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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정치인의 야스쿠니 참배 , 선거 아닌 더 큰 노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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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정치인의 야스쿠니 참배 , 선거 아닌 더 큰 노림수 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0] 일본 군국주의의 심장부 야스쿠니 신사 (下)

야스쿠니 신사에 식민지 출신의 전몰자들이 합사돼 있다는 사실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32년 뒤 처음 드러났다. 1977년 여름 야스쿠니를 방문한 어느 타이완 사람에게 "타이완 출신 군인·군속 전몰자 2만 7800명의 합사 통지서를 유족에게 나눠달라"고 야스쿠니 쪽에서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면서 식민지 조선 출신 전몰자 2만1000명이 야스쿠니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야스쿠니가 유족에게 알리기는커녕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일본 A급 전범자들과 함께 가둬 두고 있었다는 게 뒤늦게 드러나자, 엄청난 후폭풍이 일었다.

일본군에 강제동원됐던 가족의 생사를 몰라 30년 넘게 애태우며 지내왔던 한국과 타이완 유족들은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집안의 기둥이 어느 날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뒤로 유골은커녕 전사 통지서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 야스쿠니에 전쟁범죄자들과 함께 있다니... 우리를 또 다시 모욕하지 말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합사 철회 요구가 빗발쳤고, 재판이 줄줄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껏 일본 정부나 사법부, 그리고 문제의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유족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위로가 될 만한 어떤 조치도 내려지지 않은 상태다.

"지금도 식민지 시대입니까?"

“제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지 일본 사람이 아닙니다. ‘천황’을 위해 죽어간 사람이 아닙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어간 것도 억울한데 야스쿠니에 합사돼 있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사망 사실을 알려주지도, 합사 의향을 묻지도 않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지금도 식민지 시대입니까? 제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에서 당장 뺄 것을 다시 한 번 강력히 요구합니다”(김진영,「야스쿠니신사와 싸우는 한국인 유족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생각정원, 2017년, 370-371쪽).

위에 옮긴 글은 2015년 9월25일 한국인 유족이 일본 법정에서 야스쿠니를 질타했던 발언이다. 절규에 가까운 항변을 토해냈지만, 야스쿠니 쪽 관계자는 로봇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합사 취하 요구엔 따를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의 군인으로 죽으면, 야스쿠니에 혼령이 모셔질 거라는 마음으로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유족의 요구만으로 합사를 철회할 수 없다”는 따위의 황당한 논리를 펼 뿐이었다.

야스쿠니 문제를 깊이 다뤄온 김진영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유족들의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소송’ 투쟁을 도우며 일본 현지에서 그 재판을 지켜봤다. 유족들과 함께 현지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의 뻔뻔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라면서도, 현재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항소심으로 계류 중인 소송에서 야스쿠니 쪽을 꺾어 유족들의 아픔이 치유되길 바라고 있다.

▲ 1915년 야스쿠니 신사 안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일본군. ⒸBain News Service

일본 사법부, '종교의 자유와 관용' 내세워

야스쿠니 신사에서 한국인과 타이완인 전몰자를 빼달라는 소송들은 여러 건 있었고 일부는 진행 중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모두 패소했다. 일본 법원들은 한결같이 야스쿠니 쪽에 손을 들어줬다. 한국-일본 사이의 민족감정을 내세우지 않고, 야스쿠니의 종교인 신도(神道)가 아닌 기독교나 다른 종교적인 이유로 야스쿠니에서 빼달라는 소송은 어땠을까. 이와 관련해 1988년 일본 대법원이 내린 판결은 그 뒤 여러 건의 소송에서 재탕, 삼탕 됐다. 판결의 주요 대목은 이렇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는 타자의 신앙에 기초한 행위에 대해 관용적이어야 한다. 타자의 종교 행위로 인해 감정을 상하거나 불쾌감 혹은 혐오감을 갖는 것은 법으로 보호할 이익에 해당하지 않는다”(남상구,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동북아역사논총 50호, 2015, 207-208쪽).

듣기에는 그럴듯한 '종교의 자유와 관용'은 그렇다 치고, 한국인 유족이 야스쿠니의 역사적 역할(일본 군국주의 정신적 구심점)과 국수주의적으로 왜곡된 역사인식 때문에 ‘인격권’이 침해당했다는 소송을 건다면 어떨까. 이미 선례가 있다. 2011년 7월 도쿄지방법원은 "본건 합사 행위 등에 대해 강한 거부 의사를 표시하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원고들의 역사인식 등을 전제로 하면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지만..."이라 하면서도, ‘법으로 보호할 이익에 해당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를 다시 들먹이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강제적으로 빼앗겨 전사를 당한 고통을 맛보며 고통스러운 인생을 강요당한 원고들에게, 그 침략전쟁의 정신적 지주이자 침략자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사랑하는 아버지·형제가 합사된 것은 우롱당하고 모욕당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남상구, 209쪽).

위에 옮긴 글은 2013년 10월 또 다른 소송에서 한국인 유족이 했던 눈물어린 항변이다. 하지만 도쿄고등법원은 "전쟁에서 순직한 자 또는 그 유족이 피항소인 야스쿠니신사 합사를 바라고 있었다고 충분히 믿을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었던 상황에서 합사가 이루어졌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아들여 야스쿠니 손을 또 들어줬다.

지금의 일본 사법부를 보면, 야스쿠니가 앞으로의 어떤 소송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지난날 한반도와 만주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던 일본인 판사가 1945년 패전 뒤 양심선언을 하며 용서를 빌었다는 이야기를 일본 법조계에서 들어보지 못했다. 독일과는 달리 과거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자기성찰의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본에서 재판을 통해 야스쿠니를 이길 확률은 0%로 보인다.

▲ 야스쿠니 무단 합사를 비판하며 철폐 소송에 나선 한국인 유족들(2013년 10월22일 도교지방재판소 앞). Ⓒ민족문제연구소

일본 정부, 보상 또는 배상 거부로 3차 가해

야스쿠니에 갇힌 한국인 전몰자 상당수는 일본식 이름을 지닌 채다. 1940년부터 일제의 강요로 마지못해 바꾼 창씨개명(創氏改名) 탓이다. 8.15 뒤 남한의 미 군정청은 ‘조선성명 복구령’(군정법령 제122호, 1946년 10월23일)으로 창씨개명을 무효화시켰다. 그러면서 본래의 이름을 법적으로 되찾았다. 하지만 야스쿠니에 갇힌 한국인들은 일본식 이름 그대로다. 식민지 피지배층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됐다가 죽은 것도 원통한데, 이들의 혼령이 일본식 이름으로 야스쿠니에 갇혀 있다니... 침략전쟁의 주범이었지만 도쿄전범재판을 비껴갔던 히로히토가 그들을 두 번 거듭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의 이중성은 보상 문제에서 또다시 드러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일본과 미국 등 48개 국가가 맺은 (동아시아의 주요 3개국인 남북한과 중국이 빠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뒤, 일본 법무부는 한국인을 일본 국적에서 일괄적으로 지웠다. 이로써 일본 정부로부터 연금이나 보상금을 받을 자격이 없어졌다. 일본인 전몰자나 부상자들이 은급법이나 원호법(정식 명칭은 ‘전상병자전몰자유족등원호법’)에 따라 받는 돈을 국적 잃은 한국인은 못 받게 됐다.

야스쿠니는 "대동아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은 '천황'에게 충성을 바쳤던 사람들이니 야스쿠니에 제신으로 모셔져야 한다"고 말한다. 야스쿠니엔 합사 자격이 있다면서, 돈이 드는 보상에서는 국적이 바뀌었으니 자격미달? 이 무슨 황당한 이중 잣대인가. 일본 정부의 행태는 과거사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보상 또는 배상을 바라는 피해자들에겐 3차 가해나 다름없다. 침략전쟁에 강제로 끌고 가 죽음으로 이끈 1차 가해, 원하지 않는 곳에 혼령을 가둬둔 2차 가해에 이어서다. 바로 이래서 ‘독선적이고 오만한 일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도쿄대, 철학)의 비판을 들어보자.

“야스쿠니 신사의 식민주의적 본질은 전후 몇십 년이 지나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사한 시점에서 일본인이었다’는 이유로 식민지 출신의 모든 전사자는 영원히 식민지 통치하의 일본인이자 종주국의 수인(囚人)으로 존속하게 된다. 이것만큼 독선적이고 오만한 논리도 없을 것이다”(다카하시 데쓰야,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문제> 역사비평사, 2005, 90쪽)

"나는 그 뒤 참배하지 않았다. 그게 내 마음이다"

지난 2006년 히로히토 일왕이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이 합사된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내용이 담긴 메모가 언론에 실리면서 큰 화제를 불렀다. 메모 작성자는 1974년부터 1988년 사이에 궁내청 차장과 장관을 지냈던 도미다 아사히코였다. 그는 히로히토와 주고받은 대화를 기록한 일기 1권과 수첩 20권을 남기고 죽었다. 문제의 1988년 4월28일 '도미다 메모' 내용을 보자.

"나는 어느 때, A급 전범이 합사되고, 게다가 마쓰오카(松岡), 시라토리(白取)까지. 쓰쿠바(筑波)는 신중히 대처했다고 들었는데. 마쓰다이라(松平)의 아들인 지금 궁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마쓰다이라는 평화에 대해 강한 열망이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후 참배하지 않았다. 그게 내 마음이다."(日本経済新聞, 2006년 7월20일)

메모 속의 '마쓰오카'는 마쓰오카 요스케(1880-1946) 전 외무대신이다. 패전 뒤 도쿄 재판을 받던 중이던 1946년 6월 26일 감옥 안에서 병으로 죽었다. 괴뢰 만주국의 주요기관인 남만주철도(약칭 만철) 총재를 지낼 때 만주 관동군 특무장교였던 도조 히데키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1940년 외무대신으로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삼국동맹을 체결하는 주역으로 활동했다.

'시라토리'는 시라토리 도시오(1887-1949) 전 이탈리아 대사를 가리킨다. A급 전범으로 체포돼 도쿄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고 복역 중 후두암으로 죽었다. 일본 외무성에서 대외 강경파로 통했고, 이탈리아 대사로 있을 때인 1940년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삼국동맹을 맺는 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다. 히로히토가 '게다가'란 표현을 쓴 것으로 미뤄, 마쓰오카와 시라토리 이 둘의 야스쿠니 합사를 못 마땅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쓰쿠바'는 야스쿠니 궁사였던 쓰쿠바 후지마를 가리킨다. 1966년 후생성으로부터 A급 전범 제신명부를 건네받았지만, 합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쓰다이라’는 전쟁 직후 히로히토의 측근으로 궁내부대신을 지낸 마쓰다이라 요시타미다. 그가 죽은 뒤 아들인 마쓰다이라 나가요시가 1978년 야스쿠니 궁사로 있으면서, 앞의 쓰쿠바와는 달리 A급 전범 합사를 밀어붙였다. 말하자면 지금껏 이어지는 야스쿠니 논란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다.

▲ 일제에 강제 동원됐던 부친이 야스쿠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법정 투쟁 중인 이희자씨. 야스쿠니 합사 때문에 부친의 묘비에 이름을 새겨 넣지 못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도조를 외면한 히로히토의 냉혹성

'도미다 메모'는 히로히토가 1989년 죽을 때까지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한 이유를 말해준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자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기 전까지만 해도, 히로히토는 가끔 야스쿠니에 가서 제사를 지내곤 했다. 1945년 패전 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러 간 것은 모두 8차례. 1975년 11월 21일 참배가 마지막이었다. 1978년 전범 합사 뒤로는 완전히 발걸음을 끊었다.

메모 공개는 야스쿠니를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심장부처럼 여겨온 일본 극우파들에겐 전혀 반갑지 않은 사건이었다. 극우파들은 과거사와 관련해 불편한 자료가 공개될 때마다 일단 음모론을 제기하거나, 자료의 신빙성을 걸고넘어지는 못된 버릇이 있다. '도미다 메모'에도 시비를 걸었지만, 도미다의 사람됨이 워낙 성실했기에 금세 꼬리를 내렸다.

여기서 히로히토의 냉혹성이 또 드러난다. 그는 패전 뒤 도쿄전범재판에서 도조 히데키에게 전쟁의 책임을 모두 떠넘기고 선을 그었었다. 그렇기에 도조를 비롯한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를 들락거리는 게 정치적으로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1948년 12월23일 도조 히데키는 교수형을 바로 앞둔 형장에서 ‘천황 폐하 만세’ 삼창을 부르고 죽었다. 무려 2년 반을 끌었던 도쿄재판 법정에서 침략전쟁의 공범자였던 히로히토가 져야 마땅한 전쟁 책임을 까발리지 않고 무덤까지 가져갔던 ‘충신’이었다.

따라서 히로히토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신 도조의 넋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야 마땅했다. 도조의 혼령이 있다면, 히로히토가 야스쿠니 발걸음을 끊은 걸 두고 “참 의리도 없는 주군일세”라고 한탄하지 않았을까. 히로히토는 그런 도조와 끝까지 거리를 두는 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 여겼다. 겉모습은 좀 어리숙해 보이지만, 니콜로 마키아벨리처럼 현실정치의 냉혹함을 터득한 군주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 노림수는?

일본의 최대 우파 정치세력인 ‘일본회의’와 집권 자민당은 헌법개정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평화 조항인 제9조를 개정해 패전 뒤 포기했던 무력행사권과 국가교전권을 되찾고, 아울러 정교분리를 규정한 제20조를 개정해 야스쿠니 이데올로기인 신도(神道)를 강화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는 과거사 반성은커녕 복고주의로 역행하려는 위험한 발상이다. 이와 관련, 일본의 극우세력을 꾸준히 연구해온 역사학자의 분석을 옮겨본다.

"전후 일본은 (전쟁포기를 밝힌 평화헌법을 바탕으로) 평화국가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국민들은 전전(戰前)과는 다르게 전쟁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베 신조를 비롯한 일본)수상들이 야스쿠니 참배를 계속하고 야스쿠니를 (국립묘지와 같은 국가시설로) 공식화해서 일본인들이 전전처럼 (침략)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보수세력의 노림수이다"(한홍구, <한일 우익근대사 완전정복> 창비, 2020, 67쪽).

한홍구 교수(성공회대, 한국현대사)에 따르면, 우파 정치인들이 야스쿠니를 들락거리는 것은 단순히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지지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좀 더 큰 노림수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이다. 일본의 극우들은 일본이 진정한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선 다른 무엇보다 걸림돌인 평화헌법이 개정되길 바란다. 2022년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피격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개헌선을 확보한 상태라 언제든 개헌이 가능하다.

여러 비판적 연구자들의 분석을 모아보면, 일본 극우들의 최종 목표는 지금의 자위대를 ‘보통국가’의 군대처럼 교전권을 지닌 국군으로 탈바꿈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궁극적인 목표는 지금의 ‘상징 천황제’를 '절대 천황제'로 바꿔 1945년 이전처럼 '천황'이 군 통수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일본 안팎의 반대여론 때문에 당장은 어렵겠지만 관심 갖고 지켜볼 일이다. 일본의 극우화 흐름에 비추어, 언젠가 자고 일어나면 놀라운 소식을 들을지도 모른다.

▲ 야스쿠니 경내에서 욱일기를 매고 행진하는 일본 극우들. Ⓒ一貫斎

야스쿠니와 함께 군국주의 부활 노린다

헌법 개정과 아울러 일본 극우들은 150년 넘는 역사를 지닌 민간 종교시설 야스쿠니가 국가시설(국립묘지)로 바꿔지길 바란다. 헌법 개정을 거쳐 위의 두 가지 목표(군대 교전권과 ‘천황’ 통수권)가 이뤄진 뒤 언젠가 전쟁이 벌어진다면, 야스쿠니의 상황은 예전의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다. 군 통수권을 지닌 ‘천황’의 명령으로 해외파병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전몰자는 야스쿠니에 합사돼 제신(祭神)으로 추앙될 것이다.

태평양전쟁 때의 일본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고, 야스쿠니를 성지로 여기는 극우들이 지닌 꿈이 바로 그런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이다. 그들은 오늘도 야스쿠니 신사를 들락거리며 일본이 지난날 군국주의로 되돌아가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그리고는 카미카제 자살특공대원의 동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그들에게 지난날 동아시아 사람들을 강제동원으로 희생시켰던 기억은 지워진지 오래다.

최근까지도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극우 정치인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에도 아랑곳없이 야스쿠니 참배를 되풀이하고 있다. 야스쿠니와 동아시아의 평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와 일본의 우경화와 재무장, 동아시아의 갈등 고조는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돼 있다"는 김진영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김진영, 378쪽).

이즈음 일본의 시대착오적 정치·종교 이념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과거사의 잘못을 부정하고 오히려 미화하려든다면, 또한 사과는커녕 침략전쟁의 희생자에 대한 배상도 거부한다면, 동아시아의 화해도 어렵고 평화는 더더욱 어렵다.

다음 주 글 미리보기: 이즈음 강제동원 피해 배상을 둘러싸고 한국 안에서 논란이 뜨겁다. 일본 전범기업들은 강 건너 불처럼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중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됐는가. ‘정신대’와 ‘위안부’를 비롯해 어떤 방식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됐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귀한 목숨들을 앗아갔는가. 일제 강점기의 희생자들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배상이 왜 지금껏 이뤄지지 않았는가. 일본의 전쟁범죄와 관련해 생각하면, 안타깝고 서글픈 물음들뿐이다. 답답하지만 과거사를 바로 새겨보자는 뜻에서, 독자들과 함께 이 문제들을 짚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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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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