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계단>, <제노사이드> 등의 작품으로 장르 소설 팬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다카노 가즈아키가 <건널목의 유령>(박춘상 옮김, 황금가지)으로 돌아왔다. 무려 11년 만의 신작이다.
전작들에서도 불가사의와 사회 문제, 미스터리를 솜씨 좋게 엮은 작가의 실력이 여전하다. 이야기가 다루는 일본 사회에 관한 문제 의식이 전작들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불가사의도 더 선명히 사회와 얽혀 들어간다.
이야기는 이렇다. 1994년 겨울의 도쿄, 과거 전국 일간지 사회부 기자였던 마쓰다 노리오는 현재 여성 월간지의 계약직 기자로 일하고 있다. 50대의 나이니 이미 낮밤을 가리지 않던 열혈 기자의 삶은 쇼와(昭和, 1926.12~1989.1) 시대로 떠나보낸지 오래다. 2년 전 사랑하던 아내와도 사별한 그는 조용히 퇴색해가는 중이다.
우연찮게 일이 떨어진다. 심령 특집 기획이다. 기삿거리를 찾다 설명하기 어려운 심령현상을 하나 건져냈다. 도쿄 시모키타자와역 3번 건널목 부근에서 흐릿하게 찍힌 여성의 투고(投稿) 사진이다. 카메라맨의 설명으로는 조작이나 우연한 광학 현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령인가? 이 사진은, 이 현상은 실재하는가? 30년 기자 경력이 심령 현상을 추적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살인 사건과 이어진다.
<건널목의 유령>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건 시기다. 왜 2023년에 1994년의 이야기를 써야 했을까. 아예 구습과 새 물결이 격렬히 충돌하던 다이쇼 시대(1912.7~1926.12)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요코미조 세이시 류의 찜찜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 테다. 사회운동이 마지막으로 격렬히 일어나던 1970년대로 간다면 날카로운 사회파 이야기를 벼려낼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는 아무래도 조금 어설프다.
작가는 그 이유로 윈도95를 거론했다. 예상치 못한 설명이다. "디지털 기술로 개인이 쉽게 사진을 날조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그 한계까지 닿은 시기를 상정했다. 그래서 1994년하고도 12월이 이야기의 배경이다.
다만 이 이야기가 섬뜩한 괴이 현상, 곧 유령 출몰을 소재로 하는 만큼, 버블 붕괴 후 헤이세이(平成, 1989.1~2019.4)의 모습이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다. 1990년대 초 일본 사회에 부풀어오른 거품이 거짓말처럼 꺼진 후, 세상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쇼와의 영광은 침잠으로 대체됐다. 이 시기 일본 공포 영화가 세계를 휩쓸었다. 건널목에 출몰하는 유령 현상을 다루기 참으로 적절하다는 해석을 사족으로 달게 된다.
이야기를 따라가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핵심 질문을 바꾸게 된다. 책 초반 질문은 당연하게도 '‘이 심령 현상은 사실인가?'’이다. 이 사진이 사실이라면, 귀신은 실재하는가? 사진의 현상을 추적하던 마쓰다 주변에서도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 새벽 1시 3분이 되면 미지의 전화가 울리고, 마치 죽어가는 듯한 여성의 희미한 신음이 섬뜩하게 귓가에 맴돈다. 전형적인 괴담류 진행이다.
*이하 내용 일부는 약한 스포일러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그런데 '사회부'(였던) 기자가 심령 현상을 따라가면서 이야기가 확장하고, 질문은 바뀐다. '그녀는 누구인가?' 이제부터 진짜 질문에 맞춰 진짜 이야기가 펼쳐진다.
드러나는 이야기에서 작가는 현대 일본 사회의 어둠을 조명한다. 자연스럽게 이 시기 일본 사회상이 책에 그려진다. 마치 거품이 빠진 일본 사회를 반영하듯, 80년대 휘황찬란했던 카바레를 대신해 90년대부터 일본 밤 문화의 중심이 된 카바쿠라(キャバクラ, 카바레+클럽(쿠라부))가 이야기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세가의 대표 게임 시리즈인 <용과 같이>를 플레이 해 본 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오컬트가 유행하면서 일본 사회에 일었던 영매(靈媒) 역시 빠질 수 없다.
자연히 현대 일본의 어둠, 즉 여성 접대부와 야쿠자로 상징되는 일본의 밤이 이야기에 따라붙는다. 자민당(책에서는 자유민중당)의 거물 정치인과 그에게 따라붙기 마련인 부패, 정경유착상 역시 그려진다. 가부키초와 긴자로 대표되는 욕망과 웃음의 밤 문화가 사회에 뚜렷이 공존하면서도, 해당 일을 하는 '아가씨'는 낮잡아보고 천대하는 사회의 이중성을 작가는 비판한다. 심지어 마쓰다마저 취재 초기 이 같은 입장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사망한 성매매 여성의 신원을 조사하라는 말입니까? 유별난 일을 다 시키는군요."
이야기는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앞서 거론한 굵직한 두 가지의 질문 외에도 책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질문들(왜 그녀의 시신은 사건 현장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을까? 왜 살인범은 넋을 놓아버렸나?)은 단숨에 치닫는 결말에 이르러 모두 설명된다.
한편 책의 결말부에 이르면 보통의 일본 소설에서는 그려지지 않는 호쾌한(?) 장면이 연출된다. 거대 악 앞에 무력하거나 이를 인정하고 다른 길을 돌아가는 식의 이야기가 자주 그려지고는 하는데(미야베 미유키 <외딴 집>의 결말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건널목의 유령>은 조금 다른 태도를 지닌다. 일부 장면에서는 작가가 분기탱천해 글을 썼으리라 상상하게 된다.
다만 중요한 질문 하나는 끝내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에 관해 설명한다면 지나치게 앞으로 읽을 이를 배려하지 않는 자세일 것이다. 결말에 이르면 독자의 물음에 일부러 답하지 않은 작가의 태도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책은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962년 발생한 미카와시마 열차 사고다. 도쿄 미카와시마역에서 발생한 열차 탈선 사고가 대형 추돌 사고로 커졌다. 이로 인해 160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 한 명의 신원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작가는 여기서 '신원미상의 희생자'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어떤 방식으로든 희생자는 애도의 대상이 돼야 한다. 불행히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사회 구조는 애도를 잊은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
책을 덮으면 다카노 가즈아키,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역시나 그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군더더기가 없다. 올해 169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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