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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소리에 매료된 스무살 청년…30년 외길 '악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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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소리에 매료된 스무살 청년…30년 외길 '악공'이 되었다

전북 무주에 작업장 둥지 튼 '동곡 허희철'악기장 이수자

붉은 빛 도는 스무살 청년은 한 가야금 연주자의 아름다운 연주 소리에 넋을 잃고 말았다.

만약 천상(天上)의 소리가 있다면 이런 소리였으리라. 청년은 이내 가야금의 선율에 완전히 매료되어 연주가를 꿈꾸게 된다.

그러나 그가 훌륭한 '귀 연주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하루 아침에 현을 주무르고 달래는 연주자가 될 수는 없는 법.

청년은 그렇게 가야금과 거문고, 아쟁과 해금 등을 다루고 만드는 악공(樂工)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1990년 무렵 당시 광주광역시에 있던 남도국악사에서의 일화다.

당시 청년의 마음을 홀린 연주자는 시간이 흘러 현재 국내 가야금 연주의 명인 반열에 오른 최진 한국교원대 교수가 됐고 홍안의 청년은 국악기 제작의 장인이 된 동곡 허희철(53)악기장이다.

▲전북 무주군 무주읍에서 악기 공방을 운영하며 국악기 보급에 나서고 있는 동곡 허희철 악기장이 25일 오전 자신의 작업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전남 구례 출신의 허희철 악기장은 현재 전북 무주군 무주읍 남대천 아래에 조성된 '무주공예공방' 입주 예술가로 5년째 전북인으로 살고 있다.

앞서 그의 인생길을 바꿔 놓았던 남도국악사는 그의 매형이자 스승인 조준석(충북 무형문화재 제19호 악기장) 선생의 사업장이었다.

허희철은 그 이듬해인 1991년 1월부터 남도국악사에 출근해 안족(雁足)을 깎는 일부터 배워나갔다.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상처도 나고 굳은 살이 생겼지만 하루하루가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에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단다.

20대 초반의 청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군입대 시절에도 휴가를 나오면 국악사로 달려가 대패를 들고 줄을 꼬았다.

처음에는 어렵게만 보이던 국악기 제작과정이 시간이 지나 손에 익숙해지자 소리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고서와 이론서를 구해 읽어보아도 좀처럼 이해를 할 수 없게된 그는 대학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30대 늦깎이로 입학한 전남도립대학교 한국음악과에서 그는 국악기의 이론적인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실무와 이론이 갖춰지자 그에게 색다른 제안이 이어졌다. 옛 무덤이나 땅에서 출토된 고(古)악기 복원 제작 의뢰가 이어진 것이다.

▲허희철 악기장이 가야금을 만들기 위해 오동나무 대패질을 하고 있다 .ⓒ

지금까지 그가 복원에 참여했던 고악기들은 대전 월평동 '양이두'와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의 '요고'를 비롯해 마한시대 신창동 출토 현악기, 고산 윤선도의 유물악기인 '고산유금' 백제 금동대향로에 표현된 다섯개의 악기 가운데 '완함' '백제금' '백제고' 등이다.

그는 2001년 광주를 떠나 난계 박연의 태생지인 충북 영동군으로 근거지를 옮긴 스승 조준석을 따라 국악기 제작 전시 체험에 혼을 쏟게 된다.

그러다 지난 2019년 국악기 제작에 입문한 지 30년만에 전북 무주에 동국국악기를 설립하면서 스승을 떠나 독립하게 된다.

"국악의 불모지인 무주에서 우리의 국악과 국악기를 알리고 싶다는 도전의식이 있었어요. 국악기 제작을 위한 조용한 작업장 환경과 일교차이가 큰 지역의 풍부한 오동나무가 저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와 망설임 없이 무주를 선택했죠."

그러나 무주에 안착하기 까지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국악수업이 힘들어지고 공연도 취소되면서 국악기 수요도 덩달아 곤두박질쳤다.

악기제작 체험 관광객들도 크게 줄었다. 전국의 30여개 현악기 제작업체 가운데 두어 곳이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그나마 그의 야무진 솜씨를 눈여겨 봐온 서울과 수도권의 연주자들과 전공자들이 제작을 의뢰하고 있어 일감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전북 진안 마이산명인명품관에 전시되어 있는 동곡 허희철 악기장의 악기들. ⓒ

현재 그가 만든 악기는 전북 진안의 마이산명인명품관에 다양한 현악기가 전시돼 있고 전남 담양에도 그의 장인혼이 담긴 대금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국악기가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매우 중요해요. 중국은 1945년 무렵부터 전통악기에 대한 개량화가 국가 주도로 진행돼 현악기의 줄을 명주실에서 철사로 개량한 작업이 이뤄졌고 북한도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에 현대식으로 개량한 '옥류금'을 완성했어요. 우리나라도 우리에게 걸맞은 개량화가 필요한데 개인이 사재를 출연해 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큽니다.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국악 발전을 위해서는 악기 개량 뿐만 아니라 교육과정의 개편도 필요하다고 말을 했다.

"현재 초등5학년 과정에 있는 단소 배우기도 플라스틱이 아니라 대나무로 바꿔 제대로 된 음색을 경험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이론 과정에 그쳐 있는 중등과정의 음악교과도 실기를 겸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또 전북도에서 지원하고 있는 어린이 국악관현악단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정책이라면서 전국 자치단체로 확산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듯이 국악을 자주 접한 관객들이 폭넓게 있어야 더 많은 국악인을 양성하는 토대가 된다는 것이 30년 넘게 국악기 제작의 외길을 걸어온 그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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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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