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로 합시다." 이런 말, 한 번쯤 해보거나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대개 억울한 일, 분쟁, 다툼,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대화나 조정이 잘 이루어지면 좋을 텐데, 흔히 실패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결국 사법적 해결에 의존하게 됩니다.
사회적인 갈등을 다루는 일은 정치의 본질적 역할 중 하나입니다.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라는 미국의 정치학자는 갈등을 사회화하고, 대중이 갈등의 확산에 참여하는 방식을 조직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갈등의 범위가 확대될수록 다양한 사람들이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갈등은 당연히 나쁜 것, 당장 해소해야 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좀 의외죠? 사회적 갈등을 다룬다는 면에서, 독자 여러분은 우리 정치가 유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라는 대답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 같네요.)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유능한 정치'란 어떤 걸까요?
제 관점으로는, 유능한 정치는 갈등을 포함한 사회적 문제를 효과적이고 능숙하게 관리해 정책과 결정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기능하는 것입니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가능한 해결책과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 이게 정치의 유능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들이 이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한다면, 여야가 싸움에만 몰두한다면, 정당이 양 극단 지지층의 이해 대변에만 매몰된다면, 정치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입니다.
정치의 사법화란 국가의 주요 정책이나 과제를 정치의 영역이 아닌 사법 과정을 통해 결정하거나 해결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 중심에는 1987년 개정헌법에 따라 설립된 헌법재판소가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지금과 같은 위상을 확보한 결정적 계기는 2004년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소추 및 심판 사건입니다. 기억하다시피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의결서를 접수한 헌법재판소가 기각 결정을 내렸고, 노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했습니다.
행정수도 이전 헌법소원 사건도 같은 정부 시기에 있었습니다. 2003년 국회를 통과한 '신(新)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법률의 효력이 상실됐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전대미문의 '관습 헌법'이 근거였습니다.
이 외에도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등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결정됐습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이른바 검수완박법)에 대해 한동훈 법무부 장관 등이 제기한 권한쟁의 심판 각하 결정도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헌법재판을 담당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독립된 헌법재판소가 존재하는 나라(집중형. centralized model)도 있고, 미국처럼 일반 법원에서 헌법재판 기능을 담당하는 사례(분산형. diffused model)도 있습니다.
미국은 연방대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맡고 있는데, 낙태(Roe v. Wade), 동성 결혼(Obergefell v. Hodges), 선거·정치자금(Citizens United v. Federal)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쟁점들에 대한 판결을 통해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처럼 '정치의 사법화'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법의 논리에 따라 갈등 상황을 다루는 과정에서, 법치주의 강화라든가 개인 또는 소수자의 권리 보호와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의 사법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민주주의의 문제입니다. 샤츠슈나이더의 주장대로 갈등의 사회화와 대중의 참여 조직이 민주주의 정치의 역할이라면, 법의 판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민주적 절차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사법)이 선출된 대표(정치)의 권한을 넘어서게 되면 국민주권의 원칙(우리 헌법 1조 2항)은 훼손될 것입니다.
둘째, 정치적 책임의 약화입니다. 협상, 조정, 타협, 합의가 실종된 무능한 정치는 법 뒤로 숨습니다. 그리고 결정의 권한을 사법 시스템에 내어주죠. 그러면 결과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심화 된다면 정치는 왜 존재해야 하는 걸까요?
셋째, '사법의 정치화'입니다. 법은 완벽할까요? 중립적일까요? 1995년 1월 20일, 헌법재판소는 전두환 전 대통령 등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헌법소원에 대해 '공소시효 만료로 다룰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손을 들어준 결과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헌법재판소는 5.18 특별법에 관한 위헌법률심판에서 합헌 판결을 하며 12.12 군사 쿠데타의 공소시효 유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결정문을 확정한 사람들은 모두 전과 같은 재판관들이었다고 합니다.
바뀐 건 법의 논리가 아닐 겁니다. 시대의 흐름, 대중의 인식 변화 등이 법의 '해석'을 달리하게 된 힘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정권교체 등으로 권력이 이동하면서 법의 잣대가 달라지는 상황도 종종 보게 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꼬박 1년이 지났습니다. 헌법재판소 차원을 넘어서 법원과 검찰로 확대되고 있는 정치의 사법화, 그리고 사법의 정치화가 맞물리는 지금의 현실이 우려스럽습니다.
주역의 괘를 읽을 때는 정(正)과 중(中)을 따진다고 합니다. 정(正)은 괘의 올바름, 중(中)은 전체 배열 속 행위자(actor)의 자리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를 빗대어보자면 사법은 정(正)을, 정치는 중(中)을 맡고 있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도(正道)와 중도(中道)가 일치하는 것을 중정(中正)이라고 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만약 둘이 어긋난다면 중도를 따르는 것이 괘를 읽는 방법이라는 것이 사회학자 김종엽 교수의 해석입니다. "'올바름'보다 '상황의 합당함'과 '때의 마땅함'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 '법대로 하자'는 건, 적어도 정치가 주장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토론과 협의의 과정이 시끄럽고,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우리가 좀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민주주의 정치가 그렇게 작동하는 체제라는 걸 이해한다면, 유능한 정치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삶을 나아지게 할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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