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기어이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을 사면복권 했다. 작년 2차례 특사에 이어 이번 광복절 윤석열 정부의 특별사면 대상자 명단을 두고 3번째 사면농단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단순히 논란이나 비판과 같은 단어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법원 확정판결 3개월여만에 이뤄진 황당한 조치에 대해 진영을 막론하고 다수가 아연실색하는 분위기다. 조선일보 정도만 김태우 씨 옹호를 위해 지면을 억지스럽게 사용하는 중이고 여당 의원들이나 친여 스피커들조차 문제를 회피하거나 다른 이슈로 화제를 돌려보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차마 대통령에게 딴지를 걸지는 못하지만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권한 남용인데다 사법부 판결 불복을 넘어 ‘사법부 능멸’에 가깝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이 덜한 일반 시민들도 이쯤 되면 대통령의 행위 속에 담긴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읽는다. “내가 대선에서 이겨 얻은 권한이니까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돼. 비난은 잠깐일 뿐, 화끈하게 결단해도 어차피 상관없어! 지지율에 별 영향도 없잖아!”와 같은 오만함 가득한 메시지 내용 말이다.
윤 대통령은 “내가 문재인을 이겼고 민주당을 주저앉혔다”라는 승리감과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이긴 것일까?
그 어떤 정권도 영원하지 않으니 나중에 두고 보자는 식의 흔한 악담은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정권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시간차’를 두고 ‘상대평가’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매 순간 정치 사건에 대해 유권자들이 즉각 반응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서는 모든 기록이 남는다.
결국 집단지성에 의해 기억되고 비교되고 언젠가는 그 건방짐과 부당함을 따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명히 해 둘 말이 있다. 적어도 사법부 존중과 사면권 행사라는 측면에서 '윤석열'은 '문재인'에게 졌다. 문 전 대통령은 사면권을 신중하고 엄격하게 행사했다. 같은 진영 지지자들에게도 차갑다. '같은 편을 희생양 삼는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국민 눈에는 이 또한 상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데 적어도 윤 대통령처럼 함부로 권한을 휘두르지 않았다는 점에 반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억할 만한 몇 가지를 짚어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은 고령으로 위독한 상황에서 건강상 배려로 부득이하게 이뤄졌지만 국정농단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경제인이든 정치인이든 사면하지 않았다. 탄핵을 이뤄낸 국민이 용납하기 어려운 사면이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당 출신 한명숙 전 총리는 같은 시기에 복권되었지만 사면은 받지 못하여 추징금을 면제받지 못했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의 기획 수사 의혹이 농후한 입법 로비 사건으로 민주당 신계륜·김재윤 전 의원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만기출소까지 했는데 문재인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후에도 이들은 끝까지 문 전 대통령에게 사면을 받지 못했다. 이 중 김재윤 의원은 우울증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여러 진영에서 기대했던 문재인 정부 임기 말 사면도 결국 대통령이 사면권을 포기함으로써 아예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어떠한가? 3차례의 특별사면으로 삼성 이재용 회장을 비롯하여 경제인들이 대거 사면복권 되었다. 거액의 배임·횡령·뇌물죄를 범해도 경제인은 사법적 단죄에서 자유롭다는 생각에 일반 시민들은 허탈해하고 있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흔한 어구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팩트로 취급받는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인 사면에 있어 기발한 꼼수까지 동원하여 완벽하게 ‘내 편 챙기기’로 밀어붙이고 있다. 윤석열·한동훈 콤비의 사면 전략 프로젝트에 대해 사면 농단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주된 이유다.
비상식적이고 자의적인 사면 기준임이 분명한데도 보도자료를 보면 대상자에 대한 각각의 사유가 분류되어 매우 그럴듯하게 정리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2022년 12월 연말연시를 앞두고 이뤄진 특사에서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 등의 혐의로 무려 징역 17년과 벌금 130억이 확정된 이명박 전 대통령을 단번에 사면복권하고 추징금까지 모두 면제시킨 일이다.
이때 반대 진영의 김경수 전 지사는 형기를 단 4개월 남겨 둔 상태인데다 본인이 사면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사면하기 위해 ‘국민통합’이라는 가짜 명분에 이용되었다.
수학적으로 계산해도 경중 차이가 심하여 형평성이 없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김경수 전 지사에게는 ‘복권 없는 사면’이 이뤄져 윤석열 정부의 정치적 꼼수와 옹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작년 말 대통령실에 근무하는 김태효 국가안보실1차장을 슬쩍 특사 명단에 끼워 넣어 범죄자 꼬리표를 떼어준 것은 이번 ‘김태우 초고속 사면’에 비견될 만한 최측근 챙기기였다.
또한 징역 14년을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작년에 김경수 전 지사와 억지스럽게 동일 항목(선거 관련)으로 분류하여 감형시키고 8개월이 지난 이번에 가석방 기준에 맞다면서 풀어준 것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초특급 꼼수 사면’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자기편 사람들을 챙기고 싶지 않았겠는가? 너무 긴 시간 측근들의 정치생명을 끊어버리고 진실을 외면한다는 비판으로 인해 괴롭지 않겠는가? 또한, 누구보다 ‘법치주의’라는 단어를 지겹도록 반복·강조한 것은 오히려 윤 대통령 본인이 아닌가? 국민의 눈높이에서 누가 더 명분을 지켰다고 판단하겠는가?
물론 사법부의 판단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특정 재판의 경우 그 과정과 결과에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법부의 결정을 ‘견제’하고 ‘보완’하는 권한이 3권분립 국가에서 대통령에게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국민공감대에 기반한 억울함 해소’라는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임기 1년을 조금 넘긴 윤 대통령의 권한 남용은 정도가 지나치게 심하여 하나하나 마이너스 점수로 쌓이고 있다.
한편 사면이 국민통합을 위한 고도의 정치 기술이자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의 결과라는 관점은 어느 시기에든 유의미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말에 다른 부정적인 프레임을 의식하기보다는 ‘MB 사면’을 결단하여 노무현 진영과의 화해 의미를 살리고 오랜 원한을 풀었다면 그 또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문 대통령이 실패한 국민통합 과제를 윤 대통령이 할 수도 있다고 기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3차례 사면이 엎질러진 물처럼 단행되었고 ‘통 큰 결단’은커녕 ‘꼼수’를 동원한 반쪽 사면만 계속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결정으로 보수 진영의 주장 역시 명분을 잃었다. 보수 진영은 그동안 문재인 정부를 향해 ‘내로남불 말라, 사법부를 존중해라, 법관의 결정에 승복하라’며 일방적으로 윽박지르곤 했다.
그러나 최근 나오는 기사나 칼럼을 보면 비교불가한 차원의 내로남불과 뻔뻔한 자기 편 옹호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판결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은 ‘판결 존중 및 승복’과는 별개의 문제다. 대통령이든 유명 정치인이든, 징역을 거부하거나 승복하지 않은 사례는 없다.
그러나 감옥의 근처에도 가지 않은 김태우 전 구청장이 바로 사면복권 특혜를 받은 후에도 ‘오직 내 재판만 억울하고 현 사법부의 판단은 모두 문재인 정권 탓이며 나는 바로 내 자리를 찾기 위해 출마까지 해야겠다’라고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판사 모독 및 판결 불복’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철없는 지지자들의 주장도 아니고 인이 이렇게 직접 나서서 주장하는 일은 여야를 막론하고 흔치 않은 일이다.
또한 정치적 판단을 놓고 보더라도 김태우 전 구청장은 정치에 입문한 사람으로서 윤 대통령의 국정을 전혀 돕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억울함과 조급함에만 사로잡힌 사람에게 사면 거부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겠으나 근신의 시간을 전혀 갖지 않고 오히려 본인이 한술 더 뜨는 모습은 자신이 속한 진영 전체에 부담을 주는 일이다.
윤석열 정권은 이런 사람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윤석열은 더더욱 문재인에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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