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지난주 파산한 실리콘밸리은행(SVB)에 고객이 맡긴 예금 전액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이 조치로 파산 여파가 기업 등으로 번질 위험이 상당히 줄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사실상의 구제금융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12일(현지시각) 미 재무부·연방준비제도(Fed·연준)·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공동성명을 내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협의 뒤 SVB의 모든 예금주를 완전히 보호할 수 있는 조치를 승인 받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예금주들은 13일부터 예금액 전액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단 주주와 담보가 없는 채권자 일부는 보호 대상에서 제외됐다. 성명은 SVB 고위 경영진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고 덧붙였다.
재무부 등은 성명에서 이번 조치에 납세자 부담이 없으며 비용이 "법에 규정된 은행에 대한 특별 평가"를 통해 회수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를 종합하면 당국은 은행권이 정기적으로 지불하는 수수료로 조성한 1000억달러(약 130조2200억원)가 넘는 기금에서 이 비용을 충당할 예정이다.
당국은 투자자가 보호 조치에서 빠져 있고 경영진이 물러난 점을 들어 이 조치가 "구제금융"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옐런 장관은 12일 미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대형 은행의 투자자들과 소유자들이 구제금융을 받았다"며 "우리는 이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조치가 "예금주의 필요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조치에 대해 "미국 노동자와 소규모 기업을 보호하고 우리 금융 시스템을 안전하게 하는 신속한 해결책에 도달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이 사태를 가져온 이들에게 책임을 묻고 대형 은행 감독 및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분명히 약속한다"고 밝혔다.
지난 10일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을 대거 고객으로 둔 SVB가 파산했다. SVB는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동안 실리콘밸리 정보기술(IT) 기업 강세로 총 자산 규모를 2020년말 1155억달러(약 150조원)에서 2021년말 2115억달러(약 275조원)로 1년 만에 거의 2배로 불리며 미국 내 자산규모 16위 은행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불어난 자산 상당 부분을 채권에 투자한 이 은행은 금리 인상 탓에 채권값이 하락하며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겁에 질린 예금주들이 집단 인출(뱅크런)을 시도하며 36시간 만에 초고속 파산했다. 이 은행 예금의 85% 이상이 예금자 보호 한도인 25만달러(약 3억2600만 원)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지며 예금주인 스타트업 업계에 미칠 파장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예금 전액을 보호하겠다는 이번 정부 조치로 당장 임금 미지불과 해고 위기에 처했던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은 한숨 돌린 분위기라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미 CNN 방송은 투자은행 제프리스 분석가들이 12일 저녁 고객에게 "월요일(13일)은 많은 지역 은행 부문에서 스트레스가 큰 날이 되겠지만 오늘 조치로 추가 (위험) 확산 가능성이 극적으로 줄었다"고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SVB 파산이 금융 생태계 전반을 뒤흔들 시스템 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애닐 캐샵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교수를 인용해 SVB 붕괴가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이 금융 시스템을 위협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캐샵 교수는 미국 은행 산업은 상위 5개 대형 은행에 고도로 집중돼 있는 구조로 설사 SVB와 비슷한 규모의 다른 은행들에서 또 다른 대량 인출 사태가 일어난다고 해도 전체 금융 시스템은 여전히 기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도 은행 산업의 "회복력"을 강조하며 예금자 및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옐런 장관은 12일 CBS에 "미국 은행 시스템이 매우 안전"하며 "회복 탄력성"이 있다고 말했다. 조 맨친 미 민주당 상원의원도 이날 성명을 내 "미국 은행과 금융 시스템이 2007~2008 금융위기 이래 그 어느 때보다 튼튼하고 건전하다"고 강조했다.
SVB 파산 이틀 만인 12일 뉴욕주에 본사를 둔 시그니처은행도 파산에 직면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뉴욕주 규제당국 금융서비스부(DFS)는 이날 시그니처 은행을 폐쇄하고 FDIC를 파산관재인으로 임명했다. 시그니처 은행의 총 자산은 지난해 말 1103억달러(약 144조원), 예금은 886억달러(약 116조원) 규모로 예금 기준으로 미국 내 30위권 수준의 은행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가상화폐 부문 비중이 높은 시그니처은행이 지난해 11월 가상화폐 거래소 FTX 붕괴 이후 수십억 달러 규모 예금 이탈을 경험했으며 10일 SVB 파산이 알려진 뒤 수십 억 달러 규모의 뱅크런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연준은 이날 은행에 유동성을 지원하기 위한 새 기금(BTFP)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미 국채·주택저당증권(MBS) 등을 담보로 최대 1년 간 은행·저축조합·신용조합 등 금융기관에 대출을 제공한다. 연준은 금융기관이 대출을 위해 담보로 내놓는 자산은 시장가가 아닌 액면가로 평가하겠다고 덧붙였다. 계속된 금리 상승으로 채권값이 떨어진 상황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지원책이라는 평가다.
FDIC는 SVB의 매각을 모색하고 있지만 순식간에 파산에 이르러 홍보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이 은행의 매수 대상자를 쉽게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잠재적 인수 후보자였던 미 대형은행인 PNC파이낸셜과 캐나다 로열은행(RBC)이 매수를 거절했고 JP모건과 뱅크오브아메리카를 포함한 미국의 5대 대형 은행도 매수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고 이 문제에 직접적 지식이 있는 인물을 인용해 보도했다.
미 정부는 이번 조치가 "구제금융"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공화당 일각은 이 조치가 사실상의 구제금융으로 잘못된 경영 결정을 내린 기업에 면책을 주는 것이라며 공세에 나섰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공화당 소속 니키 헤일리 전 유엔(UN) 주재 미 대사는 소셜미디어(SNS)에 "납세자들이 SVB를 구제해선 안 된다. 투자자가 이 은행과 자산을 사들이면 된다"며 "큰 정부와 기업 구제금융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대표적 진보 정치인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12일 성명을 내 "SVB가 구제금융을 받는다면 자금 100%가 월가와 금융권에서 조달돼야 한다"며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와 그 외 사람들에 대한 강한 개인주의의 길을 계속 갈 순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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