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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의 재판'이라 분개? '100인 목베기'도 화해로 넘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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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의 재판'이라 분개? '100인 목베기'도 화해로 넘겨야 할까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30]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인가 ①

지난 주 글에서 '누가 용서를 해야 하는가'와 관련해,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1995)를 쓴 베른하르트 슐링크(전 훔볼트대교수, 법학)의 '용서'에 대한 분석을 살펴보았다. 본업이 법학자인 슐링크는 그의 책 <과거의 죄>(2007)에서 나치 정권의 전쟁범죄에 대한 법적·도덕적 책임을 다루었다. 슐링크가 강조한 것은 '피해자만이 용서를 할 수 있는 주체'라는 점이다. (가해자가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기에) 피해자가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치가를 비롯한 제3자가 '용서하라'고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 슐링크의 핵심 주장이다.

이 글에 대해 독자 한 분이 메일을 주셨다. 영화 '밀양'이 생각났다는 말씀이었다. 아주 적절하고 고마운 지적이다. 이창동 감독의 2007년도 영화인 '밀양'은 용서를 놓고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좋은 보기다. 여주인공 신애(전도연)는 무신론자다. 유괴살해범에게 아들이 죽자, '신의 섭리'라고 여기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곤 가해자를 용서할 마음으로 교도소로 찾아가지만, 큰 충격을 받는다. 신애가 용서란 말도 꺼내기 전에 가해자는 '하느님이 제 죄를 용서해주셨다'며 아주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해자가 용서를 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제대로 용서를 빈 적도 없으면서도)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이른바 '셀프 사면'이 딱 이런 경우다. 일본은 지난날 피해자들에게 전쟁범죄의 진상 규명과 더불어 진정성 담긴 용서를 빌지 않았고, 따라서 용서를 받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용서를 훌쩍 건너뛰고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화해를 말한다. 영화 속 유괴살인범의 편안한 얼굴에 일본의 맨얼굴이 겹쳐 떠오르기 마련이다.

아렌트, "나치의 범죄는 어떤 형벌로도 충분하지 못하다"

전쟁범죄란 반인류적 행위다. 사형언도로도 그 죄를 씻기 어려운 끔찍한 행위가 전쟁범죄다. 독일 출신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1906-1975)는 독일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특히 화제를 모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등의 책이 번역돼, 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유대계 지식인이다.

독일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녀 자신이 전쟁범죄의 희생양이 될 뻔 했던 아렌트는 '나치의 전쟁범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렌트는 실존철학자로 이름이 알려진 그녀의 스승 칼 야스퍼스(1883-1969)와 1926년부터 야스퍼스가 타계할 때까지 40년 넘게 편지를 주고받았다.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무렵, 그녀는 야스퍼스에게 띄운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전쟁범죄는 너무나 끔찍해서 어떤 형벌도 그 죄를 다스리기엔 충분하지 못하다"(Gary Bass, <Stay the Hand of Vengea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13쪽).

같은 편지에서 아렌트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거들먹거리며 재판을 받았던 헤르만 괴링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괴링은 나치 돌격대를 창설해 독일을 경찰국가로 만들었고 독일 공군을 지휘했던 나치 독재체제의 2인자였다. 아렌트는 뉘른베르크 재판이 괴링에게 교수형을 언도하는 것으로 끝날 걸로 봤다. 이런 예측은 당시 많은 사람들도 했던 것이지만, 그녀는 편지에서 '괴링이 저질렀던 죄 값으론 교수형이 전혀 맞지 않는다(너무 싸다)'고 덧붙였다. '나치 전범자들이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점잔을 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동갑내기인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뒤 재판 받는 과정을 담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유대인 게토의 '유대인위원회'가 나치에 협력했다고 비판함으로써, 유대인 사회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특히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인'(惡人)이 아니라, 깊은 생각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해냈을 뿐이라는 이른바 '악의 평범성'이란 명제를 내세워 많은 논란을 불렀다. 이에 대해선 본 연재에서 따로 살펴볼 참이다.)

'나치 전범자들이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점잔을 뺀다'는 아렌트의 지적에서 생각나는 일본 전범자들이 있다. 중국인 30만 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진 난징학살(1937)의 책임을 물어 중국 법정이 총살형을 내렸던 다니 히사오(谷寿夫. 일본군 6사단장, 중장)다. 그는 난징학살 범죄로 처형된 일본군 고위 장성 두 명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하나는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일본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겸 상해파견군 사령관, 대장)이다. 마쓰이는 도쿄 국제군사재판을 거쳐 1948년 12월 교수형으로 죽었다.

다니는 1945년 패전 뒤 중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일본에서 중국 난징법정으로 강제 송환됐다. 1947년 4월26일 총살형이 집행되던 날, 다니가 처형되는 모습을 보려고 희생자 유가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난징 남쪽의 형장으로 몰려갔다. 그날 처형 현장에 있던 중국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내 가족을 끔찍한 고통 끝에 죽인 전쟁범죄의 책임자를 총알 몇 방으로 숨을 거두도록 하는 것이 너무 편하고 가벼운 형벌이 아닐까 생각했을 법하다.

일본 군도로 누가 빨리 더 많은 포로의 목을 베느냐며 '100인 목 베기' 시합을 벌였던 일본군 위관급 장교 2명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난징 법정으로 소환돼 총살형을 선고받았을 때도 중국인들이 겪은 고통의 무게에 걸맞는, 아니 더욱 고통스럽게 숨을 거두도록 만드는 다른 처벌 방식은 없을까를 생각했을 듯하다. 실제로 당시 많은 중국인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외치며 목을 베어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 아돌프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를 코믹하게 그린 미국의 선전 포스터. 히틀러는 1945년 4월30일 자살했지만, 도조는 권총 자살에 실패한 뒤 1948년 12월23일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패자만이 법정에 서야 하는가

우리 인류가 치른 최대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어도 5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 희생자의 상당수는 전쟁범죄로 말미암아 생목숨을 빼앗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의 전쟁 지도부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12명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도부는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을 통해 7명이 각기 처형됐다. 그리고 또한 많은 하급 전범들이 일련의 재판을 거쳐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범죄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처형된 독일·일본의 정치·군사 지도자들 다수는 스스로를 '승자의 정치적 재판'의 희생자라고 여겼다. 왜 그랬을까. 전쟁 과정에서 승자든 패자든 가릴 것 없이 오로지 승리라는 목표달성을 위해 무차별 살상행위(전쟁범죄)를 벌였는데, 패자만이 법정 피고석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승자 재판' 불만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은 함부르크 같은 주요 공업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드레스덴 공습(1945년 2월) 등으로, 일본은 도쿄공습(1945년3월)과 원자폭탄(1945년 8월6일과 9일)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다. 그런데도 전쟁범죄로 처벌받은 쪽은 패전국 지도자들이었다. 전승국의 지도자는 처벌을 비껴갔다. 20세기의 여러 전쟁을 살펴봐도 예외가 없다. 그렇기에 '전범재판은 곧 승자의 재판'이라는 말이 줄곧 이어져왔다.

정의롭다고 주장할 권리는 승자의 몫

"전장터가 법을 결정한다"(Battlefields determine the law). 한 국가의 정책결정이 합리적이라 여기며 특히 힘(power)을 중시하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의 주장이다. "이긴 자가 역사를 쓴다"는 옛말과 같다. 조선시대에 동인이냐, 서인이냐로 갈리고, 소론이냐 노론이냐로 갈려 붕당정치(朋黨政治) 때도 그랬다. 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살벌한 사화(士禍)를 겪는 당쟁(黨爭)에서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 됐다.

일본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이기면 관군이고 지면 반군이다." 메이지유신(1868) 무렵에 일어났던 에도 막부(幕府)와 교토 국왕 세력 사이의 보신전쟁(戊辰戦争, 1868)을 치르면서 나온 자조적인 말이다.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의 반란으로 벌어졌던 세이난전쟁(西南戦争, 1877) 때도 그런 말들이 떠돌았다.

전범재판이 승자의 재판이라 보는 것은 그 역사적 뿌리가 깊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국가>(Politeia)에서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름' 곧 정의(正義)의 개념을 놓고 소크라테스와 토론을 벌이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로서는 올바른 것이란 더 강한 자의 편익(이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박종현 역주, <플라톤의 국가(政體)> 서광사, 2003, 82쪽).

트라시마코스의 말은 '정의는 강한 자에게 유익한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천병희 번역, <국가> 도서출판숲, 2017, 50쪽). 이를 전쟁 상황으로 풀어쓰자면, '싸우는 어느 쪽에서나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여기는 점에선 모두 똑 같다. 다만 승자에게 더 이로울 뿐'이라는 주장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정의롭다고 주장할 권리는 승자가 갖는다는 얘기가 된다. 패자는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여기더라도 주장할 권리가 없다.

칸트, "정의는 전쟁의 승패가 결정한다"

플라톤보다 더 직설적으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일찍이 그의 <영구평화론>(1795)에서 '정의는 누가 그 전쟁에서 이겼느냐로 판가름된다'면서, 폭력으로 승패가 가름되는 전쟁의 냉혹한 성격을 말한 바 있다.

[전쟁은 각 국가가 폭력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연상태(이 경우 적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법률기관은 없다)에서의 비참한 호소 수단인 까닭에, 어느 쪽이 부당한가를 가려낼 방도가 없다(왜냐하면 이것은 이미 재판관의 판결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결정 대신에 싸움의 결과만이 (소위 '신의 판결'에 의해 주어지듯이) 어느 쪽이 정당했던가를 가름해준다] (칸트, <영구평화론-하나의 철학적 기획> 서광사, 2008, 20쪽).

칸트의 이 말을 풀어 쓴다면,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홉스가 말했듯이, 전쟁은 자연상태나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국가들 사이의 폭력적인 투쟁이다. 그런 전쟁에서 어느 쪽이 정의로운가 아닌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교전 쌍방 어느 쪽도 '정의로운 군대' 또는 '불의(不義)의 군대'라고 처음부터 일컬어질 수 없다. 어느 쪽이 정의로운 군대였나를 결정하는 것은 전쟁의 승패 여부 그 자체다. 전쟁에서 이긴 국가는 정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고, 패전국의 '불의'를 전범재판이란 형태로 처벌할 수 있게 된다.

"전쟁의 승자는 언제나 재판관이 되고, 패자는 피고석에 선다" 아돌프 히틀러에 이어 나치 독일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이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 폈던 주장이다. 비밀경찰(게쉬타포)을 조직했고 공군총사령관 출신인 괴링은 교수형을 언도 받은 날 밤(1946년10월15일) 청산칼륨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뉘른베르크 재판은 정치적 재판이라고 여겼고,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처칠이나 루즈벨트가 법정에 서야했을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 전쟁범죄를 다루는 재판들에서 정치적 성격을 지우기는 어렵다. 미 연방최고법원 판사로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의 미국쪽 수석검사를 맡았던 로버트 잭슨은 이런 회고담을 남겼다.

"기소할 것인가 말 것인가, 기소한다면 얼마만큼의 형량을 매길 것인가는 결국 정치적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결정은 미 대통령이 내렸다. 나는 법적인 절차에 따라 재판을 마무리 짓도록 요청 받았을 뿐이었다"(Gary J.Bass, 6쪽).

▲ 1945년 뉘렌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출석한 독일 전시 지도부. 헤르만 괴링(사진 앞줄 위)은 '뉘렌베르크 재판은 승자의 정치적 재판'이라 주장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올브라이트, "전범 처벌해야 평화 온다"

위에서 살펴본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전범재판은 필요하다. 어떤 이유에서 그럴까. 발칸반도의 보스니아내전이 끝난 뒤인 1997년 헤이그의 유고전범재판소를 방문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당시 미 국무장관)는 '(전범재판을 통한) 정의는 법의 지배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이라 주장했다. 전쟁범죄자들을 처벌해야 하는 까닭을 두고 그녀는 '전쟁범죄 희생자 가족들의 비통함을 달래줄 뿐만 아니라, 어느 날엔가 다시 폭력이 일어날 것이란 걱정 없이 나토 평화유지군이 보스니아를 떠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했다.

올브라이트는 '20세기 마지막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발칸반도의 코소보전쟁이 막 끝나고 나토평화유지군이 코소보로 진주했던 1999년7월, 코소보 주도 프리스티나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의는 평화의 어버이(justice is a parent to peace)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전쟁범죄자들을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란 뜻이다. 그녀는 전범재판이 '힘의 법(law of force)이 아니라 법의 힘(force of law)'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의 모델이라 여겼다.

그러나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은 "전쟁범죄 재판이 반드시 평화를 이끌어내지 못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참상을 가까이에서 봤던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연구자 E. H.카로부터 헨리 키신저(전 미 국무장관)에 이르는 이른바 현실주의(realism) 계열의 이론가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전쟁범죄 재판으로 상징되는 법의 힘이 국제정치질서를 바로 잡아가는 생산적인 역할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E. H.카, "정치란 윤리가 아니다"

E. H.카는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이 몰아치기 바로 직전인 1939년에 쓴 책 <20년의 위기, 1919-1939>에서 "정치란 (이상주의자들이 보듯) 윤리적 기능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현실주의자인 카의 논리에 따르면, 정치는 정치 나름의 윤리가 있지만, 그것은 교과서에서 말하는 윤리학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전쟁범죄자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라고 보았다(빌헬름 2세는 1918년 11월 국왕 자리를 내놓고 네델란드로 몸을 피했고, 네델란드는 빌헬름 2세를 내놓으라는 전승국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일 통일의 주역이자 철혈재상으로 이름난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도 일찍이 카와 같은 생각을 지녔다. 그는 1871년의 보불전쟁(프러시아-프랑스 전쟁) 승리 뒤, 패전국 프랑스를 다스려왔던 나폴레옹 3세를 전범재판에 붙여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을 코웃음 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전쟁 중 그를 포로로 잡고도 풀어주었다). 비스마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그래서 독일황제 빌헬름 2세를 전쟁범죄 책임자로 처벌하려는 전승국들의 움직임을 들었다면, 크게 화를 냈을 것이다.

현실주의자들은 국제기구나 국제협력보다는 한 국가가 지닌 힘(power)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를 바라본다. 그들은 전쟁범죄 단죄가 전쟁이 그친 뒤(또는 분쟁종식 뒤) 새 정치질서를 잡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전범 단죄는 또 다른 정치갈등의 씨앗을 뿌릴 따름이라는 논리다(이런 주장을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벌어졌던 사담 후세인 재판에 적용한다면, 후세인을 전범으로 처형하면 수니파들의 반발이 클 것이고, 이라크는 다시 정치적 혼란에 빠질 것이란 주장이 된다. 실제로 상황은 그렇게 흘러갔다).

키신저와 아롱, "지도자를 전범자로 몰아선 안 된다"

현실주의학파의 거물인 헨리 키신저(1923-)도 카의 견해에 동조한다. 그의 방대한 저작인 <외교>(Diplomacy, 1994)은 국제정치의 여러 주요주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마무리의 주요절차였던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해선 언급조차 없다. 키신저는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한 뒤의 유럽 정치상황을 분석한 다른 책에서, 유럽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다듬은 '비엔나 회의'(Congress of Vienna)에 모인 전승국들이 나폴레옹을 전쟁범죄자로 몰아 처형하지 않고 '관대한 조치'(세인트 헬레나 섬으로의 유배)를 취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적이 없는 전쟁이란 생각할 수가 없다. 전쟁은 적을 벌하고 싶다는 유혹(temptation of war to punish)을 느끼지만, 정치의 임무는 (전후 새로이 안정된 국제질서의) 건설이다(the task of politics to construct). 힘은 (패자를 벌하느냐 마느냐의) 현실적 판단 위에 서 있지만, 정치는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Henry Kissinger, <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 of Peace 1812-1822> Houghton Mifflin, 1973, 138쪽).

키신저는 적국의 지도자를 전쟁범죄자로 몰아 보복하고, 더구나 패자를 전쟁범죄자로 심판하는 것은 또 다른 증오와 분쟁의 씨앗을 뿌릴 것이라고 본다. 전쟁범죄는 반드시 처벌 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에 얽매이거나, 개인적 감정 차원에서 패전국의 지도자를 전쟁범죄자로 몰아 처벌하는 것은 평화와 안정을 해친다는 것이 키신저를 비롯한 현실주의자들의 시각이다.

현실주의 정치학자들이 전쟁범죄 처벌을 반대하는 이유 가운데는 '전쟁범죄 처벌이 평화를 앞당기기는커녕 전쟁을 더욱 끌어가고 전쟁 양상도 더 참혹해지도록 만든다'고 판단한다.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우파 성향의 지식인 레이몽 아롱(1905-1983)도 "전쟁범죄자들을 처벌한다는 위협은 전쟁을 더 잔인해지도록 만들뿐"이라고 믿었다. <평화와 전쟁>란 제목을 단 국제정치학 관련 저서에서 아롱이 편 논리는 이러했다.

[한 국가의 정치인들이 그들의 모든 저항수단을 다 써버리기 전에, 적국이 자신들을 전쟁범죄자로 여기면서 전쟁이 끝난 뒤 전범재판에 회부할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경우, 그들은 항복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적국 지도자들을 전범재판으로 몰아넣으려 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면서 전쟁을 끌어갈 것이다. 따라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적국 지도자들을 재판에 부치지 않고 보호하는 것은 비도덕적이긴 하지만, 아주 현명한 일이다](Raymon Aron, <Peace and War: A Theory of International Relations>, Doubleday & Company, 1966, 115쪽).

"내가 법정에 선 이유는 전쟁에서 졌기 때문"

독일의 헤르만 괴링(1893-1946)과 일본의 도조 히데키(1884-1948)가 전쟁범죄자로 죽은 뒤 지난 80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 여러 건의 전범재판들이 벌어졌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패전국(약소국) 지도자들이다. △아프리카 민간인들의 손목을 도끼로 마구 잘랐던 시에라리온 반군 RUF 지도자 포데이 산코(2003년 폐경색으로 옥사), △발칸반도(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의 인종청소와 집단학살을 지휘한 혐의로 헤이그 유고전범재판소(ICTY) 법정에 섰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전 유고슬라비아대통령, 2006년 심장마비로 옥사),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이라크 국내 재판을 통해 2006년 12월30일 교수형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사담 후세인이 그러했다.

밀로셰비치나 후세인은 죽을 때까지 '이 재판은 미국과 서방의 정치적 도구'라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 이들은 스스로를 '역사의 패자(敗者)'로 평가하면서도, 그 자신이 전쟁범죄자임을 부인했다. 그런 사례들은 한둘 아니다. 이들 모두 독일의 헤르만 괴링이나 일본의 도조 히데키처럼 그가 전쟁에서 이겼다면, 전범재판 피고석에 설 일은 없다고 여겼다.

시에라리온 반군 혁명연합전선(RUF) 지도자 포데이 산코도 스스로를 전쟁범죄자로 여기지 않았다. 지난 2000년 봄 시에라리온 현지에서 산코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비전투원인 시민들의 손발을 자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시민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려고 내가 혁명을 시작한 게 아니다." 그런 불상사는 마음먹은 것보다 통제가 쉽지 않은 '혁명'의 과정에서 생겨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란 얘기다(밀로셰비치, 후세인, 산코의 전쟁범죄에 대해선 본 연재에서 각각 다시 살펴볼 예정임).

▲ 1946년 도쿄 국제군사재판에 출석한 도조 히데키. 괴링과 마찬가지로 '승자 재판론'을 펴며 미국을 비판했다.

"승자의 재판이지만, 전쟁범죄 처벌했다"

전범재판은 '승자의 재판' 성격을 지닌다. 전쟁범죄자로 몰린 패전국 지도자들의 시각에선 억울하고 답답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전쟁 과정에서 승자든 패자든 가릴 것 없이 오로지 승리라는 목표달성을 위해 무차별 살상행위를 벌였는데, 패자만이 법정에 서야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실 하나. 전쟁범죄 단죄가 정치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해서, 그들이 저질렀던 전쟁범죄가 정당하거나 합리화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와 관련, 지난 2010년 루게릭병으로 타계한 토니 주트(전 뉴욕대교수, 역사학)는 아래와 같이 짧지만 명쾌하게 전범재판의 성격을 풀이한다(주트 교수는 유대인이면서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통치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역사학자로, 2권으로 이뤄진 대작 <전후유럽 1945-2005>를 비롯한 여러 명저들을 남겼다).

[나치에 대한 재판이 독일인들의 정치적·도덕적 재교육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그 재판들이 '승자의 재판'이라고 분개했으며, 실제로 그것은 승자의 재판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명백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진짜 범죄자들에 대한 실제 재판이기도 했으며, 미래의 국제재판에 중요한 판례가 되었다](토니 주트, <전후유럽 1945-2005> 제1권, 열린 책들, 2008, 115쪽).

전범 처벌 비껴가는 미국과 이스라엘

승자의 재판이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쟁범죄를 단죄한다는 측면은 긍정적이다. 문제는 전승국(강대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전범재판으로 처벌받은 사례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강대국 미국의 지도자들은 전쟁범죄 재판을 받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라크 침공(2003)이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어긴 것이 분명한데도,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걸핏하면 팔레스타인 주거지를 마구 폭격해대는 '21세기의 중동의 깡패국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강대국인 미국 지도자들, 그리고 미국의 최우선 동맹국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전쟁범죄자로 몰아 법정에 세울 주체가 없거나 있다 해도 약하다. 국제형사재판소(ICC)도 미국 앞에선 힘을 못 쓴다. 이런 현실적 배경 아래서 국제정치학자들은 전범재판을 가리켜 '승자의 정의에 따른 절차'라는 냉정한 해석을 내리게 된다.

다음 주 토요일엔 뉘렌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주요 전범으로 기소된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독일 피고들과 전승국 관계자들이 각기 어떻게 재판을 바라봤는지를 좀 더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엔 도쿄 국제군사재판소를 같은 맥락에서 들여다볼 참이다. 그런 다음 전승국의 전쟁범죄라는 논란이 따르는 드레스덴 폭격(1945년 2월)과 도쿄 공습(1945년 3월), 두 차례에 걸친 원폭 투하(1945년 8월6일과 9일)가 어떤 문제점을 지니는지를 차례로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계속)

사진 1. 아돌프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를 코믹하게 그린 미국의 선전 포스터. 히틀러는 1945년 4월30일 자살했지만, 도조는 권총 자살에 실패한 뒤 1948년 12월23일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2. 1945년 뉘렌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출석한 독일 전시 지도부. 헤르만 괴링(사진 앞줄 위)은 '뉘렌베르크 재판은 승자의 정치적 재판'이라 주장했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3. 1946년 도쿄 국제군사재판에 출석한 도조 히데키. 괴링과 마찬가지로 '승자 재판론'을 펴며 미국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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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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