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비판한 글을 보고 독자 두 분이 이메일로 질문을 보내주셨다. 요지는 '일본인뿐 아니라 아시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오해하고 잘못 비판하는 글'을 올린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런 물음들이 나오는 배경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한국에 나온 여러 후쿠자와 관련 책들이 후쿠자와의 '맨얼굴'보다는 '분칠을 한 얼굴'의 후쿠자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누가 '분칠'을 했는지는 이 글 밑에 살펴볼 참이다.
하급무사 아들, 칼 대신에 문필로 이름 떨쳐
오늘날 후쿠자와의 이미지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일본의 고액권인 1만 엔 지폐에 얼굴이 들어갈 정도로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는 '19세기 일본의 계몽사상가' 쯤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후쿠자와는 일찍이 개항과 개화를 외치며 게이오(慶應)대학의 기틀을 다진 교육사상가였고, 오늘날 <산케이신문>으로 명맥이 이어진 <시사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해 주필로 일하면서 문필가로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후쿠자와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이다. 후쿠자와 자신이 '탈아입구'라는 용어를 직접 쓰진 않았지만, 그가 내걸었던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문명체계를 받아들이자'는 개항·개화의 주장과 부국강병론은 19세기 후반 일왕 중심의 근대화에 나름의 사상적 기여를 한 것으로 꼽힌다. 그는 19세기 말 개화파의 중심이었던 비운의 인물 김옥균(1851-1894)과 가까이 지내며 조선의 권력투쟁과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변화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후쿠자와가 어느 정도 무게감을 지녔는가는 춘원 이광수(1892-1950)의 일화를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춘원은 '조선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되기를 바랐다. 존경하는 마음에 일본에 있는 그의 묘지를 다녀와서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여 내린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이 담긴 글을 남겼다. 안타깝게도 춘원은 그의 친일 행적으로 말미암아 (후쿠자와와는 달리) 사람들이 그가 남긴 글을 찾지 않는 존재가 됐다.
인터넷 검색창에 후쿠자와의 사진을 찾아보면, 학자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있지만 허리에 칼을 찬 모습들도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도쿠가와 막부(幕府) 시절 오사카 부근의 나카쓰번(中津藩)에 소속돼 창고 물자를 관리하는 하급 무사였다(야마다 요지 감독이 잘 만들었다고 호평을 받은 2002년도 영화 '황혼의 사무라이'의 주인공 하급 무사와 똑 같다). 후쿠자와는 사무라이의 칼 대신 문필로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서양 사정>(초편 1866, 외편 1868, 2편 1870), <학문의 권유>(1872), <문명론의 개략>(1875) 등이 후쿠자와의 이름을 당대에 널리 알린 저작들이다.
한국 업신여기며 망언 일삼은 일본인 원조(元祖)
후쿠자와의 언행을 좀 더 들여다보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매우 적대적이고 위험한 인물'임을 알아채게 된다. 그가 남긴 글들을 보면, 조선인에 대한 편견이 아주 심했다는 게 드러난다. 21세기 이 땅의 '신친일파'들이 <반일 종족주의>에서 펼치는 터무니없는 한국인 비하론을 딱 빼닮았다.
후쿠자와는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이란 전제 아래 조선인들을 마구 깎아내렸다(그가 겪은 '경험'이란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배신과 위약(違約)은 조선인들의 타고난 성질'이기 때문에 '조선인은 배신과 위약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못 박았다. 따라서 '조선인을 상대로 한 약속은 처음부터 무효라고 각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구문명 맹신자이기 때문일까, 그는 조선인이 그렇게 된 원인을 엉뚱하게도 '오래된 유교의 중독성' 탓이라 돌렸다(다카시로 코이치,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경략론 연구> 선인, 2013, 154쪽 참조).
지난주 글에서 후쿠자와가 조선을 '일개 작은 야만국'으로 못 박고 '(조선의) 학문은 보잘 것 없고 병력은 겁낼 것이 없다'고 업신여기면서, 무력으로 조선을 정벌(후쿠자와의 용어로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고 썼다. 또한 후쿠자와는 동학농민전쟁(1894) 당시 일본군에 맞섰던 조선의 농민군을 능멸하면서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고 비난했다. "조선인의 완고 무식함은 남양의 미개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도 했다. 따라서 한국을 업신여기며 망언을 일삼는 일본인의 원조(元祖)는 후쿠자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일본군을 '동양의 악귀'로 만들다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은 미개인'이란 후쿠자와의 망언이 19세기 말 한반도에 파견된 일본 군인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까. 그가 창간하고 주필을 맡았던 언론사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그런 거칠고 매몰찬 논설을 써댔으니, 일본군 지휘관들이 사병들의 정훈교육 때 활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분명한 것은 실제 전투현장에서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포로들에게 저질렀던 잔혹 행위로 미뤄, 그 무렵 일본인들은 후쿠자와와 마찬가지로 조선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을 상대로 일본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기록들은 차고 넘친다. 교토에 남아있는 거대한 귀무덤(실제로는 조선인 12만 명쯤의 코가 묻혀 있는 코무덤)이 말해주듯, 임진왜란(1592) 때에 엄청난 규모의 전쟁범죄가 저질러졌다. 일본군이 개입했기에 후쿠자와가 더욱 관심을 기울였던 동학농민전쟁 때도 잔혹한 전쟁범죄가 저질러지긴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두 역사학자가 발굴해낸 어느 일본병사의 <진중일지>를 줄여 옮겨본다.
△1895년 1월8-10일 전라도 장흥전투 뒤: "우리 부대가 서남 방면으로 추격해서 타살한 농민군이 48명, 부상한 생포자는 10명이었다. 숙사에 돌아와 생포자는 고문한 다음 불태워 죽였다"
△1895년 1월31일 전라도 해남전투 뒤: "오늘은 남은 동학당 7명을 잡아와 성 밖의 밭 가운데 일렬로 세우고 총에 검을 장착하여 모리타 일등군조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동작해서 그들을 찔러 죽였다"(1895년 1월31일 해남전투 뒤).
△나주전투 뒤(일자 불상): "나주성에 도착하니 성 남문에 가까운 작은 산에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있었다. 붙잡아 고문한 뒤에 죽인 숫자가 매일 12명 이상을 넘었다. 그곳에 시체로 버려진 농민군이 680명에 이르렀으며, 근방은 악취가 진동했다. 땅위에는 죽은 사람의 기름이 얼어붙어 마치 흰 눈이 쌓여있는 것과 같았다"(나카츠카 아키라 외,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모시는사람들, 2014, 118-119쪽).
'한국을 업신여기며 망언을 일삼는 일본인의 원조(元祖)'라 부를 만한 후쿠자와는 중국 사람들에 대해서도 멸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시사신보>에는 그런 거칠고 매몰찬 그의 논설들이 곳곳에 기록돼 있다. 중국인을 '창창 되놈' '짱꼴라'로 낮춰 불렀고, 중국인의 변발을 '돼지 꼬랑지 머리'로 조롱했다. 생포한 청나라 노(老)장군을 일본 아사쿠사 공원으로 끌어내, 나무문을 달아 입장료를 받고 구경시키자는 섬뜩한 유머를 내놓기도 했다. 적의 장군을 노리갯감으로 삼자는 얘기인데, 농담이라도 그런 말을 한 인물이 지금 일본 1만 엔 지폐에 얼굴이 들어가 있는 후쿠자와다.
후쿠자와의 교육사상을 연구해온 야스카와 주노스케(나고야대학 명예교수, 사회사상사)는 난징 학살(1937)을 비롯해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마구잡이 전쟁범죄를 저지른 배경을 거슬러 보면, 이웃 아시아 사람들을 업신여겼던 후쿠자와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일본군 병사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태연하게 중국인을 죽일 수 있는 '동양의 악귀(惡鬼)'가 된 것은 '소학교 시절부터 중국인을 짱꼴라, 돼지새끼 이하'로 여기고 '중국인은 자신의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열등민족'이라 여기게 만든-후쿠자와 유키치가 숙성시킨-아시아 멸시관 때문이라 증언하는 시각도 놓칠 수 없다"(야스카와 주노스케,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역사비평사, 2011, 17쪽).
"천황이 직접 도요토미 이래의 외전(外戰) 펼쳐야"
19세기 말 조선이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으로 몸살을 앓을 무렵부터 후쿠자와는 강력한 군사개입론을 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인 1885년 신년 논설에서 '갑신정변의 피해자는 일본이고 가해자는 중국(청)과 조선이며, 일본은 원고이고 중국과 조선은 피고'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이를 기회 삼아 대외 전쟁을 통해 일본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쿠자와는 '일국의 인심을 흥기시켜 전체를 감동시킬 수 있는 방편은 외국과의 전쟁만한 게 없다'는 위험한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조선에 무력 개입하고 내친 김에 중국 청나라 수도 북경까지 진격해야 한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일본이 목표로 하는 당면의 적은 지나(중국)이기 때문에 일본군을 파견해 경성(서울)에 주둔 중인 지나 병사를 몰살시키고, 바다와 육지로 중국을 침략해 곧바로 북경성을 함락시키자는 것이었다.
"일본이 중국을 정벌하면, 중국과 조선과 동양 전체에 대해 대일본제국의 권력이 이전보다 몇 배나 성장되었음을 보여주게 될 것이고, 구미 열강으로 하여금 우리 일본의 힘이 강대한 것을 감탄시키어 조약 개정과 치외법권의 철폐 등도 용이하게 될 것이다"(다카시로 코이치, 154쪽에서 재인용).
놀랍게도, 후쿠자와는 중국과의 전쟁(청일전쟁)이 벌어질 경우 그 전쟁의 승패가 국가 존망을 가르는 중대한 전쟁이니만큼, 일왕이 직접 나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이래의 외전(外戰)'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 이유로는 "태고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의) 삼한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왕(神功皇后)이 스스로가 병사를 데리고 친정함으로써 군대의 사기가 높아졌다"는 믿기 어려운 근거(?)를 꼽았다(다카시로 코이치, 155쪽).
그러면서 후쿠자와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군비가 필요하고, 그것을 지급하는 것은 일본 국민의 의무이기에, 지금부터 지출을 줄이고 헌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 헌금론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도 많이 들리던 얘기다. 한반도의 친일파들은 너도나도 헌금을 하며 '대동아 성전(大東亞聖戰)의 승리'를 기원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인 500만을 전라·충청·경상 3도로 보내자"
후쿠자와는 알고 보면 매우 공격적인 식민주의자였다. 그가 쓴 논설 가운데는 '일본인 500만 명을 조선으로 이주시키자'는 주장도 눈길을 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의 정치개혁이 어렵다면, 일본인을 조선 땅으로 대량 이주시켜 조선인과 잡거(雜居)하면서 일본인의 행동을 보고 차차 자기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이다.
"나의 소견에서도 현재의 조선국은 국토의 면적에 비해 인구가 희박한 것은 사실이다. 근년에 와서 우리나라(일본)의 인구 번식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그 처리문제에 당혹하고 있는 바로 이때에 500만 명의 이주민을 보내는 것은 아주 용이한 일이다. 우선 50만 명이라도, 60만 명이라도 보내는 것은 지장이 없다. 우리 정부에서는 신속히 이주의 일을 계획하고 조선 정부와 담판하여 현행 조약을 개정해야 한다"(다카시로 코이치, 330쪽에서 재인용).
후쿠자와가 얼마나 조선인을 업신여겼는지, 그리고 조선 정부를 만만하게 봤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892년 그가 '일본인 500만 조선 이주론'을 펼치며 처음에 꼽았던 지역은 상대적으로 불모지가 많다고 알려진 함경도였다. 그러나 뒤에 다시 꼽은 이주지역은 전라·충청·경상 3도였다.
척박한 땅이 많다는 함경도를 이주지로 꼽았던 후쿠자와의 초기 논설엔 그나마 '배려'의 흔적이나마 보였다. 하지만 얼마 뒤에 쓰인 논설에는 인구밀집도가 높고 비옥한 한반도 남쪽 지역으로 이주 목표지가 바뀌었다. 그곳이 조선의 곡창지대인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일본 농민들이 한반도 농업의 노른자위를 차지하도록 만들겠다는 심보였다. 이민(移民)이 아니라 식민(植民)을 뜻하는 침략 주장을 폈던 셈이다.
'허풍이라면 후쿠자와, 거짓말이라면 유키치'
이렇듯 후쿠자와는 일본을 대외 팽창과 침략전쟁 쪽으로 몰아가려는 주장을 <시사신보>에 논설 형식으로 자주 써댔다. 그런 주장 속에 한결같이 담긴 것은 조선과 중국에 대한 멸시와 편견이었다. 후쿠자와뿐 아니다.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과 중국을 바라보는 눈길이 그러했다.
이를 두고 생각이 깊었던 일부 지식인들은 '일본의 보잘 것 없는 개화에 대한 자만심'을 경계했다. "우리 일본인이 구미인에게 배운 것이 하루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조선과 중국을) 깔보는 교만심이 생겨났다"는 지적이었다(<東京横浜每日新聞> 1877년 11월10일자, 야스카와 주노스케, 218쪽). 야스카와 교수에 따르면, 당대의 일부 지식인들은 물론 정부 관리들조차 후쿠자와의 선동적이고 공격적인 언행에 대해선 비판적이었다.
"당시의 후쿠자와는 동시대인들로부터 '허풍이라면 후쿠자와, 거짓말이라면 유키치'란 조소를 받았다. (특히 일본 외무성의 한 간부로부터는) 후쿠자와의 아시아 침략의 길은 '장래에 구제받을 수 없는 재앙'을 남기게 될 것이 틀림없다는 엄중하고도 적절한-마치 1945년 패전을 예견한 듯한-비판을 받았다"(야스카와 주노스케, 7쪽).
'장래에 구제받을 수 없는 재앙'을 겪을 것이란 염려는 20세기 중반에 현실로 나타났다. 일본의 잇단 침략전쟁으로 일본 국민 310만을 포함한 2천만 명쯤이 죽었다. 그 과정에서 난징 학살(1937)과 '위안부' 성노예를 비롯한 전쟁범죄가 저질러졌고, 그 범죄의 희생자와 유족들은 지금도 진정성 담긴 사과와 그에 걸맞는 배상을 요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학계의 천황' 마루야마가 만든 신화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후쿠자와가 '시민적 자유주의 정치관을 지닌 지혜로운 계몽사상가' 쯤으로 잘못 알려진 것은 무슨 까닭인가. 글 앞에서 거듭 살펴본 책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의 저자 야스카와 교수는 후쿠자와의 맨얼굴에 분칠을 한 주요인물로 '일본정치사상사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전 도쿄대 교수, 1914-1996년)를 꼽는다.
마루야마는 도쿄대를 중심으로 '마루야마 학파'를 이룰 정도로 영향력을 지녔다. 그에게 따라다닌 별명이 '학계의 덴노(天皇)' 또는 '가미사마'(神様)였으니, 일본학계에서 지닌 무게감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도 <일본정치사상사연구> <일본의 사상> 등 그의 책이 여러 권 번역돼 있다.
마루야먀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1875년에 써낸 <문명론의 개략>을 해설한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이와나미, 1986)라는 두툼한 책을 통해 후쿠자와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했다(한국 번역본은 2007년 문학동네에서 펴냄). 서양과 일본의 문명을 비교하면서 '나라의 독립이 곧 문명이다. 문명이 아니면 독립을 보전할 수 없다'는 후쿠자와의 주장을 담은 <문명론의 개략>을 구석구석 살피면서, 마루야마는 후쿠자와를 '일본의 볼테르'로 칭송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후쿠자와의 이미지가 긍정적인 것은 '학계의 덴노(天皇)'란 권위를 지녔던 마루야마의 분칠 덕이 크다. 이른바 '후쿠자와 신화'다. 하지만 분칠을 걷어내고 후쿠자와의 맨얼굴을 보면, 평가가 달라진다. 재일동포 출신의 인권평화운동가 서승(우석대 동아시아평화연구소장)이 야스카와 교수의 책에 쓴 추천사를 참고로 읽어보자.
"후쿠자와는 이미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관련 책도 여러 권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은 대부분 후쿠자와를 메이지 유신을 이끈 위대한 사상가이자, 일본과 동아시아 근대문명의 선각자, 민주주의자로 미화하고 있다. 그것은 '정치학의 신'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세계적 석학으로 이름을 날린 마루야마 마사오의 후쿠자와론(論)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는 서슴없이 권모술수와 폭력을 조장하고 무자비한 권력정치를 주창하면서 천황제 군국주의의 길을 텄던 인물이다. 그는 동아시아에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고, 일본에게도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의 패망이라는 비극의 원인을 제공했다"(야스카와 주노스케, 339쪽).
'후쿠자와의 맨얼굴'과 '후쿠자와 신화'
1998년 나고야대학을 퇴임할 때까지 사회사상사 관점에서 후쿠자와 유키치 연구에 집중해온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2000년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한국어 번역본은 2011년)를 써낸 데 이어, 2003년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한국어 번역본은 2015년)를 냈다. 후쿠자와의 아시아인 멸시와 침략전쟁 선동을 비판한다는 점에선 같은 맥락에 있다. 두 번째 책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맨얼굴'이란 소제목이 달린 대목을 일부 옮겨본다.
"일본의 전후 사회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문·교육·정치 등을 통해 과도하게 미화되어 왔다. 자민당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일본총리)는 정치연설에서 후쿠자와의 많은 말들을 인용하여 메이지(明治) 당시의 일본인들이 '얼마나 강한 국가의식'을 지녔는지 몇 번이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더구나 마루야마 마사오를 필두로 전후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수많은 '후쿠자와 신화'를 만들어내 그를 미화했기에,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만큼 바람직한 '대표적 일본인'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연유로 1984년 쇼토쿠(聖德) 태자의 뒤를 이어 최고액권 지폐의 초상인물이 됐다"(야스카와 주노스케,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 역사비평사, 2015, 346-347쪽).
후쿠자와의 어록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 하나를 꼽자면, <학문의 권유>(1872)에 나오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교과서에도 실렸기에 일본 대학 신입생의 9할 이상이 후쿠자와가 그 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에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쿠자와의 맨얼굴은 이런 말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일본 천황제를 목숨처럼 받든 황국주의자였고, 아시아인을 멸시하며 침략전쟁을 부추겼던 선동가였다. 따라서 '하늘은 사람 위에...'는 그저 듣기에 좋은 언어의 희롱이나 다름없다. 마루야마가 비판을 받는 대목도 바로 이런 후쿠자와의 글에서 필요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골라 짜깁기로 미화했다는 점이다.
전쟁책임 지고 화해하려면 후쿠자와 재평가해야
마루야마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1986)와는 달리, 비판적인 시각에서 후쿠자와를 다룬 책이 고야스 노부쿠니(오사카대 명예교수, 일본사상사)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2005)이다. 마루야마의 책은 2007년 4월에 번역본(문학동네)이 나왔고, 고야스의 책은 같은 해 10월에 번역본(역사비평사)이 나왔다. 고야스 교수는 자신의 책 결론부분에서 "마루야마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는 후쿠자와를 위한 변명의 책이란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고 비판했다.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이 19세기의 일본인인 후쿠자와의 문제점에 관심을 둬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의 저자인 야스카와 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일본이 전쟁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아시아와 화해를 꾀하기 위해선 후쿠자와를 냉정하게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동안 일본 주류학계에서 '계몽사상가'로 미화된 후쿠자와를 놓고 학문적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 후쿠자와 비판은 일본과 아시아의 역사 화해를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으로 보인다.
한반도 침탈자의 얼굴 들어간 엔화
같은 맥락에서, 일본 1만 엔 지폐에 후쿠자와의 얼굴 초상이 있는 것도 논란거리다. 위의 야스카와 교수도 이를 불편하게 여긴다. 후쿠자와 얼굴이 들어간 것은 1984년부터였다. 2024년부터는 후쿠자와는 빠지고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1840-1931)의 얼굴이 새로 들어간다. 시부사와도 일본의 한반도 침탈과 관련이 깊다. 이번엔 후쿠자와처럼 독설과 칼로 무장한 침략이 아니라 경제침략이다.
금융전문가인 시부사와의 삶은 일본의 한반도 침탈과 궤를 같이 한다. 1878년 부산에 제일국립은행(현재 일본의 3대 은행 가운데 하나인 미즈호은행) 지점을 설립한 뒤, 금융·화폐 분야에서 일제의 침략 대리인 몫을 해냈다. 1905년 조선국고금 취급과 화폐 정리사업을 맡으면서, 제일국립은행은 한반도의 중앙은행과 같은 존재가 됐다. 일본 엔화와 등가로 유통된 조선 제일은행권에 시부사와의 얼굴이 들어간 것은 '일본 근대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그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도 일본 화폐에 얼굴을 보인 적이 있다. 1963년부터 1986년까지 사용된 1천 엔 지폐에서였다. 후쿠자와 유키치, 시부사와 에이이치, 이토 히로부미 3인 모두 일본인들이 존경해 마지않기에 화폐에 얼굴이 들어갔을 걸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들은 아시아의 공존과 평화와는 거리가 멀고, 더구나 한반도 침략과 관련이 깊다. 그런 사실이 이웃 나라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데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처럼 신사임당이나 율곡 같은 문화예술가나 학자 가운데 화폐에 얼굴을 넣을 만한 인물이 일본엔 드물기 때문일까.
"왜 강연장이 하필이면 게이오 대학인가"
이 글 앞에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게이오대학의 전신인 게이오의숙의 설립자라 했다. 지난 3월17일 윤석렬 대통령이 게이오에서 강연을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왜 하필이면 (조선과 중국 침략을 선동했던 후쿠자와가 세운) 게이오대학이냐"는 논란이 나왔다. 미국에서 같이 공부했던 일본인 후배가 그 무렵 이메일로 이런 걱정을 전해왔다. "게이오대학이 어떤 곳인지 윤대통령이 잘 모르고 간 것 아닌가요? 게이오는 일본 극우의 소굴 같은 곳인데, 분명히 뒷말이 나올 것 같아요."
실제로 뒷말이 터져 나왔다. 아무도 내다보지 못한 엉뚱한 대목에서였다. '우리의 미래를 위한 용기'라는 제목을 단 윤대통령 강연에서 인용문의 출처가 논란이 됐다. '한일 두 나라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용기'라는 말을 하려고 '용기가 생명의 열쇠'라는 문학적인 표현을 옮겼다. 문제는 옮겨온 구절이 하필이면 후쿠자와에 못지않은 조선 멸시론자이자 침략론자였던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2~1913)이 했던 말이다.
오카쿠라 "조선을 식민지화해도 침략이 아니다"
오카쿠라는 "조선을 식민지화해도 침략이 아니다"란 궤변을 펼쳤던 극우 사상가다. 일제 강점기의 어용학자들이 날조한 '유사 역사학'과 맥락을 같이하는 그의 궤변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러일전쟁(1904) 직전에 그가 미국에서 낸 <일본의 각성>(The Awakening of Japan)이란 책에 담긴 주요 내용은 이러하다.
△조선의 시조 단군이 일본의 시조 아마테라스의 아우 스사노오의 아들이며, △3세기에서 8세기까지 500년 동안 삼한 땅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따라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을 식민지로 다시 지배한다 해도 그것은 '침략'이 아니라 '역사적인 원상회복'이라는 궤변이 담겼다(오카쿠라의 책은 1905년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가 맺었던 '카스라-테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했던 미국의 정책 결정 과정에 나름의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다).
게이오대학 강연장에서 오카쿠라의 말을 윤대통령이 옮긴 것을 두고 국내에선 비판이 따랐다. 하종문(한신대, 일본근현대사)교수는 "대통령과 보좌진의 역사인식과 일본 시각의 문제점을 뚜렷이 보여준 사례"라 지적했다(하교수는 일본군 진중일지로 '위안부' 성노예의 강제동원 실체를 드러냈다. 본 연재 13 참조). 보좌진의 실수로 여기며 넘어가기엔 찜찜하다. 몰라서 실수를 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알고도 그랬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다. 오카쿠라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아는 일본 극우들은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을까.
이번 주엔 글 맨 앞에 썼듯이, 독자 두 분의 이메일 질문에 답을 하느라 후쿠자와 유키치에 집중했다. 다음 주 토요일엔 주요 일본 정치인들의 뒤틀린 역사인식과 그에 따른 망언의 문제점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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