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은'의 복수가 막을 내렸다. 시즌2까지 말 그대로 절찬리 상영 중인 모 드라마에서, 학교폭력 피해자인 주인공 동은은 '피해자 간의 연대'로 과거 자신을 괴롭히던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복수한다. 드라마가 대신해주는 복수극의 완성에 쾌감을 느끼지만, 그건 현실과의 간극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터이다.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확산하는 괴롭힘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룰 것인가? 구체적인 대안이나 해결책을 말하기 어렵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있다. 학교폭력이나 집단괴롭힘은 근본적으로 권력 불균형에서 시작되며, 지배와 통제를 지속하고 권력을 우월하게 유지하려는 활동이 여러 고정관념을 통해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청소년 괴롭힘을 예방하고 줄이기 위한 논의에 더 근본적 관점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집단 내에서 억압적인 위계질서를 만들고 조장하는 행위와 이를 가능케 하는 환경을 바꿀만한 접근 말이다. 청소년 정신건강 연구를 최근까지 진행한 코즈마 앨리나 박사는 이탈리아, 스웨덴 등 유럽 여러 연구자와 함께 <청소년 건강 저널>에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논문 바로가기: 괴롭힘의 성별 차이는 사회적 성불평등을 반영한다: 46개 국가 청소년에 대한 다수준분석).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본 청소년 괴롭힘의 양상을 다룬 연구다.
46개 국가 학생에게 물은 괴롭힘 피해와 가해 경험
연구팀은 세계보건기구 유럽지역사무소와 협력하여 4년마다 실시하는 설문조사인 '학령기 아동 건강행동연구' 2017-2018년 자료를 이용하였다. 연구팀은 조사에 참여한 11세, 13세, 15세 참여자의 자료를 바탕으로, (전통적) 괴롭힘과 사이버괴롭힘에 가담하거나 피해를 받은 경험을 조사했다. 연구팀은 최근 2~3개월간 학교에서 괴롭힘과 사이버괴롭힘에 가담한 적 있는지, 괴롭힘과 사이버괴롭힘 피해를 당한 적 있는지 물었고, 최종적으로 47개 국가 8365개 학교의 청소년 20만432명이 응답한 자료를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팀은 괴롭힘과 관련한 행동을 4가지-(전통적) 괴롭힘 가해, (전통적) 괴롭힘 피해, 사이버괴롭힘 가해, 사이버괴롭힘 피해-로 나누어 남학생과 여학생 간에 경험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여학생보다 남학생의 괴롭힘 피해경험이 더 많은 나라
연구팀은 우선 괴롭힘을 당한 남학생과 여학생 비율에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나라별로 남녀 학생의 피해경험을 살펴보면, 조사에 참여한 전체 46개 나라 중 약 3분의 2에 달하는 국가에서 남학생 피해경험이 여학생보다 많았다. 남녀 간 차이를 살펴보면, 가장 큰 격차를 보인 나라는 이스라엘이었다. 괴롭힘을 당한 적 있는 남학생 비율(14.20%)이 괴롭힘 피해경험이 있는 여학생(7.02%)보다 7.18%포인트 높다. 숫자만 놓고 보면 남학생은 여학생의 두 배 가까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터키 역시 괴롭힘 피해를 당한 남학생이 22.49%, 여학생이 15.35%로, 남녀 간 격차가 7.14%포인트에 달한다. 물론 벨기에처럼 괴롭힘 피해경험에 성별 격차가 거의 없는 나라도 있다(남학생 7.37%, 여학생 7.32%). 독일이나, 노르웨이도 성별 차이가 거의 없다. 여학생의 피해경험이 남학생보다 많은 나라로 스코틀랜드, 아이슬란드 등이 있지만, 남녀 간 격차는 최대 2.13%로 비교적 크지 않다.
사이버괴롭힘에서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앞서 (전통적) 괴롭힘의 경우, 전체 국가 중 3분의 2에서 남학생 피해비율이 여학생보다 더 높았다면, 사이버괴롭힘에서는 전체 국가 중 약 3분의 2에서 여학생 피해경험이 남학생보다 더 많았다. 물론, 그 중에도 이스라엘과 같이 여전히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사이버괴롭힘을 당한 비율이 높은 나라(남학생 14.99% vs 여학생 7.81%, 성별격차 7.18%p)도 있다. 사이버괴롭힘 피해경험에서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피해경험이 높은 나라는 전체 46개 국가 중 3분의 1이다.
괴롭힘 당하는 것도, 괴롭히는 것도 남학생이 많은 것은 우연일까
다음으로 괴롭힘 가해경험에서 성별 차이를 보자. 조사에 참여한 46개 국가 모두에서 남학생 가해경험 비율이 여학생보다 높았다. 다만 나라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학생에 비해 남학생 가해경험 비율이 유독 높은 나라는 리투아니아(남학생 24.31% vs 여학생 13.32%, 성별격차 10.99%p), 아르메니아(남학생 14.79% vs 여학생 5.40%, 성별격차 9.39%p) 등이었다. 터키는 앞서 괴롭힘 피해경험에서 남학생 비율이 높아 여학생과 성별 격차가 컸는데, 가해경험에서도 남녀 차이가 도드라졌다(남학생 22.20% vs 여학생 14.18%, 성별격차 8.02%p).
즉, 남학생은 여학생에 비해 괴롭힘을 많이 당하지만, 괴롭히는 행동 역시 여학생보다 많이 한다. 온라인상에서 타인을 괴롭힌 경험을 물었을 때도 남학생의 가해경험은 모든 나라에서 여학생보다 많았다. 차이가 얼마나 덜 나느냐, 더 나느냐만 있을 뿐이다(격차가 가장 큰 나라는 리투아니아로, 남학생 26.54% vs 여학생 12.99%, 성별격차 13.55%p).
학생의 괴롭힘 경험, 그리고 국가의 성평등 수준
괴롭힘의 가해와 피해경험에서 이토록 남학생 비율이 도드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별격차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요인이 있지 않을까? 연구팀은 개인 데이터를 46개 국가별 성불평등지수(2018년 유엔개발계획의 성평등지수)와 연결하였고, 괴롭힘의 가해 및 피해경험과 성평등 수준의 연관성을 분석하였다. 여기서 성평등지수는 건강 분야(모성사망률과 청소년 출산율), 역량강화 분야(의회의석 중 여성 비중, 성별 학력취득수준), 노동 분야(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수준) 점수를 종합하여 0부터 1사이의 값으로 산출되며 값이 클수록 불평등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연구 결과, 성평등지수가 높을수록(더 불평등할수록), (전통적) 괴롭힘에서 피해를 받거나 가해할 확률, 사이버괴롭힘을 당할 확률은 여학생에서도 늘어났지만, 남학생에서는 더 급격하게 증가했다. 연구팀은 이러한 결과가 여학생의 데이트폭력 피해, 신체적 아동학대, 남학생 사이의 신체적 싸움 등 대인관계 폭력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다룬 연구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한다.
즉, 괴롭힘이 문화적 맥락 안에서 발생한다고 할 때,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남성적 권력과 권위를 강조하는 성별화된 사회구조가 청소년 남학생 사이의 괴롭힘 행동 악화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발달적 관점에서도 청소년 남학생과 여학생이 성역할과 성불평등에 관련한 사회적 메시지를 내재화할 수 있으며, 이러한 메시지가 (특히 남학생으로하여금) 통제와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공격성을 정당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성평등은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이롭게 할 수 있다
구조적인 성평등 수준이 대다수 여성과 여학생의 건강과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는 근거는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결과는 구조적인 성불평등이 심할수록 남학생이 괴롭힘에 연관될 가능성이 크다는 시사점을 준다.
연구팀은 그런 의미에서, 연구결과를 기반으로, 괴롭힘 예방에 반드시 성역할과 사회문화적 성규범, 청소년기 사회 및 심리적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한 성인지적 방식 등 성별과 관련한 관점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개인의 환경과 행동은 먼 거리에 있는 성평등과 같은 정책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개인을 둘러싼 구조와 전체를 조망하여 널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페미니즘의 관점을 환기할 때가 아닐까.
* 서지정보
Cosma, A., Bjereld, Y., Elgar, F. J., Richardson, C., et al. (2022). Gender differences in bullying reflect societal gender inequality: A multilevel study with adolescents in 46 countries. Journal of Adolescent Health, 71(5), 601-608. https://doi.org/10.1016/j.jadohealth.2022.05.015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