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글에 썼듯이,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에 강제동원된 식민지 조선인이 적어도 200만 명에 이르고, 한반도 바깥으로 강제 동원된 사람들 가운데 사망자는 21만~22만 명 이다. 특히 27만 명이 강제동원된 군인과 군속(군무원) 가운데 15만 명쯤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나머지 6만~7만 명의 사망자는 노무자, '위안부' 등으로 한반도 바깥에 강제동원된 사람들이다. 한반도 안에서 얼마나 죽었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일제가 전쟁범죄를 감추기 위해 패망 무렵에 대부분의 주요 문서들을 소각 은폐해버린 탓이다.
일본이 지난날 한반도를 억압 통치하면서 저질렀던 전쟁범죄는 20세기 식민지 통치사에서 그 규모와 잔혹성에서 나치 히틀러 정권에 버금갈 만큼 악명이 높다. 그런데도 사죄하기는커녕 축소 왜곡하는 일본의 대응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피해 당사자의 눈물 어린 증언으로 ‘전범국가 일본’의 민낯이 드러날 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답답함과 함께 분노를 느끼곤 해왔다.
최근 들려오는 소식도 불편하기 그지없다. 2024년부터 일본의 초등생들이 쓰게 될 사회 교과서에 조선인 징병을 포함한 강제동원을 부인하는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라 한다. 이를테면, 예전의 교과서에 ‘일본군의 병사로 징병되고’란 표현을 '일본군의 병사로 참가하고'란 식이다. 2021년에는 각료회의에선 '일본군 위안부', '종군 위안부'는 사실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냥 '위안부'로 기술하라고 결의했었다. 잔머리 굴리는 사기꾼들이 법정에서 흔하게 쓰는 물타기 수법이나 다름없다.
"당한 것도 치가 떨리는데 발뺌하다니..."
강제동원에 나선 인간사냥꾼들에게 붙들려 희생된 식민지 조선인들 가운데는 일본군 성노예가 됐던 꽃다운 여성들도 있다. 그 숫자는 연구자에 따라 다르다.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까지 큰 편차를 보이지만, 학계에선 대체로 3만~5만 명쯤으로 추산하고 있다. 3만 명이든 5만 명이든 분명한 사실은 그 많은 여성들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 꽃다운 젊음을 짓밟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는 것이다.
"당한 것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일본사람들이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발뺌하는 것이 너무 기가 막혀 증언하게 됐습니다. 일본 정부가 거짓말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증인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1991년 8월14일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며 처음 얼굴을 드러낸 김학순(1924-1997)은 그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위와 같이 말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14살 때 홀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예기(藝妓)집 주인의 양녀가 됐고, 16살에 양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기생 일을 하러 갔다가 군인들에게 납치돼 '위안부'가 됐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집 1> 한울, 1993 참조).
일본 극우들은 김학순의 경우 '양부가 딸을 군에 팔아넘긴 인신매매'라며 일본군에는 책임이 없다고 우겼다. 한국의 신친일파도 같은 목소리로 김학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당사자가 납치됐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2차 가해나 다름없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자들을 가리켜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걸로 넘어가도 되는 것일까. 김학순은 6년 뒤 눈을 감았지만, 그녀가 내놓은 숙제(일제의 사죄와 배상)는 아직껏 깔끔하게 풀리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그녀를 비롯한 '성노예 위안부' 처녀들의 짓밟힌 삶에 얽힌 이야기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자들이 아니라면) 눈물을 흘리며 듣기 마련이다.
"나의 불행은 납치돼 일본군 위안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시작됐다"는 김학순의 용기 있는 공개 증언이 촉발점이 돼 그동안 나설까 말까 망설이던 '위안부' 피해자들이 2차, 3차... 증언자들로 나타났다. 한국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는 238명이다(현재 살아계신 할머니는 10명). 1992년 1월8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구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작한 '수요집회'는 31년 넘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렸다. 최장기 집회로 기네스북에 기록됐고, 지금도 세계기록을 갱신중이다(3월29일에 열린 집회가 1589차). 김학순의 뒤를 이어 북한, 타이완,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국 피해자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은 2000년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 이어졌다. 이 법정은 동티모르를 비롯한 아시아 각지의 피해자 여성들과 인권운동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특히 히로히토 일왕에게 인도에 반한 죄, 강간과 성노예제에 대한 전쟁범죄 책임을 물었다.
일본 극우파들이 성지로 여기는 야스쿠니 신사엔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시기부터 1945년 패전 때까지의 전몰자를 제신(祭神)으로 받들고 있다. 1937년 중일전쟁 이래 1945년 패전 때까지 일본 군국주의가 벌인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의 선봉에 섰다가 죽은 232만 명 가운데 식민지 조선의 처녀를 ‘성노예’로 거칠게 다루며 ‘위안’을 강요했던 자들도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정신대-위안부 사이의 혼란 왜 생겼나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젊은 여성들을 군수공장 등으로 내몰았다. 그때 쓰여진 용어가 '여자근로정신대'였다. 줄여서 흔히 '정신대'로 알려진 이 강제동원 형태와 관련해 두 가지 혼란 또는 오용이 논란이 돼왔다. 첫째는 정신대가 언제부터 있었느냐는 논란이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와의 혼용에서 생겨난 논란이다.
첫째, 정신대가 언제부터 있었느냐는 논란. 일본의 우익이나 한국의 '신친일파'들은 일제가 '여자정신근로령'을 발표한 시점이 1944년 8월이었고, 한국에는 이 근로령이 적용되지 않았다고까지 주장한다. 한마디로 '정식으로 모집된 식민지 조선의 정신대원은 없었다'고 우긴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1944년 8월의 '여자정신근로령'은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동시에 공포·시행됐다.
더구나 중요한 사실은 '여자정신근로령'이 나오기 몇 해 전부터 한반도에서는 여러 방법으로 강제동원이 이뤄졌다. 이를테면, 1943년 무렵 초등학교 5,6학년 또는 졸업한지 1~2년된 어린 소녀들이 일본의 군수공장이나 섬유공장에서 힘든 노동으로 혹사당하고 있었다(이타가키 류타, 김부자 엮음,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책임> 삶창, 28-31쪽 참조).
둘째, '위안부'와의 혼용에서 생겨난 논란. 일본의 우익이나 한국의 '신친일파'들은 한국의 비판세력이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근로정신대 출신이 위안부가 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정의기억연대'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오랫동안 '위안부' 문제에 집중해온 인권단체다. 그렇기에 많은 한국 사람들도 '정신대' 하면 '위안부'를 떠올리곤 했다. 여기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근로정신대로 간다면서 배를 탔는데, 최종 목적지는 '내지'(일본)가 아닌 동남아 전선인 경우가 수두룩했다. 그렇기에 당시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 정신대와 위안부의 경계는 분명치 않았다.
'위안부' 출신의 인권운동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김복동 할머니(1926-2019)도 정신대로 가는 줄 알았다고 했다. 경북 양산의 초등학교 4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 있던 1941년, 마을 구장과 반장을 앞세운 일본인이 엄마에게 "딸을 정신대로 보내야 하니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말에 하는 수 없이 끌려갔다. 그리고 정신대인줄 알았는데 '위안부'가 됐다고 증언했다. '처녀 공출'이란 명목으로 '위안부' 징집이 이뤄졌음을 이 증언으로 알 수 있다.
정신대원이었다가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도 있다. 강덕경 할머니(1929-1996)의 경우가 그러했다. 1944년 '여자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일본 후지코시 공장에서 일했다. 어린 소녀는 일이 너무 힘들어 도망쳤다가 붙잡혔다. 일본군 헌병은 그녀를 일본 본토에 있는 군 위안소에 끌고 갔다. 그곳에서 5개월 남짓 성노예로 있다가 8.15를 맞아 풀려났다는 점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말할 수 있겠다.
진중일지(陣中日誌)로 드러난 일본군 위안소
이 글 앞에서 일본군에 '위안부'로 끌려간 식민지 조선 여성들이 3만~5만 명이라 했다. 일본은 위안부 관련 많은 문서들이 불태워져 없다는 점을 이용해 '위안부' 강제동원을 포함한 그들의 지난날 전쟁범죄를 축소하거나 아예 부인해왔다. 특히 일본군이 위안소 개설이나 운영, 위안부 충원 등에 개입했다는 것을 부인해왔다.
하종문교수(한신대, 일본근현대사)가 올해 1월에 펴낸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휴머니스트, 2023)는 '위안부'의 실체를 일본군이 남긴 문서를 바탕으로 연구한 역작으로 꼽힌다. 오랜 노력 끝에 하교수는 일본군이 직접적으로 위안소를 개설, 운영하고 위안부를 충원하는 데에도 깊이 관련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먼저 진중일지(陣中日誌)란 어떤 것일까.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진중일지는 독립된 소대 포함해 중대 이상의 부대가 동원령을 받은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작성이 의무화된 공식 기록물이다. 이를 작성하는 목적은 여러 가지다. 전사 편찬을 위해서도 기록을 남기는 것이고, 부대원 개인별 근무 및 승진의 기초 자료가 되기도 한다. 또한 군사적인 제반 경험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장래의 개선 자료로 삼기 위해서다. 따라서 진중일지에는 '위안소 관련 기록'을 포함해 해당 부대와 관련 부대의 일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패전 무렵 일본군 각급 군부대의 진중일지들은 불태워져 폐기됐다. 일본 정부 문서와 마찬가지로 전쟁범죄의 증거들을 없애버린 셈이다. 그나마 지금 남아있는 진중일지는 일본 육군성에서 보관하던 것, 개인이 소장하다가 기증한 것, 연합군이 노획했다가 나중에 반환한 것 등이다. 이들 진중일지의 대부분은 방위성 산하 방위연구소에 있고,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됐던 부대의 진중일지 일부는 내각부 산하 '오키나와전 관계자료열람실'에 있다. 이어지는 하교수의 설명.
"남아 있는 진중일지에서 '위안부' 개인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진중일지를 꼼꼼히 살펴보면 군부대의 이동, 주둔, 작전, 훈련 등 통상적인 움직임과 위안소의 설치·이용이 서로 떼놓을 수 없는 일본군 행동의 ‘일부’였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일본군은 '위안부' 강제동원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 일본 쪽의 일관된 주장이다. 하교수에 따르면, 진중일지를 매개로 삼아 그동안 은폐돼왔던 '전시 성폭력'의 실상을 드러냄으로써, '전시 성노예'라는 본질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 내용의 주요부분을 줄여 옮겨본다.
[1937년 12월24일 상하이 파견군 참모장 이누마 마모루 소장이 육군성에 전보로 요청한 100만개의 콘돔은 12월29일~31일 사이에 항공편으로 상하이파견군 야전의량창에 전달되었다. 12월말의 위안소 개설에 맞추어 상하이파견군은 화급을 다투어 콘돔 조달을 추진했고, 이에 따라 육군성은 물품 발송을 신속하게 처리했다](75쪽).
[위안소 주위를 거의 24시간 순찰하는 전담 보초 7명이 배치되고 위안부의 산책도 보초의 순찰구역 내에서만 가능하도록 했다. 거주지 주변을 경계하고 군기와 풍기를 단속한다는 취지라고 적혀있지만, 위안부는 사실상 감금된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268쪽).
태평양 절해고도에 갇힌 조선인 처녀들
일본군의 진중일지를 바탕으로 한 이 책에서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대목은 태평양의 한 작은 섬에 갇힌 조선인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그 섬의 이름은 오키다이토. 오키나와 섬에서 동쪽으로 360km 떨어진 곳에 2개의 섬(기타다이토섬과 미나미다이토섬)이 8km를 사이에 두고 있고, 미나미다이토섬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 오키다이토다. 그야말로 절해고도(絶海孤島)인 오키다이토에 어떻게 식민지 조선의 ‘위안부’ 여성들이 가게 됐을까.
지금은 무인도인 이 섬은 20세기 들어 인광석 산지로 개발돼 일본인 광업소가 들어섰다. 태평양전쟁 막바지까지 광업소는 인광석을 캐냈다. 1944년 일본군 대본영은 오키나와 본섬과 다이토 제도의 방어를 위해 만주의 9사단과 28사단을 32군이 관할하는 이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9사단은 오키나와 본섬으로 향하고 28사단은 미야코 제도와 다이토 제도로 향했다. 그 사이에 사이판이 미군에 점령당하자, 28사단의 주력인 보병 제36연대는 오키나와의 태평양쪽 전진 기지였던 다이토제도로 주둔지가 바뀌었다.
36연대에 편입된 85병참경비대 4중대의 진중일지, 그리고 4중대장 모리타 요시오 중위가 남긴 수기에 따르면, 총원 221명이 1944년 4월 26일 오키다이토 섬에 내렸다. 같은 해 11월 23일 ‘위안부’ 7명이 업자 1명과 함께 그 섬에 왔다. 이들이 오기 앞서 4중대에 보내진 전문 435호는 "내일 아침 오키다이토 섬에 도착할 기범선으로 '위안부'(경영자 포함 8명)가 가니 '관련 위안소 규정'을 송부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따라서 하교수는 "위안부의 수송과 함께 위안소를 운영하는 규정을 전달한다는 것은 위안소가 군의 명령 체계에 이루어졌음이 명백하다"고 분석한다. 8명으로 구성된 위안소를 오키다이토 섬으로 보낸 주체는 일본군 32군이었다는 것이다(677쪽 참조).
전투 앞둔 일본군에게 붙잡힌 '성노예'
조선인 '위안부' 7명이 오키다이토 섬에 도착할 무렵, 태평양의 다른 섬들에도 '위안부'들이 보내졌다. 도카시키 섬에 7명, 게마라 제도의 자마미 섬과 아카 섬에도 7명이 도착했다. 이로 미뤄, 식민지 조선여인들로 구성된 대규모 ‘위안부’ 집단이 꾸려졌고,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가는 1944년 11월 들어 오키나와의 부속섬에 분산파견된 것으로 보인다(673쪽 참조).
미군의 공격이 바로 코앞에 둔 시점인 1945년 1월 22일 일본군은 그때껏 잔류 중이던 광업소 종업원들과 주민들을 섬에서 모두 퇴거시켰다. 문제는 조선인 '위안부' 7명과 업자는 섬에 남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점이다. 미군의 공격으로 오키다이토 섬이 곧 전쟁터로 바뀔 게 뻔한 상황에서 군인도 아닌 '위안부'를 남도록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곧 다가올 미군과의 결전으로 죽음을 앞둔 일본 군인들에게 끝까지 '성적 위안'을 제공하라는 요구 말고 다른 이유를 찾을 수는 없다. 일본군에게 그들은 '성노예'였다는 사실이 이로써 드러난다.
섬 주민을 모두 퇴거시킨 사흘 뒤, 이 섬의 일본군은 "긴급 보급품으로 위생 콘돔을 보내달라"는 전문을 보냈다. 지휘관인 4중대장 모리타 요시오 중위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장사는 되지 않는데 돌아갈 배는 오지 않는다. 죽을 때는 군과 같이. 지독히도 운이 없는 일행이었다'(674쪽 참조). 하지만 일본군의 예상과 달리 미군은 이 섬을 폭격만 했을 뿐 상륙작전을 펴진 않았다. 다행히도 조선인 '위안부' 7명은 모두 살아남았고, 곧 다른 섬으로 옮겨갔다.
이들의 그 뒤 운명은 알기 어렵다. 다른 곳에서 미군의 폭격을 받아, 또는 전쟁범죄의 흔적을 없애려는 일본군의 총에 죽었을까. 용케 살아남아 한반도 어딘가로 돌아가 그리운 가족을 만났을까. 아니면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더렵혀진 몸으론 가족을 만날 수 없다"며 이국 타향 어디선가 숨어 살았을까. 분명한 사실은 이들도 일제 침략전쟁의 희생자들이라는 점이다. '성노예' 여성으로서 극심한 성적 착취를 겪었다. 위로는 히로히토 국왕을 비롯해 누군가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일본군 중대장 모리타의 표현대로 '지독히도 운이 없다'고만 하고 넘어갈 일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극우와 손잡은 한국의 '신친일파'
문제는 지난날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가 벌였던 전쟁범죄를 부인, 또는 축소 왜곡하려는 세력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일본회의’같은 보수우익 정치세력, 이른바 ‘자유주의 사관’을 내세우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 그리고 한국의 친일 연구자들이다. 그들은 강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그것도 ‘협의의 강제연행‘이 있었느냐 시비를 건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강제로 또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성노예’가 됐다는 증언자가 나오면, ‘거짓말’이라 공격한다. 앞서 ‘진중일지’ 대목에서 살펴보았듯, 일본군 위안소 자체가 ‘성노예’ 상태임을 실증하는데도 말이다. 1937년의 난징 학살을 부인하고 ‘위안부’의 성노예화와 일본 군부의 관련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그들이 습관적으로 되풀이해온 패턴처럼 여겨진다.
2016년에 타계한 일본의 민중사학자 한 사람인 야스마루 요시오(전 교토대 교수, 일본사상)는 '강제'의 개념을 좀 더 넓게 해석한다. 야스마루는 "일본인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천황' 이미지는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 시대에 꾸며낸 '관념적 구축물'에 지나지 않는 허상(虛像)"이라 지적했고, 특히 그 속에 담긴 군국주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통렬히 비판했던 지식인이다. 그는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토론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우익 사학자들은) 종군위안부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제’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언, 인신매매, 유괴와 현지에서의 일상적 관리 등은 ‘강제’일까요, ‘강제’가 아닐까요. 그 여성들의 체념과 상황에 대한 적응도 강제나 폭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폭력의 사회 내재적인 양상 전체가 문제인 것이지, 그들에 대한 일본군의 직접적인 ‘강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문제의 표층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일본의 전쟁책임 자료센터,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2011, 83쪽).
일본 극우들과 한국의 '신친일파'들은 '위안부' 논쟁이 나올 때마다 '생계를 위한 자발적인 취업'이었다고 우겨왔다. 때로는 용기(?)있게 금기선을 넘어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망언 등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큰 흐름으로 보면, 최근 몇 년 사이에 '신친일파'의 기세가 다시 거세졌다. 눈치 보지 않고 대놓고 망언을 내뱉는 모습들이다. 서슴없이 친일적 발언을 하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 하고, 강제동원을 비롯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놓고 토론을 벌이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관점이 다른 상대방을 토론으로 설득하거나 승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참 답답하고 불편한 상황이다.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 일본 극우들은 이즈음 "우리가 역사전쟁에서 이겼다!"고 환호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일본 교과서에서 '위안부'나 '강제동원'이란 단어가 사라지고 있다. 독도를 다케시마라 우기는 것은 그대로다. 일본의 극우에겐 한국의 '신친일파'가 소중한 자원이다. 4월8일 실리는 글엔 '역사전쟁'에 초점을 맞춰 위의 문제들을 좀 더 짚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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