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연재를 요청받아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열고는 '나는 무슨 자격으로,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변호사라는 직업 활동과 연관된 글을 쓰기로 해서 그렇다. 그래서 '공익'과 관련된 쑥스러운 고민을 그대로 한번 적어보기로 했다. 앞으로의 글은 아무래도 사람들이 일컫는 '공익' 또는 '인권'과 연결되는 사건 이야기가 될 텐데 첫 번째 글에서는 이에 대한 생각을 적어본다.
'공익·인권변호사'로 소개될 때가 종종 있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사건의 양으로만 보면 소위 말하는 '공익', '인권' 사건이 아닌 '사익', '이권' 사건을 더 많이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말하는 '공익'도 결국 누군가의 '사익', '이권'이다. 장애인의 사익, 성소수자의 사익, 아동의 사익, 난민의 사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공익'이라고 부르는가? 단어 자체를 문언 그대로 해석하자면 '모두의 이익'이란 뜻인데 과연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는 보편타당한 '공익'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나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의 사익을 위해서는 비장애인의 양보가 필요하다. 성소수자의 사익이 곧 이성애자의 이익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특정 사회 구성원의 사익 추구 행위가 아닌 '환경운동' 정도 되면 어떤가? 개발도상국에는 이익이 되지 않기에 실제로 그들은 환경운동을 적극 반대한다. '선진국 너희는 몇십 년 동안 화석연료 태워서 경제발전 해놓고 우리는 왜 이제 못하게 하는가'라는 식이다.
이렇게 보면 '공익'이란 허위의 개념이다. 그러나 '공익'이라는 표상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이미지 즉 의미의 '이데아(idea)'는 분명히 있다. 그래서 오래 고민한 결과 부족하지만 이렇게 정리해봤다. 아마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익'이란, '사회적 약자의 사익 중 현재의 공동체 다수가 그 추구 행위를 허용하는 사익'이라고.
이를테면 우리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공익이라고 한다. 반면 노동조합의 임단협 투쟁을 공익이라고 부르려면 좀 주저하게 된다. 노동자의 투쟁은 '노동운동'이되 공익 활동이라고 하려니 좀 이상하다. 소송의 경우도 장애인 인권 사건, 아동 인권 사건은 '공익·인권 사건'이지만 노동3권 사건은 그냥 노동 사건이지 공익·인권 사건이라고 하기에 뭔가 개운치가 않다. 노동3권 역시 다른 인권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명시된 보편적 기본권인데도 그렇다. 특정 사회 구성원의 사익 추구 행위 간에도 이렇게 차이가 있다.
왜 그럴까. 앞에서 나는 '공익' 개념을 사회적 '허용' 여부와 연결 지어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제 '허용'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내 생각에는 '시스템 자체를 건드리는지 여부'가 그 기준인 듯하다. 즉 사회체제, 하부구조 또는 국가 운영방식 자체를 위협하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삼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 지배세력이 볼 때 정치경제적으로 '위험하지 않으면' 그들은 공익이라 부르는 것을 허용한다. 사람들은 동정하고 박수쳐 응원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익'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약자의 사익 중 현재의 공동체 다수가 위험하지 않다고 보아 그 추구행위를 허용하는 사익'이다.
이렇게 정의되는 공익 개념의 틀 안에서 하는 활동도 대단히 중요하다. 현재 우리 공동체가 '공익'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열심히 추구하여 쟁취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다만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서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류의 공익 활동은 '공익의 범위'를 확장하는 최전선 투쟁이었다. 만들어진 경기장 안에서의 경기를 넘어서 경기장 자체를 더 넓히는 공사(工事).
노예해방운동 당시 노예들은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짐승으로 취급받아 매질을 당했다. 여성참정권 투쟁 당시 여성에게 일어난 일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조선의 반상차별 철폐를 외친 '상놈'들은 그야말로 대중으로부터도 상놈이라고 욕먹었고 죽임을 당했다. 해당 시대, 해당 공동체에서 '공익'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그들이 가장 '이기적'인 목적으로 '과격한' 방식을 사용하여 처절히 투쟁해 승리했을 때 그 시점을 우리는 역사의 한 단계 발전이라고 지금의 교과서에 서술하고 있다. 이기적이고 과격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노예제가 철폐되고 여성이 참정권을 얻고 반상계급이 철폐되었을 때 봉건제에서 공화제로, 고대에서 근대로, 계급사회에서 민주사회로 발전한 것이다.
'공익·인권변호사'로 불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만큼 안전하고 평화롭게 사회의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허용하지 않은 '공익'을 추구하다 '위험한 변호사', '법을 무시하는 변호사', '반사회적 강성 변호사', '길거리 변호사', '피고인이 된 변호사' 이런 비아냥과 무시를 당하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고 개인적인 삶이 대단히 불안정해지며 시종 불쾌감과 스트레스가 엄습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익·인권'이라고 세상이 불러주든 말든 개의치 않고 불의한 사회 시스템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계층‧계급과 연대하여 그들이 겪는 문제의 근본적 원인인 구조 자체를 공격하여 역사를 한 단계 더 진보하게 하려는 변호사, 활동가가 많다. '공익·인권'의 개념을 확대하기 위해 세상을 상대로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는 훌륭한 '사익·이권' 투쟁가들을 응원한다. 그들에게 역사적으로 많이 빚졌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감사하며 연재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