 그리고 업무지원으로 9급직 운전사와 사무원이 있었다. 모두 장관이 발령하지만, 나의 업무는 장관의 통제와 지휘를 받지 않는, 법원과 같은 독립된 기관의 기관장 일이었다.

노동위원회가 하는 일은 노동자의 헌법상 권리인 단결권과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법으로 지키고 신장시키는 수문장 역할이었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에서의 일이었다. 그리고 노동위원회 업무상 관련 법률은 노동조합법과 근로기준법 그리고 노동위원회법이 중심이었다. 물론 그 위에 헌법상의 노동3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유신독재 긴급조치와 전두환 군사정부로 인하여 노동자의 헌법상 노동권 행사는 권력자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므로 노동위원회에 대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믿음도 회의적이었다. 이걸 타개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김영삼 대통령과 남재희 장관이 내게 준 임무였다. 나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와 나중에 정치세력에 밀려 경기지방노동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나름대로 맡은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노동위원회의 판단과 판정은 위원장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대표하여 참가한 노동자 위원과 전국경영자총협회를 대표하여 참가한 사용자 위원과 노동부와 학계 또는 법조계 등을 대표한 공익위원으로 구성된 3자회의의 합의를 통해 판정되고 조정된다. 제도권 기구인 이 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서의 내 역할은 막중한 것이었다. 더욱이 내가 존경하여 가까이 모시던 김영삼 대통령의 재임 시절이었다.

정직, 공정, 정의, 상식에 기초하여 판정 판단하되 반드시 국민정서에 어긋나는 지점이 있어서는 안 되도록, 또한 노동자 위원이나 사용자 위원에게 신뢰감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이것이 남재희 장관이나 김영삼 대통령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서울지방노동위원회와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 재직하던 3년 동안 아마도 심판사건, 조정사건 등을 합해 3000~4000 건의 노동사건을 처리, 판정 조정한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한 가지 지금도 후회로 남은 것은 있다. 좀 더 서러움에 겨워하는 노동자의 마음에 따듯이 다가서지 못한 점이다. 자로 잰 듯 공정하게 판정하려고 들어 피해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따뜻함을 드리지 못했던 것이 여한으로 남아 있다.

나의 노력에도 한계는 있었다. 나는 3년간의 임기 계약직이었다. 3년을 넘어서려면 실력과 공정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그에 걸맞은 정치력도 있어야 했다. 임명권자에게 실력과 더불어 매력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남재희 장관이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나에게는 의탁하고 의지할 만한 뒷벽이 더는 없었다.

새로운 장관은 가난한 노동자의 생활을 모르는 경제 분야 고위 공무원이 임명됐다. 경제정책부문에서만 뼈가 굵은 사람이었기에 노동자의 고뇌와 슬픔을 가까이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정이 가지 않는 노동자와 노동운동의 정서에 깊이 뿌리를 둔, 어찌 보면 정치판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아둔한 사람이었다.

임기 3년이 끝나자 욕심을 버리고 그대로 물러서야 했다. 가정생활이 있었기에 고민은 컸다. 노동부 출신이자 전 서울노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전영배 선배의 가르침이 맞았다. 1급 이상의 고위공직자로 올라선 뒤로는 실력이 아니라, 손을 싹싹 빌 줄 알든, 평소에 돈이나 선물을 바치든, 빛깔 나는 정책적 제안을 하든 정치력의 세계라는 말이 맞는 듯이 여겨졌다.

그러나 나는 그런 쪽으로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아내 말을 빌린다면 남에게 손 벌리고 굽실거리며 아부하는 짓을 못 하는, 또한 아내 말대로라면 남편인 나는 이마에 '착하다'라는 표식을 달고 사는 평범하고 아둔한 사람일 뿐이었다.

청와대 박세일을 만난 뒤 더욱 굳혀진 퇴직 결심

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서의 3년 임기가 끝나갈 무렵, 청와대로 찾아갔다. 한 가정의 생활을 책임지는 가장이었으니 말이다. 청와대에는 고등학교 후배요, 서울 법대출신이자 노동법과 노동정책의 전문가인 박세일 후배가 노동과 환경관계의 수석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들어오라기에 평생 처음으로 청와대 곁문을 거쳐 비서관실로 향했다. 나를 보며 박세일 후배가 말했다. "신 선배, 뭐가 좋다고 노동위원회 자리에 연연하십니까" 하는 것이었다. 비웃음과 깨우침의 소리였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현장 노동자와 민중운동 삶에서 떠난 내가 운 좋게도 국회와 정당, 국가 노동정책 전문가로서의 삶에 선택되었을 뿐, 실은 누가 앉았더라도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아니겠는가?

시간이 갈수록 나는 거대한 정치조직 메커니즘 속 매너리즘에 물들여져 갔다, 보면 볼수록 나는 큰 역사 큰 줄기의 한 모퉁이에 멈추어 있는, 아주 작고 초라한 하나의 점(點)일 뿐이지 아니한가. 어찌 보면 남의 삶!

그리하여 쉰다섯이 갓 지난 나이로 천상천하 빈손의 자유인이 되어야 했다. 자유인이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안에서의 자유인이었으니 알몸의 무직자가 된 것이다. 한 푼 돈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어려운 자본주의 세상. 돈의 속박에서 해방된 게 아니냐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려 했다.

물러나면 생활의 원천이 될 연금도 나에게는 없었다. 공무직을 다 합쳐도 20년 기간을 채우기에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3년 임기의 별정직 공무원 신분이었고, 몇 푼 퇴직금은 한순간 위로금이었을 뿐, 나는 고아 같은 생활 길에 들어서 있었다.

▲ 김영삼 정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한나라당 국회의원 등을 지냈고 세계화론, 선진화론의 기틀을 잡아 보수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로 꼽히는 고(故)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연합뉴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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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호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거쳐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안성에 정착해 도예가로 제2의 인생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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