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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 교과서는 어느 나라 교과서인가요?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21] 누구를 위한 '역사전쟁'인가 (下⑥)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대사건들을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교과서에 제대로 잘 담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글을 쓰는 이의 잣대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35년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제주4.3(1948), 6.25전쟁(1950), 4.19혁명(1960), 5.16군사정변(1961), 5.18민주화운동(1980), 6월민주항쟁(1987) 등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학문적 엄밀성과 더불어 건강한 비판의식이 요구된다. 현실에선 말처럼 쉽지 않기에 교과서 내용을 둘러싼 논란이 일어나곤 한다.

한국에서는 8.15 해방 뒤 1974년까지 초등은 국정, 중등은 검정 교과서를 썼다. 박정희의 유신독재(1973년)가 시작된 다음 해인 1974년부터는 모든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만들었다.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교육과정을 장악하고 통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국정 교과서 체제는 2002년까지 28년 동안 이어졌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검정제로 고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나왔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부터는 모든 중·고교 역사교과서는 검정으로 바뀌었고,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한국형 뉴라이트, 신우익인가 극우인가

2000년대 접어들어 한국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이 일어났다. 기억에도 새로운 교학사 파동이다. 이 논란의 중심에는 뉴라이트가 있다. 서구 사회에선 뉴라이트를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결합된 이념이라 말한다. 뿌리를 거슬러보면, 1980년대 영국의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총리나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정책도 뉴라이트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다고 얘기된다.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북한의 어려움을 목격하면서, 이념적 지형에 큰 충격을 받았던 한국 사회에선 뉴라이트가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한국형 뉴라이트'다. 뉴라이트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신우익'이지만, '한국형 뉴라이트'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사실상 '극우'에 가깝다. 특이한 것은 '타자'에 배타적인 다른 나라들의 극우와는 달리, 옛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일본에 대해선 유달리 너그럽다는 점이다. 바로 그렇기에 정치인 홍준표처럼 자신을 '합리적 보수 우익'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심기마저 불편하게 만든다.

'한국형 뉴라이트'는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을 최우선으로 삼되, 오늘날 한국경제의 성장은 지난날 일제 강점기의 한반도 통치 덕분이라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굳게 믿는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 이영훈(전 서울대교수, 경제사) 같은 이들이 '한국형 뉴라이트'의 중심인물이다. 문제는 이들이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도 영향을 미치려 나섰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2013년 교학사 파동이 일어났다.

그해 8월 문교부의 최종 검정을 통과한 고교용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8종이었다. 뉴라이트 계열 연구자들이 집필한 교학사 1종만이 유달리 친일·반공·독재 미화의 시각이 너무 넘쳐나 논란이 됐다. 뉴라이트는 교학사 교과서를 옹호하면서 나머지 7종 교과서가 '반일·친북·좌편향'이라고 주장했다. 세계화 시대를 살면서 한국 교과서들에는 민족주의 감정을 지나치게 담겨져 있다고도 했다. 그러니 (일본의 극우파들도 애용하는 용어인) '자유주의사관'에 따라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친일파에 면죄부, 훈장을 주자고?

뉴라이트는 '교과서를 반일의 시각에서 쓰는 것은 좌편향'이라 주장했다. 8.15 해방 직후에 반민족행위자로 몰린 친일파들이 살아남으려고 내걸었던 '친일=반공=애국, 반일=용공=매국'이란 구시대의 낡은 흑백 논리를 21세기에 뉴라이트가 되살린 모습이었다. 다른 7종의 교과서에 견주어 친일문제의 실상을 적게 다룬 교학사 교과서의 서술 내용은 큰 논란을 불렀다. 이와 관련한 김정인(춘천교육대, 역사교육)교수의 글.

[그나마 (교학사 교과서가 친일문제를) 다룬 경우에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역사학계는 지적한다. 교과서 곳곳에서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친일파와 후손이나 추종세력이 내놓은 각종 '친일의 변'을 동원해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고, 더 나아가 현양(顯揚)해야 한다고 강변한다는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에는 일제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일제에 협력했다는 '친일공범론'도 등장한다](김정인,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책세상, 2016, 134-135쪽).

위에서 '친일의 변'이란 '일제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력했을 뿐, 스스로 나서서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투의 변명을 가리킨다. 육당 최남선(1890-1957)과 춘원 이광수(1892-1950)가 그랬다. 8.15 뒤 '민족반역자 처단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반민특위(反民特委)로 끌려갈 무렵 최남선은 <자열서(自列書)>에서, 이광수는 <나의 고백>에서 똑같이 '부득이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청년들에게 학병을 권했던 까닭은 '학병을 나가지 않으면 학병을 나가서 받는 것 이상의 고생을 할 것 같기에' 그랬다고 했다. 그런 변명은 지금 다시 들어도 민망할 뿐이다.

교학사 교과서에서 친일파를 '현양해야 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사람은 누구에게나 공과가 있기 마련이고, 친일을 했던 사람들은 '과'뿐만 아니라 '공'도 있다. '공'이 있다면 친일은 덮고 잘한 일에 훈장이든 포상이든 주어져야 한다는 궤변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뼛속 깊이 친일파' 매국노도 그들 나름의 공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훈장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교과서를 읽는 학생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 주장과 닮은 '친일공범론'

'친일공범론'도 참 한심스런 발상이다. 일제의 지배를 견뎌내느라 크든 작든 협력을 했다는 전제 아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친일파란 얘기인가. 이는 1945년 일본에서 누가 패전·전쟁범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관심이 쏠려 있을 때 나왔던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 주장을 떠올린다.

메이지 일왕의 사위이자 8.15 패전 직후인 1945년 8월17일부터 2개월 남짓 총리대신을 지낸 히가시쿠니 나루히코(1887-1990)를 비롯한 히로히토 측근들은 염치없게도 이런 궤변을 슬며시 꺼내들었다. "일본인들은 군부와 공무원, 민간인들 모두가 패전 책임이 있으니 집단적으로 철저한 반성과 참회를 해야 한다." 패전 뒤의 일본 상황을 다룬 역작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존 다우어(MIT 명예교수, 역사학)의 책에서 관련 대목을 옮겨본다.

[(일억총참회론은) 군부와 민간 관료들이 (패전) 2주 전부터 문제가 될 만한 문서들을 파기해온 시점에서 나온 발언이었기에 일종의 악랄한 진실을 담고 있었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고, 또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억총참회론을 가리켜) 위험한 상황에 처한 오징어가 먹물을 뿌리는 행동에 비유했다. 한 분노한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전혀 개입한 적이 없는 일에 참회할 필요는 없다. 참회는 국민을 배신하고 속인 자들에게나 필요하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민음사, 2009, 647쪽).

일억총참회론은 패전·전쟁범죄에 사실상 가장 큰 책임을 져야 마땅한 일왕 히로히토를 지켜줄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교학사 교과서에 나오는 '친일공범론'도 친일파들을 두둔하고 면죄부를 주려는 위험한 논리다. 춘원 이광수는 <나의 고백>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세금을 바치고, 법률을 지키고, 관공립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한 것이 모두 일본에의 협력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도 협력이다." 일제에 빌붙어 살던 친일파들과 실제로 친일의 책임을 나눈다면, 먼 앞날에 어느 누가 독립투쟁이란 고난의 길로 선뜻 들어설 것인가. '친일공범론'은 역사교과서를 통해 미래세대에게 전할 교육적 메시지와는 거리가 멀다.

"이 교과서는 어느 나라 교과서인가요?"

또한 교학사 교과서는 내용 곳곳에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를테면, 일제의 35년 지배가 조선에 철도와 학교 등이 많이 세워지는 변화를 이뤘다면서 일제 식민 통치의 외형을 그럴 듯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문제는 일제가 어떤 목적으로 그런 정책을 폈는가를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철도를 놓았다면, 그것이 효율적 수탈을 노린 것은 아니었는가에 대한 점검이 없었다. 학문적 실증주의를 내세우며 조선총독부에서 발표한 통계와 관련내용을 대변인처럼 그대로 옮겨 놓은 한국사 교과서를 제대로 된 역사교과서라 말하기 어렵다. 통계 속의 감춰진 압제와 수탈의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물음이 절로 나오기 마련이다. "이 교과서는 어느 나라 교과서인가요?"

교학사 교과서의 또 다른 특징은 민주주의와 인권, 민족화합의 중요성을 말하기보다 극단적인 반공이념을 지나치게 내세웠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1948년 8.15 정부수립 뒤 제헌국회가 만든 반민족행위자처벌법에 따라 친일파 청산을 밀어붙였을 때 친일 경찰이 반발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이를 두고 교학사 교과서는 '공산세력을 막기 위해서였다'며 반공 프레임을 내세웠다. 박정희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근본을 무너뜨리고 장기독재로 나아가려고 꾀했던 '10월유신'(1972년)의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선 '북한의 끊임없는 남한 공산주의화 시도를 막기 위해서였다'며 긍정적으로 보는 듯이 썼다.

"저걸로 수능시험 치렀다간 우리 아이 대학 못 가"

교학사 교과서는 위에서 살펴본 친일 편향성은 둘째 치고, 전체적으로 곳곳에서 부실투성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학생들이 배울 교과서로는 한 마디로 '함량 미달'이었다. 제대로 검정을 받는다면 마땅히 탈락할 교과서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검정 통과' 쪽으로 밀어붙였다. 부실 투성이였던 일본의 후소샤(扶桑社) 교과서를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관들이 눈감아주고 넘어간 것과 똑같다.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의 비판을 들어보자.

[교학사 교과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 과정에서 다른 교과서에 비해 2~3배의 오류를 지적당했다.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검정을 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국사편찬위원회가 '봐주기' 검정을 함으로써 교과서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잡서(雜書)가 검정을 통과할 수 있었다. 당연히 검정을 통과한 뒤에도 수백 개의 오류, 그것도 단순한 오류가 아닌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되었다. 그러니 도저히 교육 현장에서 쓸 수 없는 '쓰레기 교과서'라는 비난이 쏟아졌다.](이준식,「한국 역사교과서인가, 아니면 일본 역사교과서인가?」역사비평 105, 역사비평사 2013, 55-56쪽).

뉴라이트 연구자들은 '다른 역사 교과서들을 친북 좌편향 성향이라 아이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품게 한다'고 색깔논쟁을 지피며 교학사 교과서를 응원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비판적 연구자들로부터 '함량 미달'이라는 지적을 받던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사실상의 평가는 교육 현장에서 판가름 났다. 그 누구보다 학부형들로부터 외면받았다. 강남 대치동 학원가 주변 카페에선 '저 교학사 교과서를 갖고 수능시험을 치렀다간 우리 아이 대학 못 가겠다'는 말들이 나돌았다.

그 무렵 한국사는 수능 필수과목이었다. 채택 결과는? 일본 후소샤 교과서처럼 참패였다. 교학사 교과서의 채택률을 0.042%였다. 2013년 기준 전국의 고교는 모두 2370곳이었는데, 1개 고교(경북 청송여고)에서 교학사 교과서를 쓰겠다고 나섰을 뿐이다. 후소샤 교과서 채택률이 2001년 첫해 0.039%에 그친 것과 닮은꼴이다. 교학사에 전화해보니, 그 다음해부터 역사교과서 사업을 아예 접고 음악·미술 등 예능 교과서에 집중해왔다고 한다.

일본을 빼닮은 교과서 파동 과정

여기서 생각해볼 점. 한국 교학사와 일본 후소샤의 역사 교과서가 퇴출당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역사의 진실보다는 특정 보수 집단의 이념이나 이해관계를 앞세운 것이 가장 큰 실패 요인으로 꼽힌다. 민족 화해와 평화통일을 바라는 건강한 민족의식을 친북 또는 좌편향이라 몰아세우는 교학사의 시각이나, 일본의 전쟁범죄를 미화·왜곡·부인하는 후소샤의 시각은 학문적 엄밀성이란 잣대로 볼 때 수준 이하였다. 공교육 현장에서 통하기 어려운 흑백 논리로 학생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주입시키는 악서(惡書)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했다. 이 연재에서 줄곧 비판을 해온 <반일 민족주의>가 악서인 것과 마찬가지다.

교학사 교과서 사태와 일본의 후소샤 교과서 사태가 일어난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면 판박이처럼 닮았다. 지난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일본 후소샤 교과서를 만든 것은 일본 극우파 조직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었다. '새역모'는 새 교과서를 내기 2년 앞서인 1999년 <국민의 역사>(國民の歷史)라는 일종의 '대안 교과서' 흉내를 내면서 과거사 왜곡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를 바탕으로 새역모가 낸 것이 2001년 후소샤판 중학생용 <새로운 역사교과서>(新しい歷史敎科書)였다.

'한국판 새역모'는 뉴라이트 연구자들이 만든 '교과서포럼'(2005년 출범)이다. 2019년 강의실에서 "위안부는 매춘, 궁금하면 한번 해볼래요?"라는 말로 파문을 일으켰던 류석춘(당시 연세대교수, 사회학)과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 이영훈(당시 서울대교수, 경제사) 등이 만든 단체다. 포럼 출범 첫해에 펴낸 책이 <한국현대사의 허구와 진실>이다.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를 비판한다'는 부제를 단 이 책 맨 뒤에 붙은 '창립선언문'을 보면, 무엇을 바라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중고등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역사교과서를 보면, 있어야 할 것이 빠져있다. 독재와 억압, 자본주의의 참담한 모순만이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미래세대는 언제까지 주홍글씨가 쓰인 옷을 입고 다녀야 할 것인가. 죄 많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근거 없는 원죄의식이 불식될 때까지 교과서포럼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교과서포럼, <한국현대사의 허구와 진실> 두레시대, 2005, 220쪽).

위의 문장을 요약하자면, 기존의 교과서들은 경제발전이란 밝은 쪽을 소홀히 다루고 비민주적 정치상황과 부의 불평등이란 어두운 측면을 강조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주홍글씨'와 '원죄의식'이란 얼핏 문학적이고 종교적인 용어를 동원한다. 한국의 미래세대에게 이른바 자학(自虐)사관을 가르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마치 <국민의 역사>를 쓴 니시오 간지를 비롯한 일본 극우파들이 "미래세대에게 죄의식을 물려줄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을 떠올린다.

이 책의 핵심내용 가운데 하나는 <반일 종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승만 띄우기'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혜안' 또는 '예지의 결실'이라 찬양한다. 이승만의 단정 구상을 가리켜 '영원한 단정이 아니라 통일 준비를 위한 단정(單政)이 우선이었다'는 대목도 보인다. 이렇듯 서술에서 억지와 논리적 비약이 많은 탓이었을까, 독자들이 외면했고 책 판매는 초판에서 끝나고 절판됐다.

'민족' 역사관 없는 '우편향' 대안 교과서

'교과서포럼'에서 나름으로 역사교과서의 틀을 갖춰 펴낸 것이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기파랑, 2008)이다. 책의 기본 흐름은 2013년에 나온 교학사 교과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의 특징이라면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버렸다는 점이다. '민족' 대신에 '한국인'을 역사적 행위의 주체로 내세운다. 이영훈이 <반일 종족주의>의 독도 편에서 일본 쪽 주장을 거들면서 '세계인'을 내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연재 17회 참조). 민족을 과도하게 내세워 극단적인 국수주의 쪽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고 당연히 피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 '민족'을 지움으로써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다주는 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육논리인가 묻고 싶다.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로부터 혹평이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사실 관계의 잘못', '앞뒤가 맞지 않는 비문', '현행교과서의 우편향 수정'이란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인 윤대원(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은 이 책에서 내세우는 주장이 '우리 국민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지식인 집단이자 역사교과서 왜곡의 선봉장인 새역모와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윤대원, <21세기 한중일역사전쟁> 서해문집, 2009, 126쪽 참조).

▲  '쓰레기통'에 들어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연합뉴스

"日후소샤보다 더 노골적으로 친일파 옹호"

교과서포럼을 중심으로 2011년 만들어진 단체가 '한국현대사학회'다. 이 학회 연구자들이 중심이 돼 2년 뒤 문제의 교학사 교과서를 펴냈다. 여기엔 권희영(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 한국근현대사)이 중심 필자로 참여했다. 그는 '한국사회가 지나치게 친일-반일의 구도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했다. 8.15 뒤의 독재나 정경유착 등에 대한 비판을 '좌편향'이라 지적하기도 했다.

권희영은 서울대 국사학과 학생 시절엔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 이영훈과 마찬가지로) 변혁을 꿈꾸던 진보적 청년이었다. 하지만 일찍이 뉴라이트 쪽으로 돌아섰다. (성실한 모범생이던 권희영의 1970년대 학생시절을 기억하는 필자로선 그의 학문적 에너지가 다른 쪽으로 더 유용하게 쓰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이는 이영훈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가 중심이 돼 만든 교학사 교과서가 일본 '새역모'의 후소샤 교과서보다 더 노골적으로 친일파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한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의 글.

[(교학사와 후소샤) 교과서에서 일제 강점기를 서술할 때는 용어도 내용도 거의 비슷하다. 적어도 일제강점기에 관한 한 일본 극우의 입장을 대변하는 후소샤 교과서와 한국 극우의 입장을 대변하는 교학사 교과서는 쌍둥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무방할 정도로 닮아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뒤에 나온 교학사 교과서가 후소샤 교과서보다 더 노골적으로 일제 식민 통치를 미화하고 친일파를 옹호한다](이준식, 62쪽).

2001년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나왔을 때 많은 비평가들은 그 안에 담긴 극우적 역사왜곡을 보면서 '위험한 교과서'라는 별명이 붙였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정당하고 합법적이며 전쟁범죄를 부인 또는 축소함으로써 일본의 미래 세대에게 비뚤어진 역사의식을 심어줄 것이란 점에서 '위험'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준식은 '후소샤 교과서보다 더 위험한 교과서'인 교학사 교과서가 대한민국에서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는 거듭 묻는다. "한국 역사교과서인가, 아니면 일본 역사교과서인가?"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국정화 물거품

문제의 교학사 교과서가 이념 편향과 부실 논란 속에 일선 학교와 학부모들의 차가운 반응으로 사실상 퇴출되자, 2015년 박근혜 정부는 다른 방안을 밀어붙였다. 교과서 국정화다. 노골적으로 밀었던 교학사 교과서가 일선 학교에서 버림 받은 뒤,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 교과서를 아예 국정으로 바꾸려 했다. '제2의 교학사 교과서'를 국정교과서 형태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 참고로, 이를 비판하는 공립 고등학교 교사가 쓴 글을 옮겨본다.

[교학사 교과서의 '자유민주주의'는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나 반공을 중심에 두고 체제, 국가 중심의 서사를 만들어간다. 이 속에서 북은 적대적 대상이고 과거 권위주의 정부가 민주화운동을 억압한 사실은 희석된다. 그 틈에 현대사 교육은 퇴행과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 퇴출 뒤) 정부는 국정제를 통해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확대하려는 의도마저 보인다](강화정, 「교학사 한국사교과서의 현대사 서술과 민주주의 교육」<역사교육연구> 20, 2015).

하지만 2017년 들어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없던 일이 됐다. 국정교과서랍시고 문교부가 내놓은 역사책이 오류투성이로 드러나고, 국정교과서 사용을 위한 연구학교 신청도 거의 없었다. 제2의 교학사 사태가 일어날 뻔한 상황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져, 국정화는 폐기됐다. 만에 하나 촛불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국정교과서를 둘러싸고 소모적인 논쟁이 이어졌을 것이다.

2022년 출범한 지금 정부에서 국정화 추진 가능성은 없을까. 지난 2월 대통령실 교육비서관에 임명된 오석환 전 교육부 기획조정실장은 2015년 '국정화 비밀 티에프(TF)' 실무 책임자였다. 교육부 안에 국정화 관련 역사교육지원팀이 있었음에도, 20명 넘는 비선을 따로 꾸린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빚었다. 오석환 교육비서관의 전임인 권성연 교원소청심사위원장은 교육부 역사교육지원팀장 출신이다. 앞으로 정부의 어디선가에서 국정화 카드를 만지작거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하긴 아직 이르다.

누가 '자학사관'을 지녔는가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한국형 뉴라이트' 지식인들과 손잡은 '신친일파'는 다른 한국사 교과서들을 공격할 때엔 좌편향 비판과 더불어 '자학사관' 논리를 내세운다. 자학사관을 공격무기로 쓰는 원조(元祖)는 이미 살펴보았듯 '새역모'를 비롯한 일본 극우다. 한국의 '신친일파'는 일제 식민지 통치가 근대화를 가져온 밑거름이 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민족사관을 가리켜 '자학사관'이라 비난한다.

이들의 머릿속에 그리는 역사는 항일독립투쟁의 역사가 아니다. 일본 식민통치 덕분으로 이룩한 근대화의 역사다. 이들이 그리는 현대사는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화해의 역사가 아니다.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추진과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옹호하고 북한과의 대화를 부정하는 역사다. 그런 역사해석이 옳지 않다고 비판한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한다'며 또 다시 '자학사관'이란 낙인을 찍으려든다.

거꾸로, 이들 '신친일파'도 한국을 비하하는 '자학사관'을 지녔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강수(대구가톨릭대, 부동산경제학)교수는 '한국을 혐오하고 일본에게 너그러운' <반일 종족주의> 필자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도 감히 펼치지 못한 '극단적인 자학사관'을 지녔고 '혐한(嫌韓) 종족주의'에 빠져있다고 지적했다(본 연재 14 참조).

요점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억압·수탈하며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고, △8.15 뒤 민주주의를 훼손했던 권위주의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북한을 무조건 적대세력으로 밀치기보다는 '민족의 반쪽'으로 품어 안고 평화적 통일을 앞당기려 노력하는, 이 세 가지 내용을 교과서에 담는 것은 우리의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듯하다. '한국형 뉴라이트'가 말하듯이 한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자학'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정체성을 인권과 평화 쪽으로 제대로 가다듬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당신들은 누구를 위해 역사전쟁을 벌이는가?"

일본은 전쟁범죄를 부인하거나 대충 얼버무리고는 배상은 못하겠다고 한다. 한국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상을 요구한다. 서로의 시각이 다르니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조차 '위안부는 매춘'이라며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하는 망언(妄言)들이 잊을 만하면 튀어나온다. 다음 주 글에서는 나라 안팎에서 이어져온 망언의 문제점과 그 배경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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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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