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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가 이겼다면 피고석엔 다른 자들이 섰을 거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34]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인가 ⑤ 도쿄 재판 (上)

지난 해 7월 선거유세를 하다가 사제 총탄에 맞아 죽은 아베 신조(1954-2022) 전 총리는 일본의 언론 매체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극우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아베는 도쿄 전범재판(공식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승자의 재판'이라며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지난 대전(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총괄은 일본인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도쿄 재판이라는 이른바 연합국 측이 승자의 판단에 따라 단죄한 것이라 생각한다"(2013년 3월12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의 발언). 그는 도쿄 재판에서의 전범들은 '일본법상으로는 전범이 아니다'라는 궤변도 서슴지 않았다.

아베, "침략의 정의가 모호하다"

그로부터 40일 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도 달리 봐야 한다며 주장했다. "이른바 '침략'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의가 제대로 내려져 있지 않으며,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다"(2013년 4월23일 참의원 예산위에서의 발언).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침략행위가 있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침략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따위의 괴변을 듣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은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아베의 주장은 과거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보자는 자성(自省)사관을 가리켜 자학(自虐)사관이라 비난하는 일본 보수 사학계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지난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나치 히틀러 세력은 독일 국민의 생존권 또는 '생활을 위한 공간'(Lebenslaum)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외 팽창(다시 말해서 침략)을 합리화했었다. 마찬가지로, 지난날 일본 군국주의에 강한 향수를 지닌 극우파들은 일본인의 생존(그들의 용어로는 자위)을 위한 전쟁은 어쩔 수 없었다고 옹호한다.

흔히 '자유주의 사관'이란 이름 아래 펼쳐지는 이런 극우적 궤변은 도쿄 전범재판을 통해 일본이 저질렀던 전쟁범죄를 처벌했다는 이른바 '도쿄사관'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오히려 '승자의 재판'이라 깎아내린다. 걱정스런 점은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 일본 정치권은 물론 일본 학계(사학, 정치학 등)에서 극우적 목소리가 갈수록 커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일본 연구자들의 연구 흐름을 분석한 강경자(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일본정치)의 글을 보자.

[문제는 도쿄재판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며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연구들이 전전(戰前)의 역사를 미화하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논의로 경도되고 있다는 것이다.이들 대부분은 일본은 이제 전범자라고 하는 오명을 씻고 일본의 명예회복과 자학사관 불식을 위해서도 국제사회를 향해 도쿄재판의 재고를 호소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강경자,「도쿄재판이 전후 일본국민의 평화의식에 미친 영향」日本文化學報, 76輯, 2018).

위의 글에서 '도쿄재판의 재고'를 풀어 쓰자면, 도쿄재판이 '승자의 일방적 재판'이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면서 '자유주의 사관'의 시각에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베가 노골적으로 보여준 과거사 인식은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서 욱일기를 들고 행진하는 일본 극우파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1945년 패전 뒤 도쿄 재판(정식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평화를 깨트린 죄'(crimes against peace, A급 범죄)로 교수형을 받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군국주의자 14명이 '쇼와 순난자'(昭和殉難者)란 이름으로 합사돼 있다. 도조와 함께 교수형으로 처형됐던 7명, 재판 도중에 건강이 나빠져 죽은 2명, 유죄판결 뒤 감옥에서 건강이 나빠져 죽은 5명 등이다.

A급 전범들뿐 아니다. 통상적인 전쟁범죄(war crimes, B급),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가혹 행위를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C급)로 처형된 948명도 '야스쿠니에 합사됐다. 이들 이른바 BC급 전범들도 야스쿠니 신사의 전몰자 명단인 영새부(靈璽簿)에 '쇼와 순난자'란 이름으로 받들어진다. 야스쿠니에는 이들 전쟁범죄자들을 포함해 지난날 일본이 벌여온 여러 전쟁에서 사망한 246만 명이 등록돼 있다. 여기엔 조선인 출신 전몰자가 2만1000여 명, 대만 출신 전몰자 2만8000여 명이 합사돼 있어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는 중이다. 죽어서도 이들의 넋은 일제의 사슬에서 못 벗어난 상황이다(야스쿠니에 대해선 본 연재 9와 10 참조).

▲ 야스쿠니 신사 안을 행진하는 극우파. 이들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를 일본 극우의 성지로 여긴다. ⓒ김재명

"우리가 이겼다면 피고석엔 다른 자들이..."

올해 8월15일을 맞아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가봤다. 1995년 그곳에 들렀으니 거의 30년 만이다. 새벽까지만 해도 태풍 6호에 이어 7호가 나고야 지방을 휩쓸고 가는 시점이었다. 이틀 전인 8월13일 도쿄에 닿자말자 야스쿠니에 갔을 땐 장대비가 퍼부어 우산조차 도움이 못 됐었다. 15일 당일엔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습기와 더위로 후덥지근한 속에서도 야스쿠니는 몰려드는 참배객들로 붐볐다. 야스쿠니 배전(拝殿)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여러 겹으로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북적댔다.

일본 극우파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대일본제국과 대동아공영권의 영광'을 되찾는 정신적 구심점으로 여긴다. 야스쿠니 경내 곳곳에는 여러 그룹의 극우파들이 보였다. 40~50대 연령층으로 이뤄진 20명쯤의 한 무리는 얼핏 전투복처럼 보이는 푸른 색깔의 제복을 맞춰 입고 일장기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또 다른 무리는 60~70대 나이로 보이는 7명으로, 구 일본군 제복차림이었다. 이들은 골동품 상점에 처박혀 있었을 법한 빛바랜 군복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헌병 완장을 두르고 은근히 날카로운 눈매로 지나는 사람들을 쳐다보곤 했다. 70대 후반 나이로 허리마저 굽은 노년의 나팔수를 앞세우고 짧은 구간이긴 하지만 군대식 행진을 했다. 일본군 침략의 상징인 욱일기를 높이 쳐들고...

행진이 끝나고 야스쿠니 신사의 모퉁이 그늘에 앉아 숨을 고르는 '헌병'에게 다가갔다. "그 군복 멋져 보이는데, 어디서 살 수 있느냐"고 말을 붙였다. 도쿄 시내에 몇 개 전문 상점이 있다고 알려준다. 뜻밖에 태도가 사근사근하다. 옆의 다른 극우대원이 끼어든다. XXX에 가도 살 수 있다고 했다. 애당초 살 뜻이 없었기에 지명을 귀담아 듣진 않았다. 내친 김에 "도쿄 재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이겼다면 법정 피고석엔 다른 자들이 섰을 거야." 다른 말로 하자면, 도쿄재판은 정치 재판이었다는 얘기다.

또 다른 극우대원이 끼어들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에게 '위안부' 성노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니, 돌아오는 답은 뻔했다. '그들은 모두 매춘부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인다. '돈을 벌려고 한 짓'이라는 뜻이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극우들의 시각에선 자신들이 숭배하는 지도자들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해선 눈을 감기 마련이다.

A급 전범 118명 가운데 28명 먼저 재판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 일왕의 '종전 조서'가 있은 뒤 정확히 18일 뒤인 1945년 9월2일, 미국 전함 USS 미주리에서 공식 항복식이 이뤄졌다. 그때의 모습을 담은 다큐 동영상을 보면, 일본 정부 대표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대신이 갑판 위를 절뚝거리며 나타나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시게미쓰는 윤봉길 의사와 악연이 있다. 주중 일본공사로 있던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그 뒤로 줄곧 의족을 하고 다녀야 했다.

미주리 함상에서의 항복식 뒤 세계인의 관심은 일본의 전쟁범죄자들을 언제 몇 명이나 붙잡아 어떤 방식으로 단죄하느냐에 모아졌다. 항복식 9일 뒤인 9월11일 맥아더 최고사령부는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주요 전범 39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외국인 12명이 포함돼 있었다(독일 3명, 필리핀 3명, 호주 2명, 미얀마, 네델란드, 태국, 미국 각 1명). 필리핀 괴뢰정부 대통령과 국회의장, 독일 주일대사와 무관(중장), 태국·미얀마 주일대사 등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들 외국인들은 도쿄재판이 열리기 전에 본국으로 압송되거나 (재판 진행의 기술적 어려움 탓에) 풀려났다.

1945년 11월19일 2차 전범 체포령(11명), 같은 해 12월2일 3차 체포령(59명)이 내려졌다. 2차와 3차에선 모두 일본인이었고, 외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도쿄 재판의 피고석에 섰던 28명의 주요 전범자들은 1~3차 체포령으로 붙잡혀 들어온 118명 가운데서 추려진 자들이다. 이들 모두 일본 국적이었지만, 도쿄 재판에서 붙여진 공식 명칭은 '극동 주요전범'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인들이 모두 독일 국적이었는데도 '유럽 추축국의 주요 전범'이라 일컬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다.

[앞에 썼듯이, 일본 정부를 대표해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시게미쓰도 28명 피고인 가운데 하나가 됐고, 도쿄 재판에서 금고 7년형을 받았다. 시게미쓰에 이어 일본 군부를 대표해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육군대장은 종신형을 선고받은 바로 다음 달 초인 1949년 1월 직장암으로 죽었다].

▲ 욱일기를 들고 야스쿠니 신사 안에서 시위중인 극우파 대원들. ⓒ김재명

변호사들의 지연 전략으로 길어진 재판

일본에선 독일보다 7개월 늦게 재판이 열렸다. 그래서 당시 언론에선 '뉘른베르크 재판의 극동아시아 판'이라 일컫기도 했다. 지난날 구 일본육군사관학교 건물 2층 대강당에서 열린 재판은 1946년 5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이어졌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1945년 11월에 시작돼 1946년 10월까지 11개월 동안 벌어졌던 데 견주면 3배나 기간이 많이 걸렸다.

도쿄재판이 이렇게 길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겹쳤지만, 검찰과 변호사 사이의 법정 공방이 너무 오랫동안 이어진 탓이 컸다. 피고인은 28명이었는데, 변호사가 140명이나 됐다(일본인 변호사 100명, 미국인 변호사 40명).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다른 통상적인 형사재판에 견주어 볼 때도 이례적이고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피고인의 변호권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변호인 숫자가 많은 것을 두고 탓할 일은 아니지만, 재판이 마냥 늘어져 비효율이란 지적을 받아 마땅했다. 일본 전범자들을 돕기 위해 배당된 미국인 변호사들도 논란을 불렀다. 이들 가운데 일부 변호사들은 피고나 증인들을 상대로 핵심 사항과는 관련이 없는 엉뚱한 질문으로 법정을 어이없는 웃음도가니로 만들고, 판사들의 짜증 섞인 경고를 받곤 했다. 변호사 비용은 피고 측이 아닌, 맥아더 총사령부가 지급했다. 엉뚱한 변론으로 질질 시일을 끄는 것은 그만큼 재판 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뜻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 하나. 메이루아오(梅汝璈, 1904-1973)는 중국 출신 법관으로 도쿄재판에 참여했던 11명의 판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중국 칭화대학을 거쳐 1929년 미 시카고대학에서 법학박사를 받은 엘리트 법관이었다. 중국 법학계의 중진으로 인정받았던 그는 1962년부터 도쿄전범재판의 문제점을 다룬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의 회오리에 휘말려 고생하다가 미완성 원고를 남긴 채 죽었다. 그가 남긴 원고를 엮어 단행본으로 빛을 본 것은 한참 뒤인 2016년 중국 상하이에서였다. 그 책에서 메이루아오는 도쿄 재판이 오래 끌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미국변호사들은 법정에서 (증인을 상대로 핵심에서 벗어난 엉뚱한 질문을 거듭하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어리석은 모습도 보였다. 비록 재판장의 제지와 질책을 받기는 했지만, 이런 행위를 통해 그들은 재판을 지연시키려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는 있었다. 그들은 (일본 변호사들과 짜고) 틈을 놓치지 않고 영미법 체계의 번잡하고 복잡한 소송절차를 이용해서 도쿄재판의 시간을 늘리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도쿄재판이 한없이 늘어지게 된 것은 이런 지연 전략 때문이었다](메이루아오, <도쿄전범재판: 중국대표법관의 미완성기록> 민속원, 2019, 118-119쪽).

증인을 상대로 미국인 변호사가 엉뚱한 질문을 할 때마다 재판장은 '그 질문에 증인은 답을 하지 않아도 좋다'면서, 변호사를 노려보곤 했다. 미국 변호사들의 뒤에는 물론 일본 변호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미국 변호사들과 함께 도쿄재판의 피로감을 높이는 전략으로 어떻게든 피고에게 유리한 국면을 이끌어내길 바랐다. 법정 증인이 500명이나 소환됐고, 최종 판결문이 1200쪽에 이르러, 이를 재판장이 낭독하는 데만 6일 반이 걸렸던 것도 피고 측 변호인들의 지연전술과 무관하지 않다. 메이루아오의 글을 다시 보자.

[변호인 측의 이런 전략은 법정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재판의 진도를 늦췄을 뿐만 아니라 일본 피고들에게 사실을 왜곡하고 시비를 전도시키게끔 하였다. 길게 늘어지는 전술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여러 황당한 이론을 선전할 기회를 주었다. 이는 도쿄 재판에서 가장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메이루아오, 121쪽).

여기서 메이루아오가 말하는 '황당한 이론'이란 도조 히데키 등이 도쿄 재판 내내 입에 달고 살았던 주장, 다시 말해 '일본이 미국과 영국 등의 위협에 맞서 자위(自衛)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뛰어들게 됐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도조 히데키의 법정 진술을 모은 자료집을 보면, '일본의 자위를 위해서'라는 주장이 곳곳에서 거듭 되풀이된다. 이를테면 아래와 같다.

[일본이 개전을 결정한 것은 제 진술서에 있듯이 연락회의, 어전회의, 중신회의, 군사참의관회의를 거쳐 신중히 심의한 결과 자위상(自衛上)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결정에 대해 각하(히로히토)를 직접 뵙고 말씀드린 것은 나와 육해군 참모총장이다. 우리는 일본이 자존(自尊)을 지키기 위해, 쉽게 이야기 하자면 살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강력하게 말씀드렸고, 폐하께서 이를 승인하셨다] (<A급 전범의 증언: 도쿄전범재판 속기록을 읽다/ 도조 히데키 편> 언어의 바다, 2016, 487-499쪽).

본 연재 31에서 짚었듯이, 미국의 전시 지도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음에는 나치 전범들은 즉결 처형하는 쪽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그 까닭은 '만약에 재판을 하게 되면 나치 전범들에게 그들의 주장을 선전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에서였다. 물론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최종 결정은 '재판을 통한 전범 처리' 쪽이었지만, 루스벨트의 걱정이 도쿄 법정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 8.15 패전일을 맞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려고 몰려든 사람들. ⓒ김재명

식민지 조선 출신의 판·검사는?

지난 주 글에서 뉘른베르크 재판소의 판검사 구성에서 승전국 출신 법조인 위주로 짜여져 중립성이 훼손됐다는 점을 살펴봤다. 도쿄 재판소 구성도 마찬가지였다. 출발부터 중립성이 문제가 됐다. 도쿄 재판소는 사실상 미국이 단독으로 만들었다. 태평양지역 연합국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46년 1월19일 연합국최고사령관 최고사령부(GHQ SCAP) 일반명령 제1호로 '극동국제재판소 헌장'을 공포하였다. 도쿄 재판소 설립의 법적 근거다.

뉘른베르크 재판소가 국제조약(런던협정)에 따라 설치됐다면, 도쿄 재판소는 사실상 미국 점령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 1인의 명령으로 설치됐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전승국 4개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그런대로 권한을 공평하게 나눴던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달리, 도쿄 재판에선 맥아더 장군이 입김이 절대적이었다.

도쿄 재판소도 뉘른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전승국 출신 법조인들로 판사와 검사가 채워져 '승자의 재판'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웠다. 11명의 판사 가운데 전승국 출신이 아닌 사람은 인도와 필리핀 출신뿐이었다. 이들 인도와 필리핀도 사실상 지난날 연합국의 식민지였기에 중립국 출신이라 보기도 어렵다. 중국, 필리핀 등 일본군 점령지역의 법조인들도 참여했지만 식민지 조선 출신의 법조인은 없었다(재판장은 호주 출신의 법조인인 윌리엄 웹).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재판'

검사도 11개국 출신들로 채워졌지만, 주력은 조지프 키넌이 이끄는 미국 측 검사단 일행 38명이었다. 1945년 12월에 출범한 도쿄 국제검찰국의 우두머리(수석검사)는 당연히 미국인 키넌이었다. 그밖의 국가 출신 검사들의 직급은 모두 부(副)검찰관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전승국 4개국에서 각각 주임 검찰관을 맡았던 것과 큰 차이점이다.

본 연재에서 일찍이 살펴봤듯이, 키넌 수석검사는 맥아더 사령부의 뜻을 받들어 히로히토 일왕을 전범재판에 붙이지 않고 면죄부를 주었다. 키넌은 진주만 공습의 책임자로 점찍은 도조 히데키의 전쟁범죄에 집중함으로써, 도조를 히로히토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는다(본 연재 6과 7 참조).

재판 진행 과정에서 히로히토를 보호하려는 키넌 수석검사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호주 출신의 윌리엄 웹 재판장과 프랑스 출신의 베르나르 앙리 판사를 비롯한 일부 판사들이 제동을 걸며 불만을 나타내곤 했다. 그럼에도 키넌의 태도는 재판 내내 변함이 없었다. 키넌의 뒷심은 맥아더 장군이었다. 그는 맥아더의 지침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맥아더는 히로히토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미국의 일본 점령통치의 불안정을 피하면서,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 뒤 새로이 시작된 동서냉전 체제에서 일본을 '강력한 친미 반공국가'로 붙잡아두려 했다. 그렇기에 도쿄 재판은 '승자의 재판'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재판'이라는 지적을 받아 마땅했다.

그렇기에 도쿄재판은 또한 단순한 승자의 재판이 아니라 '히로히토와 맥아더가 손잡은 합작 재판'이란 분석도 가능하다. 도조 히데키를 희생양 삼아 히로히토 일왕을 이른바 '국체'(國體)로 여기는 일본 보수우익 세력과 미국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하야시 히로후미(간토가쿠인대학) 교수의 역저 <일본의 평화주의를 묻는다>(논형, 2012)를 참고하기 바란다(본 연재 6 참조).

▲ 도쿄 전범재판의 판사 11인. 앞줄 가운데가 재판장 윌리엄 웹, 그 오른쪽이 중국 판사 메이루아오. 둘 다 현역 육군소장인 미국과 소련의 판사들도 앞줄에 앉아있다.

호주 출신 재판장, "우리의 귀중한 시간 낭비 말라"

검찰 쪽을 미국이 장악한 것과는 달리 판사 쪽은 그런대로 형평이 이뤄졌다. 미국인 판사는 11명 판사단의 1/11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11명의 법관 가운데 9명은 경력이 많은 법조인 출신들이고, 미국 법관과 소련 법관은 둘 다 현역 육군 소장이었다. 이들 2명은 재판정에서 법복 대신에 군복을 입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도쿄재판이 공식명칭 그대로 '국제군사재판'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군복을 입은 두 판사의 모습이 어색하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 호주 출신의 윌리엄 웹을 재판장으로 뽑은 것은 여러 사정을 고려한 것으로 알려진다. 전범 조사와 기소 권한을 지닌 수석검사 자리를 미국인이 차지했는데, 재판장마저 미국인으로 할 경우의 모양새를 먼저 고려했을 것이다. 웹은 영미법에 정통한 법조인인 데다가 맥아더 장군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다.

태평양전쟁 초반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맥아더는 호주에 상당 기간 머물렀고, 그 무렵에 웹과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됐다. 이런 인연이 재판장 인선에 결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부분적으로는 고려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재판 과정에서 (히로히토를 기소하지 않았던 키넌 수석검사와의 신경전 등) 웹 재판장이 보인 태도를 보면서, 맥아더는 그를 재판장으로 선임한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도 했을 법하다.

글 앞에서 피고측 변호인들이 지연 전술로 재판을 질질 끌어가려 했다고 썼다. 중국 출신 판사 메이루아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웹 재판장은 그런 변호인들에 대해 거칠고 매서운 모습을 보였다. 이를테면, 일본인 변호사의 의뢰를 받은 일본 법학자가 법정 관할권 문제에 대해 느리고 엄숙한 어조로 변론문을 읽어내려 가자, 웹 재판장은 그의 말을 막았다.

"당신은 아주 그럴 듯하게 모습을 꾸며낼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하려는 말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니 빨리 읽고 우리들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기 바랍니다"(메이루아오, 84쪽).

"피고들을 낙도로 유배 보내자"

웹 재판장은 미국인 변호인의 태도가 불손하고 말투가 오만하다는 이유로 법관 11명의 동의를 얻어 그의 직무를 정지시키기도 했다. 변호인은 크게 화를 내면서 변호인 사표를 내던졌다. 웹 재판장의 이러한 적극적이고 단호한 태도는 다른 법관들의 지지를 받았다. 웹 재판장의 그런 강경 대응은 '변호인 측의 쉬지 않고 이어진 지연전술에 대한 효과적인 타격 도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메이루아오에 따르면, 재판장 웹은 판사들과의 회의에서 특이한 주장을 폈다. "피고들을 외딴 섬으로 유배 보내자"는 얘기였다. 다른 판사들에게는 마치 19세기 초 나폴레옹 1세를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보냈던 역사를 되풀이하자는 얘기처럼 들렸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판사는 없었다. 분위기를 알아챈 웹 재판장도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음 주 글에선 도쿄 재판의 11인 판사 가운데 '도쿄 재판이 승자의 재판'임을 가장 강하게 내세웠던 인도 출신의 판사 라다비노드 팔(1886-1967)의 논리와 문제점을 살펴본다. 팔 판사는 "침략이 범죄인지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 글 맨 앞부분에서 아베 전 총리가 폈던 주장은 팔 판사의 말을 그대로 베낀 셈이다. 지난 8월13일 야스쿠니 신사에 바로 붙어 있는 유슈칸(遊就館, 전쟁박물관)에 가보니, 팔 판사의 대형 사진과 함께 그의 주장을 눈에 잘 띄는 자리에 크게 전시해 놓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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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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