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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여성 입양인의 덴마크에서의 삶 "항상 깊은 슬픔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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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여성 입양인의 덴마크에서의 삶 "항상 깊은 슬픔이 있었습니다"

[372명 해외입양인들의 진실 찾기] (25) 입양인들도 동등한 권리가 있습니다

제 이름은 니아 경자 리 고 토프타거(Nia Kyeong Ja Lee Koh Toftager)이고, 저는 4살 때 덴마크 가정에 입양돼, 현재는 덴마크인 남편, 아들(21), 딸(12)과 함께 덴마크에 살고 있습니다. 다른 많은 입양인들처럼, 제 이름은 입양되기 전 한국 이름과 입양된 가족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 합쳐진 독특한 조합입니다. 제 삶에 대해 짧은 전기를 쓰는 것은 큰 도전이었습니다. 입양인이 된다는 것은 여러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고, 어떤 세부사항을 포함해야 하는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마도 1968년 5월에 태어났으니 올해로 55세가 될 것이고,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제 삶에 관한 질문들은 입양기관에 몇차례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중 많은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그 가능성이 줄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내가 아는 한 가지는 항상 제 안에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그리움과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4명의 자녀를 둔 덴마크의 한 가족에게 보내졌는데, 그들은 저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입양할 진심 어린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제 입양 가족으로 승인 받았던 가족이 입양을 포기하자, 이 가족은 저를 입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항상 양부모님은 제가 처음 입양되기로 했던 가족이 제 장애로 인해 마음이 바뀌었다며, 자신들에게 받아 들여진 것에 대해 행복하고 감사해야 하며 가능한 빨리 적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몇 년 동안 여러 병원과 훈련 시설에 위탁됐습니다. 거기서 보내야 했던 수많은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기억합니다. 어떤 아이들도 이렇게 혼자 남겨져서는 안 되며, 특히 명절이나 생일과 같은 특별한 시간에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저는 입양가족이 선택한 이 육아 방식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뇌성마비는 심각한 장애입니다. 어렸을 때 제 다리는 꼬여 있었고, 왼쪽은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현재 저는 약간의 도움으로 걸을 수 있지만, 더 먼 거리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녀야 합니다.

장애를 가진 한국인 여성으로 덴마크로 입양된 것은 내가 원하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던 방식으로 나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저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십대들 중 한 명이었고, 16살이 되었을 때 입양된 가족들에게 떨어져 지내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당시 미성년자(알고 보니 여전히 한국 시민)였던 저는 법적 보호자를 구해야 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제 나이 많은 여자 친구 중 한 명은 곁에 아무도 없던 그 시기에 도움과 편의를 줬고, 저는 1년 후 첫 집을 얻을 때까지 그녀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 시기는 제게 격동의 세월이었고,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양부모의 집에서 나와 아파트로 이사한 후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교육을 마치고 전시회도 몇 번 가졌지만, 이 직업은 내게 맞지 않았습니다. 대신 저는 한 식당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고, 곧 요리에 대한 열정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음식을 좋아합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즐기는 것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입니다. 한국 음식은 오랫동안 우리 집에서 환영받았고, 저는 한국 음식에 전적으로 전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30년간 다양한 종류의 김치를 만들어 왔으며,  10년간 덴마크 사회에서 발효의 독특한 특성에 대한 이해를 더욱 적극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덴마크도 음식을 발효시키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 방법과 특색을 일부 잊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제 경험은 너무 달랐습니다.

저는 2019년 내가 처음 한국, 서울에 돌아왔을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내가 서울 혹은 인천 출신이 아니어도,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저는 제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 당시 제가 가졌던 감정을 "이상하다"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절제된 표현일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울 뻔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덴마크 친구들과 달리 저는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제게 늘 솔직했던 양부모님은 휴가에 장애인 저를 데려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귀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국적이고 흥미로운 곳을 방문할 때 저는 병원에 있거나 간병인과 함께 해야 했습니다.

저는 휠체어 사용자가 한국을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 힘들 것이란 말을 반복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십년 동안 한국 여행을 망설였지만, 오십이 되는 해에 한번 해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2019년에 내린 결정은 옳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스스로 치유되고 성취감을 주는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간 이유 중 하나는 입양기관을 방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회복지사는 정말 친절해 보였지만, 그녀는 제게 답보다 더 많은 질문을 남겼습니다.

저는 여행 전에 입양기관에 입양서류 검토를 신청했는데 도착했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 입양된 다른 친구들과 달리 사회복지사는 많은 서류를 보여주었지만, 많은 부분이 비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기밀 문서도 50년이 지나면 기밀이 해제되지만, 여기서 저는 제 자신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했을까요?

좀더 공정하게 말하자면, 새로운 정보를 얻기는 했었습니다. 양부모님의 말씀과는 달리 저는 부산 출신이 아니었고 고아원까지 따라온 노인 아줌마도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제주라는 마법의 장소에서 왔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 나머지는 입양기관에서 비밀로 했습니다.

저는 가능한 빨리 한국을 다시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제약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덴마크에 갇혀 있는 동안 진실을 알 권리를 추구하는 동료 입양인들의 집단적인 노력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입양 관련 배경 정보가 없거나, 거의 없거나, 조작된 채로 입양되었고 그로 인해 가족, 국가, 언어 및 문화와의 분리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통 받아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작들을 누구보다 환영했고 2022년 다시 사랑하는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습니다. 나는 인생에 대해 현실적이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뇌성마비 환자의 기대 수명은 노화의 사치를 거의 허용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훌륭하지만, 가장 큰 실망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제 희망은 평생 한번 제 출생지를 다시 보는 것이었고, 2022년 여름에 저는 제주도에 발을 디딜 수 있었습니다! 제 마음과 몸이 집에 돌아왔다고 느꼈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저는 마음을 놓고 쉴 수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갔고, 그 기간에 살이 쪘을 수도 있는데, 그건 너무 멋진 제주 음식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저는 입양기관을 다시 방문했지만, 매번 대화는 더 많은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제 입양파일은 그들이 2019년에 파일을 검토했을 때 가져온 것보다 훨씬 얇았고, 저는 몇몇 문서를 읽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 동료 입양인들 중 누구도 개인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확하고 포괄적인 정보에 접근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입양과 관련된 문서들(그리고 그것이 정확한 정보이길 바라지만)은 입양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언어인 한국어와 한자로 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새로운 경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한국에서 덴마크로 돌아온 후, 덴마크의 성인 입양인들 사이에서 이런 개인 문서를 읽고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증가했다고 생각해 이른바 '타임라인 워크숍'을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매주 수요일 동안 저의 작은 집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갓김치, 불고기 냄새 사이로 한국과 입양에 대한 저의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입양기관이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증거가 나오기도 전에 모든 입양아들은 입양기관이 시작한 고아호적을 제공받았으며, 한 여성은 자신이 입양되지 않았지만 위탁 양육을 위해 한국에서 덴마크로 보내졌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덴마크에 도착한 후 입양가족이 저를 입양할 때까지 제가 누구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여전히 찾고 있습니다. 덴마크에 간병인이 없었다면 한국으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있었을까요? 덴마크 고아원에 있었나요? 그리고 누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졌을까요?

입양인들은 세상의 다른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이나 생물들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우리의 유산에 대해 알 권리가 있고,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 각자의 길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 저는 아마 결코 답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너무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저는 입양된 사람들이 덜 상처받고 투명한 과정을 거쳐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한국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미국과 (아마도) 한국에서도 홀트 가족은 해외입양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덴마크에서도 우리는 똑같이 활동적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좋은 의도만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녀와 홀트가 아이들이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결정권자가 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의 입양인들은 스스로에게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저에게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저는 다른 아이들과 동등한 권리를 원합니다. 저는 입양으로 아이들을 잃은 가족들을 위한 진실을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가족을 분리하면서까지 진행한 사업을 한 사람들이 책임지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에 상관없이 모든 입양인들이 그들 스스로와 그들의 내면의 아이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쓰라림은 더이상 건설적인 동반자가 아닙니다.

▲이 글을 쓴 니아 씨가 입양될 당시의 모습 ⓒ필자 제공

▲이 글을 쓴 니아 씨는 훌륭한 요리사다. 그는 입양인들과 모일 때 이처럼 한국 음식을 준비해 나눴다. ⓒ필자 제공

2022년 9월, 283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될 당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11월 15일, 12월9일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372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에서 덴마크와 전세계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의 입양과정에서 인권 침해 여부와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다행히 진실화해위는 12월 8일 '해외 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이는 한국이 해외입양을 시작한지 68년만의 첫 정부 차원의 조사 결정이다. <프레시안>은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한 해외입양인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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