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국무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양곡관리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기로 했다고 대국민담화를 통해 밝혔다. 윤 대통령이 실제 거부권을 행사하면 윤석열 정부 들어 첫 사례가 된다.
한 총리는 29일 총리 공관에서 열린 양곡관리법 당정협의 직후 발표한 담화에서 "문제가 많은 법률안에 대한 행정부의 재의 요구는 올바른 국정을 위해 헌법이 보장한 절차"라며 "정부는 우리 쌀 산업의 발전과 농업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 요구를 대통령께 건의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문제로는 크게 네 가지를 제시했다. 한 총리는 "첫째, 개정안은 시장의 수급조절 기능을 마비시키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돌아간다"며 "쌀이 남아도는데도 영구히 무조건 사들이는 것은 시장의 수급조절 기능을 더욱 무력화시킨다. 공급과잉이 더 심해지고, 가격은 더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 총리는 "둘째, 미래 농업에 투자해야 할 재원이 사라지게 된다. 개정안에 따른 재정부담은 연간 1조 원 이상"이라며 "이 돈이면 300개의 첨단 스마트팜을 조성하고, 청년 벤처농업인 3000명을 양성할 수 있다. 농촌의 미래를 이끌 인재 5만 명을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총리는 "셋째, 진정한 식량안보 강화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이미 자급률이 높은 쌀을 더 생산하는 것은 합당한 결정이 아니다. 오히려 해외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밀, 콩 같은 작물의 국내 생산을 확대하는 것이 국가 전체와 농민을 위한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한 총리는 "넷째, 농산물 수급에 대한 과도한 국가개입은 이미 해외에서도 실패한 정책"이라며 "60년대 유럽에서도 가격 보장제를 실시했다가 생산량 증가와 가격하락에 따른 농가소득 감소 부작용으로 결국 중단했다. 태국도 2011년 가격개입정책을 펼쳤다가, 수급조절의 실패와 과도한 재정부담으로 이어져 3년 만에 폐지했다"고 했다.
법안 통과를 주도한 민주당에 대해 한 총리는 "국회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일방적으로 처리됐다는 점을 저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이번 개정안은 지난 정부에서도 그런 이유로 이미 반대하였던 법안이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는 식으로 다시 추진하는 것은 혈세를 내는 국민들에게 도리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향후 농업 정책 방향에 대해 한 총리는 "우리 정부는 시장을 왜곡하는 정책이 아니라, 진정으로 농업을 살리는 다양한 지원정책을 통해 식량생산의 수급균형을 맞춰나가겠다"며 "쌀소비 수요를 최대한 확대하고, 고품질 쌀 생산체계를 강화하는 등, 쌀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더 이상, 쌀만 생산해서는 안 됩니다"며 "밀이나 콩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들에게도 직불금을 지원하겠다. 수입 밀을 대체할 수 있는 가루쌀 산업도 활성화시키겠다"고 밝혔다.
끝으로 한 총리는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 요구권 건의 방침과 관련해 "이러한 결정은 국익과 농민을 위하고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한 결단이라는 점을, 국회와 농업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서, 이해해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린다"고 당부했다.
담화문 발표 직전 한 총리는 총리 공관에서 주호영 원내대표 등 여당 지도부를 만나 양곡관리법 개정안 대응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주 원내대표는 이 자리에서 "그간 당정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폐단과 부당성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농민단체들과도 다각도로 접촉했다. 국회에서 어떤 방법을 쓰든 막았어야 했는데 소수 여당이라는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법안의 폐단을 막고 국민, 농민 보호를 위해 헌법상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대통령의 재의요구권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3일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표 대결 끝에 통과시켰다. 개정안의 주 내용은 쌀 수요 대비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분을 매입하는 것이다. 이 개정안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민생 1호 법안'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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