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한국 이름은 김선자, 덴마크 이름은 안야 케어 콜드(Anja Kaer Kold)입니다.
저는 1975년 4월 생후 8개월에 덴마크로 와서 코펜하겐 공항에서 덴마크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제 입양 서류에는 제가 고아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으며, 입양 사유는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저는 미혼모가 부끄러워 버렸을까요, 아니면 부모 동의 없이 해외로 입양하기 위해 납치되거나 사기를 당한 것일까요?
저는 현재 48세입니다. 저는 겉으로는 한국인이고 내적으론 덴마크인인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 유산을 이해하는데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입양과 동시에 저는 한국인 부모, 가족, 조국, 언어, 문화,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생후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기로 홀트 입양 센터에 보내졌기 때문에 제 자신을 고아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저를 낳았을까요?
덴마크 부모님은 아마도 한국인 부모님이 가난해서 저를 키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다른 곳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라고 덴마크 부모님들이 말했습니다. 내 서류에 있는 정보는 제가 지금까지 믿어온 이 이야기들과 비교됩니다.
저는 어머니가 저를 버리게 된 이유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엄마가 된 이후 더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결코 아이들을 포기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항상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고 2018년부터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친어머니를 만나게 된다면 저는 어머니께 입양 사유가 무엇이든 용서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저를 치유하고 내면의 평화를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에게도 내면의 평화를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한국 정부가 미혼모를 보호하고 모든 한국 어머니가 건강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보장하기를 바랍니다.
2022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KRG)의 요청으로 해외입양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저는 덴마크의 333명 입양인들과 함께 진실화해위에 제 사건에 대한 조사 요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우리는 입양과 관련된 진실과 정보에 대한 알 권리를 위해 싸웁니다. 변호사인 저는 DKRG에서 제 법률 지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DKRG가 역사를 바꾸는데 기여하고 향후 입양은 합법적이고 투명한 과정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과거 친부모의 동의 부재, 조직적으로 한국 아동을 해외입양으로 보내진 사실 , 입양과 관련된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음으로써 인권을 유린하는 일 등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유가 배경에 깔린 산업화된 입양을 보여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와 자녀가 강제로 분리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불행하게도 덴마크 국제입양(DIA)과 홀트에서 작성한 입양 서류에 제가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 친부모의 입양 동의 등 정보가 누락됐습니다. 제 서류에는 저는 심장에 결함이 있는 아기였습니다. 홀트는 어떻게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기를 그렇게 긴 여행을 보낼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를 잘 보살펴주신 덴마크 부모님은 덴마크와 한국의 입양기관과 당국이 관련된 규칙을 잘 준수하고 아동의 이익을 고려한다고 믿었습니다.
저는 덴마크 정부가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웨덴과 마찬가지로 유엔의 권고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덴마크가 입양과 관련한 우리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2003년과 2011년에 아들 매스(Mads)와 딸 소피(Sophine)를 낳았습니다. 아이들의 눈에서 나 자신을 볼 수 있고 나와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처음으로 내면의 평화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2015년 덴마크 부모님, 두 아이와 함께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제가 태어난 나라를 방문해 문화, 음식, 언어, 그리고 저와 닮았지만 여전히 다른 한국인들을 만난 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홀트를 방문했는데 불행히도 제 서류와 파일에 새로운 정보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덴마크로 돌아가기 전까지 저는 밤마다 슬픔에 잠겼습니다. 한국에 내 일부를 두고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동시에 만나지 못한 한국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언젠가는, 너무 늦게 전에 저와 제 아이들이 한국의 가족을 만날 수 있기를 여전히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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