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미국 사모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1300억 원가량을 지급하라는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취소 소송의 승소 가능성에는 의문이 제기됐다.
18일 법무부는 "중재판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상 관할 인정 요건을 잘못 해석해 이 사건에서 '관할'을 인정"했다며 "이는 (중재지인) 영국 중재법상 정당한 취소 사유"라고 밝혔다.
법무부에 따르면 ISDS에서 '관할'은 일종의 '재판권'을 뜻한다. 즉, 한국 정부는 엘리엇의 한국 정부 제소는 애초 재판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가 엘리엇의 일부 승소 판정을 내린지 28일 만이다.
"엘리엇 韓 정부 제소는 중재재판소 관할 아냐"
법무부는 한미 FTA상 ISDS 사건 관할이 인정되려면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일 것(당국의 조치) △투자자의 투자와의 관련성이 있을 것(관련성) △조치의 책임이 국가에 귀속될 것(귀속)이라는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CA는 엘리엇의 한국 정부 제소가 관련 조건을 인정한다고 해석했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잘못된 해석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법무부는 우선 한국 상법상 '소수주주는 자신의 의결권 행사를 이유로 다른 소수주주에게 어떠한 책임도 부담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원칙이자 상식이라고 지적했다.
"삼성물산의 여러 소수주주 중 하나인 국민연금이 합병에 대한 자신의 의결권을 행사한 것이 다른 소수주주인 엘리엇의 투자에 대한 (모종의) 조치"라고 볼 수 없는데 "중재판정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엘리엇에 대한 조치(즉, 엘리엇의 투자에 관련된 조치)라고 잘못 판단"했다고 법무부는 주장했다.
이는 '관련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례라고 법무부는 밝혔다.
법무부는 또 "중재판정부가 국민연금이 한국법상 국가기관은 아니나 '사실상의 국가기관'으로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책임이 정부에 귀속된다고 판단"했으나 "'사실상의 국가기관' 개념은 한미 FTA가 예정하고 있지 않"다며 따라서 "'사실상의 국가기관'이라는 개념에 근거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당국의 조치'와 '귀속' 요건을 인정하지 못하는데 중재판정부는 인정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한 사례라고 법무부는 밝혔다.
법무부는 이어 "한미 FTA의 일방 체약국인 미국 역시 이 사건 중재판정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제출한 비분쟁당사국 의견서를 통해 '한미 FTA상 당국의 조치로 인정되는 '당국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비정부기관의 조치'는 '그 기관이 위임받은 정부적 권한의 범위를 벗어난 행위'는 포함하지 않는다고 밝혔"다며 이 역시 '당국의 조치' 및 '귀속'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국민연금은 국가기관이 아닌 만큼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한국 정부 당국의 조치'로 볼 수 없고,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의결권 행사 결과를 책임질 주체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법무부는 이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당시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이 대한민국 법원에 제기한 합병무효소송 및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한국 법원이 '위법행위가 있었더라도 국민연금은 결과적으로 독립된 의결권 행사를 한 것"으로 판단한 사실 역시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한 배경이라고 밝혔다.
법무부는 "공공기관 등이 소수주주로서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사안을 두고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은 ISDS 사건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며 "취소 소송을 제기해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향후 우리 공공기관 및 공적 기금의 의결권 행사에 대한 부당한 ISDS 제기가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강조했다.
"국제중재 판례상 중재재판소 관할 전례 있어" 반박
하지만 정부의 이 같은 입장이 유효할지에 관해서는 의문이 제기됐다.
국제통상 전문인 송기호 변호사는 법무부가 취소 소송의 골자로 잡은 "'귀속성'(인적 관할권) 논리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국가기관의 조치가 아니라는 것"이지만 "이는 관할에 대한 국제중재 판례와 거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관련해 앞서 시행된 세 가지 ISDS 사례를 제시했다.
우선 상하수도 공급 관리 회사인 CAA & Vivendi(이하 CAA)가 아르헨티나 정부를 상대로 중재를 신청한 사례를 송 변호사는 들었다. 프랑스 자본 소유인 CAA는 1995년 아르헨티나 투쿠만주 주정부와 상하수도 공급 양허 계약을 체결했으나 주정부의 비협조가 심하다며 1997년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아르헨티나 정부를 상대로 중재를 신청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해당 양허 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고 따라서 관련 분쟁은 투쿠만주 행정법원 관할이라고 주장했다. 당초 중재판정부는 이번 계약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책임이 없다고 판정했다. 그러나 특별위원회에서 결과가 뒤집어졌다. 특별위원회는 국가의 행위가 국제적으로 위법한지 여부는 국내법이 아니라 국제법에 의해 결정되므로 원 판정을 취소한다고 판시했다.
송 변호사는 이는 "연방 정부의 하부 조직(주정부) 행위가 연방 정부에 귀속되는 것은 확립된 국제법의 원칙"임을 확인한 사례라고 밝혔다. 관련해 한국 정부의 하부조직인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역시 한국 정부 책임으로 귀속되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유전 개발과 파이프라인 관리 등을 주 사업으로 하는 Kardassopoulos & Fuchs가 조지아를 상대로 제기한 ICSID 중재 신청 건도 관련 사례로 제시됐다.
각각 그리스와 이스라엘 원유 판매상인 Ioannis Kardassopoulos와 Rony Fuchs는 공동 투자회사 Tramex를 설립했다. Tramex는 조지아 국영 석유 회사인 SakNavtobi와 1992년 3월 GTI라는 원유 개발 및 수송 회사를 설립했다. 1993년 GTI가 수행할 사업 범위를 정리한 양허 증서가 채택됐다. 이 증서에서 당시 조지아 내에 이미 설치됐던 기존 시설 외 앞으로 건설할 파이프라인 사업 등에 대한 GTI의 권리 보유 여부가 쟁점이 됐다.
이 당시 조지아와 마찬가지로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인접국 아제르바이잔 역시 카스피해의 원유를 서방으로 수출하기 위해 파이프라인을 건설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따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조지아의 트빌리시(Tibilisi)를 거쳐 튀르키예 남부 항구 도시 제이한(Ceyhan)을 잇는 파이프라인 건설 사업이 시작됐다.
이 사업 주관사는 서방 거대 회사인 엑손(Exxon)과 BP, Amoco 등과 아제르바이잔 국영 석유 회사인 Socar 등이 출자해 설립한 AIOC(Azerbaijan International Operating Co.)였다. AIOC가 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해 조지아 정부와 협의에 들어갔다.
사업을 위해 조지아의 SakNavtobi는 국영 석유 회사 GIOC로 확대 개편됐다. GIOC는 1996년 조지아 정부령에 따라 조지아 내 유전 개발, 원유 수송 등에 관한 독점권을 갖게 됐다. 따라서 GTI의 양허 사업도 GIOC에게 이전되었다.
Tramex는 GTI의 파트너였던 SakNavtobi가 GIOC로 확대되고 GTI가 GIOC의 계약상 권리 의무를 승계받는 과정에서 GTI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Kardassopoulos는 2005년 8월, Fuchs는 2007년 4월 각각 ICSID 중재를 신청했다.
왜 사건 발생 후 10년이 지난 후에야 중재를 신청했는지, SakNavtobi가 행한 여러 조치 중 GTI의 이해에 반하는 조치의 책임을 조지아 정부로 귀속시킬 수 있는지, GTI의 사업 범위에 미래에 건설될 파이프라인도 들어가는지, 청구인들이 차별 대우를 받았는지 등이 주요 쟁점이었다.
중재 결과 SakNavtobi의 불법 행위는 조지아 정부 책임으로 귀속된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미래의 석유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권이 GTI에 약속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도 나왔다. 조지아 정부가 Fuchs 등에 적절한 배상을 하지도 않아 투자협정상 보장된 대우를 하지 않았다고도 판시됐다.
송 변호사는 "(SakNavtobi가) 특정 지역 산업 개발과 투자 유치라는 정부 기능을 수행했고 설립 과정에서도 관련 기능 수행에 정부 부처가 다수 관련"된 점 등을 바탕으로 해당 회사가 "조지아 정부 기관이라는 점을 일단(prima facie) 입증해 중재판정부는 청구인에 대해 인적 관할권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LG & E가 아르헨티나 정부를 상대로 경제 위기 중 아르헨티나 정부가 채택한 가스 공급 가격의 달러화 산정 및 매 6개월 조정 금지 조치가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 의무 위반, 차별 대우, 우산 조항 위반에 해당한다고 제소한 사건 역시 앞선 사례로 제시됐다.
1990년대 초 아르헨티나 정부는 도시가스 공급을 민영화해 외국인 투자 유치에 들어갔다. 이에 미국의 LG & E가 아르헨티나 3개 민영 가스공급사에 14.4~45.9%의 지분을 획득했다. 이후 2000년 초 아르헨티나가 외환 위기에 처하자 환율이 급변했다. 이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2001년 예금 인출과 해외 송금을 제한하는 비상조치를 시행했다. 2002년 1월에는 국가위기법에 따라 페소화와 달러화 태환이 정지됐다.
이에 따라 가스 공급 가격의 달러화 산정과 매 6개월 조정이 금지됐다. 그 결과 민영 가스회사의 수익이 급감했다. 지분 투자자인 LG & E의 투자 수익도 줄어들었다.
LG & E는 아르헨티나의 가스 가격 달러화 산정 및 매 6개월 가격 조정 금지 조치가 미국-아르헨티나 투자협정상 공정·공평 대우, 비차별 대우, 우산 조항을 위반하는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2002년 1월 ICSID에 중재를 신청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사건이 ICSID 관할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중재판정부는 이를 기각했다.
판정 결과 아르헨티나 정부의 공정·공평 대우, 비차별 대우 의무 위반이 인정됐다.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가 심각했으나, 국가 위기에 대응하는 조치도 FTA상 ISDS를 넘어서지 못한 사례다.
송 변호사는 "상법상 주주가 다른 주주의 주주권 행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은 엘리엇 사건에서의 청구 기각 사유이지 관할권 위반 사유는 아니"라며 법무부가 이번 소송에 나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일침했다.
18일 중 국문·영문 판정문 공개
한편 정부는 이번 취소 소송과 별개로 중재판정부의 판정문에 "명백한 계산상 오류와 불분명한 판시사항"이 있음을 확인했다며 이에 대한 정정 및 해석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중재판정부는 엘리엇 승소 판정의 이유에서 엘리엇이 입은 손해액을 산정하기 위해 삼성물산이 합병 후 엘리엇 측에 지급한 합의금을 '세전 금액'으로 공제해야 한다고 설시했으나 "실제로는 합의금의 '세후 금액'을 공제해 명백한 계산상 오류가 확인됐다"고 법무부는 밝혔다.
이 같은 계산 오류로 인해 판정문에서 한국 정부가 부담해야 할 손해배상금 원금이 실제보다 60억 원 이상 증가했다고 법무부는 밝혔다.
법무부는 아울러 중재판정부가 손해배상금 원금에 붙는 약 326억 원가량의 판정 전 이자를 '원화'로 지급해야 한다고 했으나 "판정 주문에서는 이자를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것처럼 판시했다"며 이에 관한 명확한 해석을 신청했다고 전했다.
법무부는 이번 취소 소송과 관련해 중재판정부와 협의한 결과 이날(18일) 저녁 8시경 국문과 영문으로 작성된 판정문이 PCA 홈페이지에 공개될 예정이며 법무부 역시 이를 홈페이지에 게재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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