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는 2013년부터 전국 최초로 장애인 탈시설 정책을 추진해왔다. 2022년에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를 명문화한 '서울특별시 장애인 탈시설 및 지역사회 정착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탈시설 정책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지난 20일 서울시는 '서울시, 지역사회 거주 장애인과 시설거주 장애인 모두 행복한 장애인 정책 흔들림 없이 추진'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하였다.(☞ 바로 가기) 언뜻 제목만 보면 서울시 탈시설 정책의 비전인 '탈시설 장애인의 완전한 지역사회 통합'에 대한 구체적인 추진계획이 담겨있을 듯하다. 실제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5페이지에 달하는 이 문서에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전장연과의 전쟁을 선포한 듯하다.
보도자료의 요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을 발목 잡는 전장연은 비판받아야 한다."
매우 놀랍고 부끄러운 일이다.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시에서 특정 시민단체를 '비난받게' 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이다. 본문에서는 전장연을 가해자로 묘사하고 공무원과 시민들을 피해자의 위치에 세웠다. 단순히 전장연의 문제로만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거대 권력과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지자체가 자신의 정책과 방향이 다르거나 반대하는 시민단체를 공적 권력을 이용해 억압하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보도자료의 제목과 목적, 나열된 정책 내용의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언급된 모든 문제의 배후로 전장연을 지목하고 있다.
먼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에 대한 개편 내용을 살펴보자.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는 2020년 서울시가 전국 최초로 시 예산을 전액 투입해 최중증 장애인과 탈시설 장애인을 위해 만든 일자리이다. 일반 노동시장과는 달리 장애인 권익옹호, 문화예술,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등 3개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는데, 이 중 장애인 권익옹호 업무에는 장애인 차별 해소를 위한 퍼포먼스, 지역사회 제도개선 모니터링, 탈시설 및 자립생활 홍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시행한지 불과 4년 만인 2023년 7월 서울시는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일자리에서 집회·시위·캠페인 활동을 제외하기로 하였다. 장애인의 권익과 인식개선을 명분으로 집회·시위·캠페인 등에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장애인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이유이다. 물론 명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장애인 탈시설 정책에 대한 기조 또한 그동안의 정책 방향과는 사뭇 다르다. 지난 2월 서울시에서 조사한 탈시설 한 장애인 중 의사소통이 심하게 곤란한 20명이 어떻게 의사표시를 하고 자립생활을 하게 됐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탈시설이 아닌 요양과 돌봄을 받아야 할 사례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존의 탈시설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의사소통이 심하게 곤란한 20명은 어떻게 특정 시설에서 오랫동안 살게 되었고, 지자체는 무슨 근거로 이들의 입소를 승인했다는 것인가?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장애인이 강제적 또는 주변의 강력한 권유 등으로 거주시설에 비자발적으로 입소한 비율은 82%나 된다. 또한 탈시설 장애인과 시설장애인의 지원 예산, 그 차액을 표로 제시하면서 탈시설 장애인에게 예산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설장애인과 탈시설 장애인의 삶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서울시가 원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근거로 예산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치시대 독일에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험문제가 출제되었다.
"독일에는 30만 명의 장애인과 간질환자 등이 관리를 받는 시설이 있다. 이들에게 하루 1인당 4제국 마르크가 지출될 때, 1년 국가의 총지출은 얼마인가? 만일 이 돈을 신혼부부에게 100제국 마르크의 보조금으로 지원한다면 몇 쌍에게 지원할 수 있는가?"
시험문제는 단순한 계산 문제로 보이지만 인간을 효율성과 비용의 문제로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인간을 존엄한 존재 자체가 아닌 사회적 비용 지출과 타인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나치 정권은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를 기치로 독일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등장했으나 노동조합을 비롯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단체들을 숙청해 사회의 공론화 기제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럼에도 독일인들은 철저하게 나치 정권에 복종했는데, 위의 시험문제와 같은 선전 선동의 효과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나치 정권은 장애인을 '공동체의 짐', '비용을 쏟아 붓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고, 시민들 역시 교묘하게 강요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침묵을 넘어 나치의 반인권적인 행위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T4 작전이란 이름으로 나치 정권에서 30만 명 이상의 장애인이 학살되었다.
지난 1월 '전장연 지하철 시위 2년, 피해액 2700억, 1회 평균 1시간 4분 지연'이란 자극적인 제목의 신문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서울시는 한술 더 떠 피해액이 약 4450억 원에 달한다고 하였다. 4450억 원은 서울시의 주장대로라면 시설장애인과 탈시설 장애인 지원 예산 차액을 기준으로 탈시설 1년차 장애인 5602명을 지원할 수 있는 예산이다. 장애인복지에 이 정도 예산을 투입했다면 전장연은 시위를 진작 멈췄을 것이다. 또한 추산된 피해액을 근거로 향후 지하철 시위에 강력하게 대처할 것이 아니라 지하철 시위로 인해 예상되는 피해액만큼 장애인복지 예산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서울시는 전장연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평범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과연 이익의 실체가 존재하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사실 전장연 요구는 거창하지도 불가능하지도 않다. 단지 장애인도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다하라는 것뿐이다. 시민들이 숙고해야 할 문제는 장애인의 인권이 보장되지 못하면 공동체의 그 어떤 구성원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민단체를 억압하는 국가와 지방정부의 행태 또한 정권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또 다른 집단의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단순히 내가 장애인이 아닌 것이 다행이고, 내가 탄 열차가 전장연 시위 시간대에 걸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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