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중일전쟁(1937년)을 벌이면서 많은 전시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식민지 조선인들을 강제로 전선이나 탄광으로 내몰기 위한 악법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국가총동원법(1938년 4월)으로 전시 총동원 체제를 다져 나갔다. 이어 국민징용령(1939년 7월)이 나오고 그해 10월부터 식민지인 조선과 타이완에서 이 법이 적용됐다. 그 뒤로도 일제는 잇따라 여러 관련 법령들을 내놓았고, 근로보국대, 여자근로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갔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나온 뒤 나온 전시 악법과 조치들에 관한 글을 일부 옮겨본다.
[1938년 7월 7일 국민정신총동원 연맹이 결성되고 국민정신총동원 근로보국운동에 관한 건(1938년 7월1일)이 통첩되어 각 지역에서 근로보국운동이 시작됐다. 1941년 11월 23일 국민근로보국 협력령은 근로 능력이 있는 국민 전부를 국가의 중요한 업무에 동원 시킬 목적으로 칙령으로 공포됐고, 1941년 12월 조선에 실시되었다. 1944년 8월23일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실시되어 이미 시행되고 있던 여자 근로정신대에 대한 법적 근거가 부여되었다](강혜경,「전시총동원체제기 여성의 강제동원과 사실 규명의 과제」,『문화기술의 융합』v.7, no.1, 2021).
일제강점기의 강제적 군 입대는 육군특별지원병제(1938년 4월), 해군특별지원병제(1943년 7월), 학도지원병제(1943년 10월), 징병제(1944년 4월) 등으로 이뤄졌다. 이들 법령들 가운데는 ‘지원’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인력을 효율적으로 수탈하려는 치밀하고도 냉혹한 올가미들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우리 민족은 일제 침략전쟁의 도구로 이용당하며 이른바 '9년 전쟁'(1937년 중일전쟁부터 1945년 패전까지 벌어졌던 전쟁)의 살벌했던 암흑기의 억압과 착취를 견뎌내야 했다.
날줄과 씨줄로 촘촘히 엮은 강제동원 체제
일제가 강요했던 ‘국가총동원’은 서구의 ‘총력전’의 일본판(版)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독일은 물론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그 전쟁들이 19세기의 전쟁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새로운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행기 공습을 비롯해 전선이 후방과 전방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전쟁을 이기려면 한 국가가 지닌 자원과 인력을 모두 쏟아 부어야 했다. 그래서 이른바 ‘총력전’(total war)의 개념이 나왔다. 문제는 일제의 침략전쟁 부담을 우리 한민족이 오롯이 받아내며 희생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성인 남성뿐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까지 강제로 동원하였다. ‘전쟁국가 일본’의 국가총동원 체제 아래에서 여성과 어린이 노동력은 성인 남성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일제는 특히 여성 노동력 동원 없이 오로지 남성만으로 전쟁을 벌여나가기란 현실적으로도 어렵다고 여겼다. 식민지 조선 여성들은 근로보국대, 여자근로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동원되었다. 군수품을 만드는 미쓰비시중공업의 공장에서 일하던 다수의 여성들이 한반도에서 끌려간 여자근로정신대원들이었다.
일제의 강제 동원 형태는 동원된 조선인들이 어떤 분야에서 일했는가를 기준으로 △노무 동원(노동자, 군속, 근로보국대, 근로정신대 등) △병력 동원(군인, 군속), △성 동원(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나뉜다. 또한 모집 형태로 보면, △할당 모집(군, 면 단위의 지역별 동원인원 배분 지정) △국민 징용 △관 알선(행정기관, 조선노무협회, 기업 등이 서로 조율해 노동력 차출) 등 크게 3가지다. 모집 형태의 이름만 다를 뿐 국가 권력이 폭력적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협박해 강제 동원하고 수탈했다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날줄과 씨줄로 촘촘하게 엮어 꼼짝 못 하도록 이중 삼중의 강제동원 체제를 짠 셈이었다.
일제는 군대와 기업(광산이나 공장)이 필요한 인력을 정부(내무부와 군, 경찰)가 기획·조정·배당하고 조선총독부와의 조율을 거쳐 조직적으로 전시 동원체제로 묶었다. 하부조직인 식민지 조선의 행정력(군청, 경찰서 등)이 충실하게 악역을 맡아 민초들을 쥐어짜고 닦달했음은 물론이다. 하부 조직의 일꾼들은 징용장 같은 문서를 들고 농촌으로 어촌으로 인간 사냥에 나섰다.
사흘 동안 서류 불태운 도조 히데키
문제는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근거될만한 자료들을 의도적으로 없애버린 탓이다. 전시내각을 이끌며 진주만 기습을 감행함으로써 전선을 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넓혔던 자가 도조 히데키(1884-1948)였다.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 발표 뒤 집중해서 한 일이 다름 아닌 그의 전쟁범죄를 입증할 문서들을 소각 폐기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모습을 전하는 일본 작가의 기록을 옮겨본다.
[그(도조 히데키)가 열중한 작업은 메모와 노트를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육군상 및 수상 재임 중에 작성한 집무 메모는 개인 비망록이 아니라 일본 역사를 이어가는 중요한 자료가 될 터였다. 그것들을 모두 마당에서 불태웠다. 연기는 사흘 동안 마당에서 피어 올랐다](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제2차세계대전> 페이퍼로드,2022, 584쪽).
전쟁범죄 기록을 담은 문서들은 없애거나 빼돌린 것은 것은 도조뿐 아니었다. 주요 전쟁범죄자들이라면 모두 그랬을 것이 뻔하다. 전쟁지휘부였던 대본영과 육군성, 해군성을 비롯한 군부와 정부 관공서의 주요 문서들이 파기되거나 빼돌려졌다. 맥아더 장군의 미군 점령군이 도쿄에 닿은 것은 1945년 9월2일 도쿄만 요코하마 항구 가까이에 머물던 미주리 호에서 항복문서 서명을 받은 뒤였다.
도조를 비롯한 일제의 전쟁지도부가 그들의 전범 자료들을 없앨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서류를 불태운 자들은 또 있다. 일제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눈앞에 현실화되자,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했던 전범 기업들도 그들에게 불리한 자료들을 없애버렸다.
재일사학자 박경식의 선구적 연구
일제 말기에 얼마나 많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이 강제 동원의 희생양이 됐을까. 전쟁범죄를 입증할만한 주요자료들이 불태워지고 뒤로 빼돌려린 상황에서 연구자들 한계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나마 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일제의 강제동원 규모가 어느 정도였나를 추정할 뿐이다. 강제동원 문제를 일찍부터 다뤄온 재일동포 사학자 박경식(1922-1998)은 이 분야의 선구적인 연구자로 꼽힌다. 1965년에 그가 처음 써냈던 책에서 관련 내용을 옮겨본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 징용된 사람이 100만, 조선 내에서 동원된 사람이 450만, 군인, 군속 37만 등 합계 약 600만 명이 끌려갔다. 그중에서 군인, 군속이었던 사람은 1953년 현재 22만 명이 돌아왔지만, 약 15만 명은 행방불명 상태다.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사람 가운데 3분의 2는 유골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다. 징용되어 탄광이나 비행장 등에서 사망한 사람은 일본 본토에서만 적게 잡아도 6만 명이 넘는다. 후생성에는 4만에 달하는 조선인 희생자의 명부가 있다고 들었으나, 일본 정부는 ‘한일회담’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공표하지 않고 있다](박경식,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고즈윈, 2008, 17쪽).
박경식은 일본과 동남아 등 한반도를 떠나 강제 동원된 사람이 150만 명이 넘는다고 분석했다. 그 내역은 군함도(하시마)를 비롯한 석탄광산 60만, 미쓰비시중공업을 비롯한 군수공장 40만, 토건 30만, 금속광산 15만, 항만운수 5만 명 등이다. 박경식의 선구적인 노작이 한국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일제의 침탈이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짐작은 했지만, 구체적인 통계 숫자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최소 200만 명의 노예노동
강제동원과 관련된 다른 통계자료들도 있다. 2015년에 임무가 끝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국무총리 소속)란 긴 이름의 위원회가 내놓은 통계는 780만 명에 이른다. 여기엔 노무자 753만(해외로 나간 노무자 105만 포함), 군인 21만, 군무원 6만 명이 포함된다(정혜경,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 동북아역사재단, 2019, 111쪽 참조). 일본 대장성 관리국이나 후생성 조사국, 내무성 경보국, 조선총독부 등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나온 780만 명이란 숫자는 정확한 것은 물론 아니다.
정혜경(ARGO인문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일제 말기의 강제동원 연구 분야에서 여러 역작을 펴내온 연구자다.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10년 넘게 일했다. 정연구위원은 780만 명이 중복 동원에 포함된 연인원 숫자라 본다. 피해자 1인이 동원 지역과 유형에 따라 통계에 이중삼중으로 잡혔다는 것이다. 위원회가 전산화한 자료(DB)에는 180만 명의 이름이 담겨 있다. 현재 한국 정부가 추산하는 강제동원 피해자 숫자는 200만 명쯤이다(정혜경, 110-111쪽 참조).
일제 말기 식민지 조선의 인구는 어느 정도였을까. ‘식민지 시기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를 분석한 박경숙의 논문(『한국인구학』제32권 제2호, 2009년)에 따르면, 1940년 조선인 인구가 2,600만 명쯤이었다. 강제동원된 규모가 200만이라면, 13명 가운데 1명 꼴로 강제 동원된 셈이었다. 그 무렵의 한 가족 구성원이 5명쯤이었다 치면, 두 집 건너 한 집에서 가족 가운데 누군가는 강제 동원으로 끌려갔던 셈이 된다. 강제 동원에 관한 한 일본쪽 자료는 최대치보단 최소치를 채택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강제동원에 끌려가 희생된 소년소녀들
[1942년 초봄, 면서기가 와서 덕종에게 쪽지를 주면서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일본 공장에 가서 일하면서 편히 있다 오라”고 했다. 징용장이라 했다. 면서기가 쥐어준 징용장을 들고 면사무소에 갔다. 일본 사람이 앉아서 손을 만져보더니 옆 사람에게 말했다. “이런 아이까지 데려가야 하나!” 그러면서도 집에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면에 모인 사람은 한 30명 정도였다. 수동에서 온 박 아무개라는 아이도 덕종 또래였다](정혜경,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섬앤섬, 2019, 67-68쪽)
위에 옮긴 글은 덕종이란 이름의 소년이 일제가 발부한 징용장을 받은 사정을 진술한 내용이다. 호적에는 1932년으로 적혀 있던 덕종이 징용장을 받을 무렵 나이는 만 9살이었다. 1929년에 태어났으니 실제 나이는 만 12살이었다지만, 그래도 어린이였다. 하지만 면사무소에서 만난 일본인 관리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덕종 소년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를 거쳐 일본 오이타현 사가노세키 제련소로 끌려갔다. 다른 두 명의 조선인 소년과 함께 무거운 광석들을 광차(鑛車)에 담아 분쇄기 앞까지 옮기는 일을 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곳에서 백인 포로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받으며 중노동을 하는 모습들도 봤다. 힘든 탄광 일을 견디다 못해 탈출하려다 붙잡혀 죽도록 매를 맞는 모습들도 보곤 했다. 소년의 머리에 새겨진 살벌한 기억들은 평생 잊지 못할 뇌상(腦傷)으로 남았을 것이다.
'죽음의 섬' 하시마 탄광의 소년광부
‘죽음의 섬’ 군함도(하시마) 탄광에서도 소년 광부들이 혹사당했다. 나가사키 항구에서 18km 떨어진 하시마는 탈출이 불가능 해 ‘죽음의 섬’이란 악명을 얻었다. 군함처럼 보인다 해서 ‘군함도’란 이름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졌다. 그곳에도 14살, 15살, 많아야 16살이던 소년 광부들이 있었다. 소설 <군함도>의 작가 한수산이 만났던 서정우도 16살에 군함도로 끌려왔다(배를 주리며 중노동에 시달리다 병에 걸린 서정우는 어렵사리 하시마를 벗어났지만, 나가사키의 미쓰비시조선소에서 일하던 1945년 8월9일 원자폭탄을 맞아 몸을 다쳤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기획한 역작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여기서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위의 덕종이나 정우 또래의 많은 소년 소녀들이 징용으로 강제동원돼 탄광이나 군수공장에서 힘들게 일했다는 것이다. 그 숫자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전쟁범죄의 희생자’들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현장을 온몸으로 겪었던 이들의 증언은 빼도 박도 못할 전쟁범죄의 산 증거들이다.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연합아동기구(UNICEF)는 일찍부터 18세 미만의 소년노동을 비난해왔다. 특히 ILO는 1919년에 창립된 이래 꾸준히 소년노동 문제에 관심을 제기해 왔다. 1945년 이전에 ILO가 정한 미성년 노동제한 규정은 이즈음의 18세 규정과는 달리 15세 미만이었다. 물론 당시 일본도 ILO 협약을 비준한 가입국이었다. 일제의 잣대는 달랐다. 1941년 일제가 발표한 근로보국대 동원 연령은 남녀 14세 이상, 1944년 국민근로보국협력령에서 동원 연령도 14세 이상이었다. 1945년 4월 패전이 가까이올 무렵 나온 국민근로동원령은 12세 이상으로 더 낮아졌다. 따라서 일제가 침략전쟁을 벌이면서 어린 소년소녀들을 강제 노역에 마구 동원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한반도 출신 희생자 21만~22만"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됐던 식민지 조선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을까. 안타깝게도 그 숫자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글 앞에서 살펴봤듯이, 일제가 패전 무렵 많은 자료들을 의도적으로 없애버린 탓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나 연구자들은 사망 또는 행방불명으로 8.15 뒤 한반도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규모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연구자들의 사망자 추정치는 20만에서 많게는 60만으로 크게 차이가 난다.
재일 사학자 박경식은 군인과 비전투원인 민간인 합쳐 최소 30만, 최대 50만쯤이 사망한 것으로 봤다. 김민영(군산대교수)은 <일제의 조선인노동력 수탈연구>(한울출판사, 1995)에서 조선인 노무자 사망자 43만, 군인·군속 사망자 12만, 합쳐 55만 명쯤으로 추산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보건복지부의 용역을 받아 만든 <1995년도 해외희생자 유해현황 조사사업 보고서>는 사망자를 26만 명에서 36만 명으로 추산했다(허광무·정혜경·김미정, <일제의 전시 조선인 노동력 동원> 동북아역사재단, 2021, 537-538쪽 참조).
일제 말기에 멀리 타지(일본과 동남아시아)로 강제동원 됐다가 희생된 식민지 조선사람들의 숫자를 정확히 헤아리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인식표(군번줄)을 지닌 군인 사망자 숫자도 제대로 파악하기 쉽지 않은데, 탄광이나 공장에서 개별적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규모 파악은 더욱 어렵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2021년에 펴낸 역작 <일제의 전시 조선인 노동력 동원>의 3인 공저자의 한 사람인 정혜경 연구위원(ARGO인문사회연구소)은 지금까지 나온 강제동원 희생자(사망자와 행방불명자) 추정치가 대체로 높게 잡혀 있다고 여긴다. 그는 희생자 규모를 21만~22만 쯤으로 추정한다. 설명을 들어보자.
"한인 희생자의 다수는 일제말기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군인과 군무원(포로감시원 같은 비전투원인 군속)들이다. 일본 후생성 자료를 보면, 일제말기 식민지 조선 출신의 군인과 군무원 합쳐 27만 여명이 동원됐다. 후생성이 적용했던 조선인의 사망 및 행방불명 비율(55.9%)을 조선인 군인과 군무원에 적용할 경우 15만 명을 조금 웃도는 숫자가 나온다. 여기에 노무자로 탄광이나 공장에서 일하다 죽은 사람들을 더 하면 강제동원 사망자(행불자 포함)는 최소 21만 명에서 22만 명에 이른다"
정연구위원에 따르면, 위 추정치엔 한반도 안에서 강제 동원됐다가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포함돼 있지 않다. 또한 8.15 뒤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다가 풍랑 사고 등으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도 마찬가지로 미포함이다. 한반도 안에서의 강제동원 희생자를 더하고, 일제가 뒤로 빼돌려 숨겨놓았던 자료를 포함해 미발굴 자료가 뒤늦게 드러나면,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돼 숨진 희생자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전쟁 사망자 통계는 어떤 전쟁이든 늘 논란이 된다. 추정치에서 편차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소련 양쪽의 침공과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엄청난 고난을 겪었던 폴란드의 경우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폴란드의 희생자 규모가 600만이고, 여기엔 유대인 300만, 비유대인 300만이 포함됐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이 숫자를 놓고도 정확성 논란이 따르고 있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흔히 3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고 말한다. 군인과 민간인 사망자 숫자를 합쳐서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태평양전쟁(1941년) 전몰자가 군인·군속 합쳐 213만이고, 여기에 민간인 사망자 70여만을 합치면 285만~290만 명쯤에 이른다. 여기에 중일전쟁(1937년)으로 죽은 일본군 19만을 더하면 사망자 합계는 300만 명을 넘어선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치다. 분명한 것은 야스쿠니 신사에 갇힌 조선인 전몰자가 2만1000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돈은 무슨? 살아 있는 게 다행"
"돈 많으면 가지고 도망간다고, 그래서 돈을 안 줘”(유제철, 가고시마현 소재 제련소). “돈도 못 받았어. 안 줘. 뭐 집으로 부쳐준다 어쩐다 말로는 해도 하나도 안 부쳤더만”(김상태, 사가현 소재 메이지 광업 다테야마 탄광). “돈은 구경도 못 했어. 밥만 먹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생각했어”(이천구, 후쿠오카현 소재 야하타 제철소). “월급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부쳐, 월급을 한 푼도 못 탔는디”(이사형, 도쿄 소재 미쓰비시제강소). “집으로 부쳐 달랬으니까, 집으로 부친 줄만 알았죠. 근데 아버님이 한 번도 안 받았대요"(엄정섭, 동경 소재 이시카와지마 조선소).
위에 옮긴 글은 2005년 무렵 '국무총리 소속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강제동원 구술기록집>(2006년)에 실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들이다. 이들은 하나 같이 임금을 떼였다고 증언했다. 모집, 관알선, 징용 등 동원 방식에선 각자 달라도 임금을 못 받았다는 말은 똑 같았다. '살아있는 게 다행'이란 말에서 고통의 무게가 전해지는 듯하다.
일본 전범기업들은 이들 피해자들의 '미수금'과 그동안 입었던 피해에 대해 손해 배상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더구나 일본 후생성에는 ‘미불금’이 어느 정도인지 자세하게 남아있다(허광무·정혜경·김미정, 554쪽 참조). 그런 의무를 ‘나는 모르쇠’ 하며 80년 가까운 긴 시간을 끄는 야비한 모습이 자칭 '문명국가' 일본의 모습이다.
강제동원이 '합법적인' 정책?
안타깝게도 오늘의 일본은 1910년 합병조약이 체결 당시엔 ‘합법’이었다는 주장 아래 일제 식민통치의 ‘합법성’을 내세운다. 일제 말기의 강제동원도 법에 따른 것이라며 전쟁범죄 자체를 부인한다. 필요에 따라선 사과할 듯하다가 금세 태도를 바꾼다. 이를테면 군함도(하시마) 탄광의 경우가 그렇다. 2015년 하시마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사토 구니 유네스코 일본대사는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뜻과는 달리 강제로 끌려와 혹독한 조건 아래서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인정했었다. 그러면서 등재 내용에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넣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정작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한 뒤 일본이 보인 행태는 달랐다.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느냐’는 투다. 우리 한국의 피해 당사자와 유족들을 화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지구촌 사람들을 언짢게 했다. 2021년 유네스코로부터 경고를 받았지만, 대충 넘어가려는 눈치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 그리고 법원들은 한국인 강제동원을 ‘합법적인 정책의 일환’이라고 우기며 사죄와 배상에 소극적이다. 독일과는 참 다른 모습이다. 한국에서 '제3자 변제안'이 나왔다고 좋아하지 말고, 오히려 이런 상황을 역이용하는 것을 어떨까. "늦었지만 피해 당사자와 유족들을 향한 사죄와 배상으로 과거사를 털어내렵니다"라는 변신은 일본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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