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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적이고 잔인한' 르메이, 도쿄를 불지옥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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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적이고 잔인한' 르메이, 도쿄를 불지옥 만들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40]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인가 ⑪ 도쿄 대공습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폭탄이었다. 그것은 지붕을 타고 퍼져 나가고 그것에 닿은 것은 모조리 불태우는 '불타는 액체'를 퍼뜨렸다. 모든 것에 끈적끈적 달라붙은 불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들은 곧바로 불이 붙었다. 비명을 지르면서 가족들은 아기들을 등에 업고 거리로 나섰으나, 사방이 불길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불기둥 속에서 불이 붙어, 살아있는 횃불이 된 뒤 사라져갔다](스벤 린드크비스트, <폭격의 역사>, 한겨레신문사, 2003, 232쪽).

위에 옮긴 참혹한 내용의 글은 스웨덴 출신의 비교문학자 스벤 린드크비스트가 쓴 책(원제목은 A History of Bombing, 2000)에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다룬 부분이다. 글 속의 '그것'은 미군이 새로 개발한 네이팜탄(napalm bomb)을 가리킨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여러 새로운 살상무기들이 나타났다. 정점을 찍은 것은 원자폭탄이었지만, 네이팜탄도 빼놓을 수 없다. 고성능 소이탄인 네이팜탄은 워낙 살상력이 뛰어나 '원자폭탄을 뺀 인류 최악의 무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1942년 미 하버드대 화학교수인 루이스 피저가 이끄는 연구팀이 처음 시제품을 만들었고, 1943년 여름 유타 사막에다 일본식 주택을 본뜬 마을을 네이팜탄으로 불태우는 실험도 마쳤다. 이런 과정은 이 끔찍한 살상무기가 처음부터 일본을 겨냥해 개발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1945년 3월10일 하룻밤에 일어났던 도쿄 대공습은 10만 명 가까운 비무장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당시 일본 정부는 사망자가 8만 4,000명으로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10만 희생자 속엔 도쿄 변두리 빈민지대에 몰려 살던 재일 조선인 1만 명쯤이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공습을 받은 곳은 도쿄뿐이 아니었다. 나고야, 오사카, 고베 등 일본 대도시들은 3월에서 6월까지 거듭된 공습으로 그야말로 불지옥을 겪었다.

▲ 1945년 3월10일 도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미 육군 제21폭격단 커티스 르메이 사령관과 그의 지휘 아래 일본 67개 도시들을 공습했던 B-29 전폭기들.

'정밀 폭격' 대신한 무차별 공습

지난 글에서, 도조 히데키가 일본 전시내각의 총리에서 물러난 것은 1944년 7월 사이판 섬을 미군에게 빼앗긴 바로 뒤였다는 것을 살펴봤다(본 연재 37). 마리아나 제도의 주요 섬인 괌(일본 도쿄로부터의 거리 2524km), 티니안(2373km), 그리고 사이판(2356km)을 잇달아 미군에 빼앗김으로써 일본은 큰 위기에 부딪쳤다. 항속거리 5300km인 미 B-29 폭격기는 마리아나 제도에서 도쿄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폭격하고 돌아갈 수 있게 됐다.

그전까지 일본 본토를 겨냥한 B-29 폭격기 편대는 중국에서 쓰촨성 청두에서 떴다. 이를테면 1944년 6월16일 청두에서 뜬 B-29 폭격기 편대는 일본 남쪽 후쿠오카에 가까운 기타규슈(北九州)의 야하타 제철소를 맹폭했다(그 무렵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 쪽으로 오가는 B-29 폭격기들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제주도 모슬포에는 일본군이 미군 폭격기의 본토 공습을 감시하려고 레이더 기지를 세워놓고 있었지만 큰 도움이 못됐다).

그 무렵만 해도 미군은 민간인 거주지역 폭격을 피했다. 군부대와 군수공장 등 군사 관련 시설물들을 겨냥하는 이른바 '정밀 폭격'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1944년 7월 미군이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은 태평양의 마리아나제도(사이판, 티니안, 괌)의 활주로를 떠나 일본 본토로 향한 B-29기들의 처음 목표들도 민간인 주거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高)고도에서 군사 목표물을 겨냥해 떨어뜨리는 폭탄의 명중률은 10% 밑으로 낮았다. 워싱턴의 전쟁 지휘부에선 '바라는 만큼의 전과를 올리지 못한다'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도쿄에서 125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오지마(硫黃島) 상륙작전을 앞둔 1945년 3월부터 폭격 방식이 달라졌다. 군사 시설물만을 공격하는 '정밀 폭격'에서 주택가와 군사 시설물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으로 바뀌었다. '1억 옥쇄(玉碎)'를 부르짖는 일본 군부 강경파의 결전 의지를 꺾고 항복을 앞당긴다는 명분 아래서였다.

공습 책임자는 '호전적이고 잔인한' 르메이

이런 변화를 앞장 서 이끌었던 이는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에 주둔했던 미 육군 제21폭격단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1906-1990) 소장이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을 때 소령이었던 그는 유럽 전선에서 B-17 폭격기를 몰고 독일 함부르크 등을 폭격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1944년 3월 38세의 나이에 최연소 소장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실적을 기대하는 워싱턴의 고위 장성들에겐 그가 좋은 부하였지만, 정작 그 자신의 부하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는 폭격기 편대의 맨 앞에서 비행하면서, '출격한 폭격기가 공격 목표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군사재판에 넘기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그렇기에 부하들로부터는 '비정상적으로 호전적이며, 잔인한 성격을 지녔다'는 평을 받았다.

직속상관인 미 육군 제20항공군 사령관 헨리 아놀드 대장은 그런 르메이를 높이 샀고, 1945년 1월20일 제21폭격단 사령관 자리에 앉혔다. 르메이의 전임자였던 헤이우드 헨설 사령관은 민간인 희생자를 내기 마련인 무차별 폭격을 피하고 군사시설에 대한 '정밀폭격'을 고집했었다. 그런 까닭에 헨설은 아놀드 장군의 눈 밖에 벗어났다.

일본 본토를 겨냥한 폭격을 총괄하는 현지 사령관으로 르메이가 온지 두 달도 안 돼 도쿄 시민들은 불지옥을 겪어야 했다. 쿠리하라 토시오(마이니치신문 기자)가 도쿄 공습에 대해 쓴 신간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르메이는 미군 정찰기가 촬영한 일본 본토의 사진을 보고, 유럽전선에서 (연합군 폭격기들이) 피격 당했던 것과 같은 저(低)고도용 대공화기들이 (일본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저공으로 비행하면 연료 소모가 적고, 그만큼 폭탄을 더 많이 실을 수 있고, 특히 야간 폭격이라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그럴듯한 작전을 머리에 떠올렸다] (栗原俊雄, <東京大空襲の戦後史> 岩波新書, 2022, 21-22쪽).

르메이는 네이팜탄 공습으로 비무장 민간인들을 불태워 죽이는 것을 꺼리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훈시하곤 했다. "무고한 민간인(innocent civilians)은 없다." 그는 덧붙여, "이른바 죄 없는 방관자(so-called innocent bystanders)도 없다"고도 했다. 그의 시각에서는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인을 죽인 적성 국가의 시민들은 모조리 제거 대상으로 비쳐졌다.

"불타는 도시, 지옥의 입구 보는 듯했다"

1945년 3월9일 밤 사이판, 티니안, 괌 섬에서 300대 가량의 B-29기가 출격해 도쿄를 강타했다. 실제 폭격은 3월10일 새벽에 이뤄졌기에 일본에서는 이를 '3월10일의 도쿄 대공습'이라 부른다. 그때 떨어졌던 폭탄의 양은 모두 19만 발. 도쿄 시내의 41km² 면적이 피해를 입었다. 연기는 하늘로 7.6km 높이까지 올라갔고, 240km 밖에서도 도쿄의 화염이 보였다. 대부분 목조로 이뤄졌던 도쿄의 주거지역은 그야말로 불지옥으로 바뀌었다. 27만 채가 불타버렸다.

네이팜 탄이 터지면, 끈적끈적한 성분의 젤 덩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어디든 닿으면 딱 달라붙은 채로 불이 붙었다. 엄마들은 아이를 업고 도망치다가 아이의 머리가 불타는 것을 보고 소스라쳤다. 화염은 산소를 빨아들였고, 사람들은 호흡 곤란으로 죽었다. 불에 타죽지 않으려고 시내 가운데를 흐르는 스미다 강(또는, 아라카와 강)의 운하로 뛰어든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과 부딪쳐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미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의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쓴 책(원제목은 The Bomber Mafia, 2021)에서 도쿄 공습에 참전했던 항공병들의 증언을 읽어보면, 그날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헤아릴 수 있다.

[그 작전에 참여했던 승무원들은 큰 충격에 빠진 채 돌아왔다. 항공병 데이비드 브레이든은 이렇게 회상했다. "솔직히, 불타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 지옥 입구를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불이었죠." 항공병 콘래드 크레인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상 1.5km 정도로 비행고도가 낮았습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비행기 안에 스며들 만큼 낮았죠. 실제로 마리아나 제도에 돌아와서 훈증 소독을 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타는 냄새가 항공기 안에 남아 있었거든요"] (말콤 글래드웰, <어떤 선택의 재검토> 김영사, 2022, 211쪽).

▲ 미 군수노동자들이 네이팜탄 38개를 묶어 집속탄으로 마무리하는 모습. 네이팜탄은 1945년 일본 주요 도시들의 주거지역들을 초토화시켰다.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심리

끈적끈적한 점성을 지닌 네이팜탄은 그전까지의 어느 소이탄보다 파괴력과 살상력이 훨씬 컸다. 미군은 네이팜탄 38개를 띠로 묶은 집속탄(cluster bomb) 형태로 만들어, M-69란 이름을 붙였다(길이 50cm, 무게 2.7kg). 네이팜탄이란 신무기 개발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한창 전쟁 중이던 1945년 미 육군은 아래와 같은 설명을 담은 홍보영화까지 만들었다. 이 동영상은 유튜브 덕분에 지금도 볼 수 있다.

[M-69 폭탄의 주요 구성요소는 특수처리한 젤 형의 가솔린을 담은 '치즈 주머니'다. 불이 붙으면 여기에 채워진 젤이 불타는 끈적끈적한 덩어리가 되어 직경 1m 이상으로 퍼진다. 이 물질은 섭씨 540도로 8~10분 동안 타오른다. M-69는 38개의 폭탄으로 이뤄져 있다. M-69 집속탄을 비행기에서 떨어뜨리면 공중에서 그 안의 폭탄들이 나뉘어져 땅위의 표적에 떨어진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uPteVZyF4U0)

도쿄 공습이 이뤄지던 1945년엔 독일 도시들도 연합군의 엄청난 공습을 받았다. 독일의 도시들은 벽돌이나 대리석, 그리고 회반죽으로 건물들이 단단하게 세워졌다. 그와는 달리 일본 도시의 건축물들, 특히 민간인 주거지역의 건물들은 불에 약한 소재들로 이뤄졌다. 집의 천장은 생선기름을 적신 무거운 종이류로 만들어졌고, 대들보나 기둥은 나무였다. 방바닥은 짚으로 만든 돗자리(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일본 가옥은 어딘가 불이 붙이면 불쏘시개나 다름없이 타오르는 구조였다.

이런 집들을 네이팜 탄으로 공격한다면 결과는 끔찍할 게 뻔했다. 그런데도 공습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데엔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 심리와 일본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깔려 있었다. 작가 말콤 글래드웰의 책에서 이와 관련한 글을 보자.

[적국 도시의 80%를 불태워 날려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극단적이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연합군을 이끌고 남부를 초토화시킨 윌리엄 셔먼 장군은 애틀랜타를 불태운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애틀랜타 전체는 아니었다. 상업지구와 공업지구에 국한되었다. 집에 있는 민간인은 (공격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주만공습 이후 이런 극단적인 생각이 그리 극단적이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말콤 글래드웰, 182쪽).

진주만 공습 뒤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을 '쥐새끼'등으로 낮춰 불렀다. 워싱턴의 전쟁 지도부는 그런 인종적 편견을 선전 포스터로 부추기며 전쟁기금 모금에 활용했다. 일본인에게 지녔던 증오심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자료가 있다. 일본 작가 사오토메 카츠모토는 일찍이 민간단체인 '도쿄 공습을 기록하는 모임'에서 도쿄 공습의 실상과 문제점을 파헤쳤다. 그러면서 1971년에 도쿄 공습에 관한 선구적인 책을 남겼다. 사오토메는 그 책에서 B-29 폭격기가 도쿄 상공을 낮게 선회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온 민간인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부었다는 증언을 전하고 있다. 이 대목을 읽다가 문득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기총소사가 떠올랐다(早乙女勝元, <東京大空襲> 岩波新書, 1971, 68쪽 참조).

도시빈민 지역을 집중 공습한 이유

특히 피해가 컸던 지역이 도쿄 스미다 강변의 아사쿠사, 혼조, 후카가와 일대였다. 이 지역들은 노동자나 소상공인들이 모여 살던 서민동네였고, 집들은 불에 타기 쉬운 목조 건물이 많았다. 네이팜탄 공격을 받자 대화재가 일어났고 주민들은 그야말로 불지옥을 겪어야 했다. 도쿄 공습을 다룬 존 다우어(MIT대 명예교수, 역사학)의 역작(원제목은 Embracing Defeat, 1999)을 보면, 미군 폭격이 선택적으로 이뤄졌음을 짐작케 한다.

[빈민 거주지나 작은 상점들, 그리고 수도의 공장지대는 상당 부분 불타버렸지만, 부유촌으로 이뤄진 멋진 주택가는 그대로 남아 점령군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도쿄의 금융가는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고, 곧 '리틀 아메리카'이자 맥아더 미군정 사령부(GHQ)의 본거지가 되었다. 고의 여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수도 도쿄에 관한 한 미국의 공습은 현존하는 부자와 빈자의 질서를 재확인한 셈이었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민음사, 2009, 46-47쪽).

그렇다면 미군은 왜 도쿄의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을 집중 공습했을까 하는 물음이 따른다. 사카사이 아키토(도쿄외국어대, 일본근대문학)는 데이빗 페드먼(캘리포니아대, 역사학)과 캐리 카라카스(뉴욕주립대, 문화지리학)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도시지역이 어떻게 파괴됐는가를 연구한 2012년도 논문을 참고하면서 이렇게 썼다.

[미 육군항공군(USAFF)의 폭격 전략에 관한 최근 연구에서, 작전 입안자들이 노동자 집단 거주 지역을 공격하여 전시 노동력을 감소시킴으로써 총력전 체제를 약화시킬 전략을 세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 사회 내부의 빈부격차가 그대로 공습으로 인한 피해 확률로 이어졌다. 달리 말하자면, 농촌으로 소개할 여유와 사회적 인맥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은 도시에 머무를 수밖에 없던 사람들보다 전재(戰災)를 입을 가능성이 훨씬 낮았다](사카사이 아키토, <잿더미, 전후공간론> 이숲, 2020, 13쪽).

위 글을 풀어쓴다면, 미군은 일본의 총력전 체제를 약화시켜 되도록 빨리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면 군수산업 노동력에 손상을 입혀야 했기에, 따라서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공습 목표로 꼽혔다는 것이다. 르메이 장군이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고 우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쿄 대공습>의 작가 사오토메 카츠모토는 미군의 그런 공습 논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早乙女勝元, 179-180쪽 참조). 일본 군수산업의 하청을 맡은 가내 수공업에 타격을 준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을 폭격했다면, 그 지역에서 부모와 함께 살던 어린이들은 무슨 죽을죄가 있었던 것일까.

▲ 1945년 3월10일 밤 B-29 폭격기의 공습으로 27만 채의 주택이 잿더미가 된 도쿄 전경. 6시간 동안의 공습은 조선인 1만 명을 포함해 10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

미군 병사들, 폐허의 도시 보고 눈 감아

너무나 끔찍한 공습 피해 상황을 놓고 미국 안에서조차 논란이 됐지만, 르메이 사령관은 그 뒤로도 B-29 폭격기 편대를 일본의 주요도시들로 보냈다. △3월엔 나고야, 오사카, 고베, △4월엔 도쿄 북부, 우라타, 가와사키, △5월엔 나고야, 도쿄(야마노테 지역), 요코하마, △6월엔 오사카, 고베, 아마가사키 등이 공습을 받았다. 오사카는 6월에만 세 차례(1일, 7일, 15일) 폭격으로 그야말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B-29기의 폭격을 받은 일본 주요 도시는 67개에 이르렀다(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는 미군 공습을 덜 받았기에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측정할 수 있는 불운한 도시후보지로 뽑혔다). 전쟁 말기에 일본 상공의 제공권은 미군이 완전히 장악한 터였기에, B-29기가 떴다 하면 사람들은 그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때의 피해상황을 존 다우어의 책에서 옮겨본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를 비롯한) 67개의 주요 도시는 심한 공습에 시달렸다. 공습 결과 도시부의 40%가 파괴되고 도시 인구의 30% 정도가 집을 잃었다. 가장 큰 도시인 도쿄에서는 거주지의 65%가 파괴되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오사카와 나고야에서는 각각 57%와 89%가 파괴되었다. 일본에 가장 먼저 파견된 미군부대로 요코하마에 상륙해 도쿄까지 진격한 부대원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도시의 폐허에 할 말을 잃거나 두 눈을 감아버렸다](존 다우어, 46쪽).

르메이, "한반도에서 민간인 백만 명 죽였다"

커티스 르메이 사령관은 자신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미국이 일본에 졌다면 그 자신 전쟁범죄자로 처형당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을까. 그가 내린 명령 때문에 수십 만 명의 생목숨이 앗겨진 사실을 두고 잠을 편히 잘 수 있었을까. 그런 번뇌의 밤을 그가 보낸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일본에 대한 지속적인 무차별 공습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닌 돌격형 군인이었다. 도쿄 공습 무렵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공습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진행된다면, 우리는 이 전쟁을 단축시킬 수 있을 거야"(말콤 글래드웰, 222쪽).

도쿄 공습의 책임자로 비난 받았지만, 르메이는 승진을 거듭했다. 최종계급이 대장으로, 공군참모총장까지 지냈다. 6.25 한국전쟁 때 르메이의 직책은 B-29와 원자폭탄을 주요 무기로 다루는 전략폭격집단(SAC) 총사령관이었다. 그의 지휘를 받는 미 극동공군의 B-29기들은 한반도로 출격해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밀리던 1951년 1월 평양은 도시의 35%가 불탔다. 한일 사이의 역사화해에 학문적 관심을 쏟았던 일본 사학자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1926-2017)가 쓴 책(원제목은 空爆の歴史: 終わらない大量虐殺, 2008)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는 한반도의 북에서도 남에서도 모든 도시를 불태웠다. 우리는 백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이상을 집밖으로 내몰았다'는 르메이의 말이 (허풍이 아니고) 사실이라면, 미 공군의 작전은 남북을 불문하고 많은 주민을 희생시킨 셈이 된다](아라이 신이치, <폭격의 역사: 끝나지 않는 대량학살>, 어문학사, 2015, 221쪽)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만들겠다"

르메이의 돌격성은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고나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1962년 쿠바에 소련제 미사일기지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졌다. 르메이는 존 케네디 대통령에게 '쿠바를 공습하자'고 제안했지만, 케네디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을 걱정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트남전쟁 초기에 북폭을 주장한 것도 르메이였다. "우리는 그들을 폭격해 북베트남을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는 그의 호언장담은 지금도 많은 베트남사람들이 (르메이라는 이름을 몰라도) 기억하고 있다. 그가 공군에서 퇴임하던 시점인 1965년 2월7일, 린든 존슨 대통령의 승인 아래 본격적으로 B-52기 폭격기 편대의 북베트남 공습(이른바 '북폭')이 이뤄졌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르메이는 퇴임을 바로 앞둔 1964년 12월 일본 정부로부터 최고훈장(훈일등 욱일대훈장)을 받았다. '일본의 항공자위대 발전에 공이 많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도쿄 대공습의 책임자가 훈장을 받자, 말들이 많았다. '학살자에게 훈장이라니...'하며 유족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때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는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하며 유족들을 달래야 했다.

▲ 도쿄대공습 8일 뒤인 1945년 3월18일 피해지역을 돌아보고 있는 히로히토 일왕. Ⓒ니시다 세추오

"6시간 동안 인류사의 대학살 벌어졌다"

전쟁의 흐름이 이미 연합국의 승리로 기울어 가던 1944년 11월 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에게 독일과 일본을 겨냥해온 공습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재난전문가, 사회학자 등 12명의 민간인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1천명 넘는 보조 인력이 합쳐 미국전략폭격조사단(USSBS)이 출범했다. USSBS는 군사 전략에서 공군력의 중요성과 잠재력을 평가하고, 아울러 공습의 실상과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영국 런던에 사무실을 둔 USSBS가 실무 작업에 들어가 있던 시점에서 독일 드레스덴 공습(1945년 2월), 도쿄 공습(1945년 3월)이 벌어졌고, 폭격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이 뒤따랐다. 1945년 9월 30일자로 작성된 보고서 이름은 '미국전략폭격조사(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유럽 관련 208권, 태평양지역 관련 108권으로 분량만 해도 수천 쪽에 이른다. 이에 따르면, 연합군 폭격기는 일본 목표물에 81만 7,200톤의 폭탄을, 유럽에서는 2,77만 톤, 독일에서는 1,41만 5,745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보고서는 군수공장이나 수송수단에 대한 폭격은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도시 주거지역에 대한 공습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독일 항복 뒤 일본에 초점을 맞춘 USSBS는 1945년 6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에 최대의 타격을 주는 것은 수송시설에 대한 폭격이었으며 △둘째, 전쟁의지를 꺾기 위한 폭격은 일본인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두 번째 결론은 르메이 장군이 지휘했던 일본 주요도시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보고서는 일본 도시의 민간지역에 대한 공습은 '미국 민주주의'의 잣대에 비춰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에 르메이가 크게 반발했음을 물론이다. 그는 워싱턴에다 자신의 무차별 공습 작전이 큰 효과를 보고 있다며 성과를 부풀려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다른 25개 중소도시에 대한 공습계획을 내미는 집요함을 보였다. 1947년 6월에 공개된 USSBS의 또 다른 보고서는 도쿄 공습을 두고 이런 우울한 결론을 내렸다. '도쿄 공습으로 비롯된 대화재로 말미암아 6시간 동안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보고서 제목은 A Report on Physical Damage in Japan. 원문은 https://dl.ndl.go.jp/pid/8822320).

ICC, "민간 주거지역 공습은 전쟁범죄"

이제 글을 매듭지으려 한다. 태평양의 제해권을 쥔 미군의 칼끝이 일본 본토를 겨누면서 이뤄졌던 B-29 폭격기의 공습은 숱한 일본 비전투원들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갔다. 미군의 무차별 공습이 없었다면, 아니 좀 더 세심하게 작전을 펴 군사시설을 겨냥한 '정밀 폭격'에 집중했더라면, 민간인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민간인의 희생을 배려하지 않은 무차별 공습은 전쟁범죄라는 지적을 받아 마땅하다.

2002년에 문을 연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약칭 ICC)도 민간 주거지역을 겨냥한 공습은 전쟁범죄임을 뚜렷이 밝혔다. ICC의 법적 근거인 '로마 규정'(Rome Statute, 1998)의 제8조 2항은 '민간인 주민 자체 또는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아니하는 민간인 개인에 대한 고의적 공격'이나 '군사적 필요에 의하여 정당화되지 아니하며 무분별하게 수행된 재산의 광범위한 파괴'를 전쟁범죄로 못 박고 있다.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피고 쪽 변호인들은 '이 재판은 전승국인 미국이 저질렀던 전쟁범죄를 다루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도쿄재판은 승자의 정치적 재판'이라 목청을 높였다. 침략범죄를 저지른 일본은 밉지만, 변호인들의 항변이 터무니없는 트집이라고 내치기도 어렵다. 민간인 주거지역을 겨냥한 마구잡이 공습은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전쟁범죄이기 때문이다. 다음 주엔 원자폭탄 투하를 둘러싼 문제점을 살펴볼 예정이다. (계속)

▲ 도쿄 대공습의 희생자들 가운데는 어린이들도 많이 죽었다.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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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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